견고했던 진열장을 뒤집자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가 열렸다.
키아프 서울 2025의 특별전 <리버스 캐비닛>은 현대미술의 상업성과 예술성이 교차하는 아트 페어에서
‘수집’과 ‘진열’이라는 예술의 가장 원초적인 힘을 들여다본다.

진열장을 뒤집을 때
“수집은 세계에 관한 제안이다. 세상의 무수한 파편들 가운데 극히 일부를 골라 정교한 목록을 만들고, 그 목록으로 세계의 질서를 재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키아프 서울 2025 특별전 <리버스 캐비닛> 서문 中
올해 키아프 서울 특별전 <리버스 캐비닛(Reverse Cabinet)>은 ‘수집’과 ‘진열’이라는 미술의 근본적 성질에 질문을 던지며 출발한다. 수집은 미술사의 흐름을 기록하는 행위이며, 진열은 그 수집물을 배치하고 보여주는 전시의 형식이다. 무엇이든 수집과 진열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모든 것이 선택되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개인과 시대의 취향에 따라 선택 된 것만이 그 자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결국 수집과 진열은 ‘무엇이 가치 있는가’를 드러내는 지표이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는 과정이 된다.
이번 전시의 특별한 점은 한일 수교 60주년을 기념해 각국의 큐레이터와 여섯 명의 작가가 모였다는 것이다. 동시대 미술 담론에 통찰력 있는 시각을 제시해온 한국의 윤율리 큐레이터(일민미술관 학예실장)와 전시를 통해 인간 존재를 탐구하는 일본의 이와타 토모야(Tomoya Iwata) 큐레이터(The 5th Floor 디렉터) 가 공동 기획을 맡았다. 한국의 돈선필, 정금형, 염지혜, 오가영, 일본의 다케무라 케이(Takemura Kei), 다카하시 센(Takahashi Sen)이 참여해 수집과 진열의 개념을 뒤집고 확장하는 작업을 선보인다.
<리버스 캐비닛>이 펼쳐지는 공간이 국내 최대 규모의 아트 페어인 키아프 서울이라는 점도 흥미롭다. 아트 페어는 현대미술의 상업성과 예술성이 교차되는 역동적인 공간이자 작가, 컬렉터, 관람객, 갤러리스트 등 여러 미술계 구성원들의 관점이 뒤섞이는 장소다. 이곳에서 미술은 관조와 감상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창작과 소유, 해석과 유통 등 수많은 상호작용 속에 놓인다. 윤율리 큐레이터는 아트 페어의 공간성에 기반해 ‘작가-컬렉터-관람객’이라는 전통적인 삼각 구도가 얼마나 가변적일 수 있는가에 주목했다. 이번 특별전은 작가가 창작하고, 컬렉터는 작품을 모으고, 관람객은 결과물을 감상하는 경직된 구조를 해체한다. 전시 안에서 작가는 컬렉터가 되고, 관람객은 수집되고 진열된 것들의 관계를 파악하며 자신만의 해석으로 전시를 완성한다. 윤율리 기획자는 이 특별전을 통해 “어떤 작품을 구입하거나 판매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선행해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의 문제를 재고할 수 있길 바란다”라고 밝혔다. 한편, 이와타 토모야 기획자는 수집 행위 자체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며 예술 작품을 수집하는 데 따르는 책임을 환기하고자 한다. 그는 이번 전시가 ‘수집이라는 행위가 요구하는 책임의 본질에 대해 관람객 스스로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수집욕의 근원’부터 ‘영원이라는 환상’까지


<리버스 캐비닛>에 참여한 6인의 작가는 수집가로 분해 저마다의 ‘수집과 진열’을 선보인다. 서브컬처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작품 세계를 일궈온 작가 돈선필은 피규어, 굿즈와 같은 사물을 통해 대중문화와 순수미술이 어떤 방식으로 수집 욕망을 형성하는지 관찰한다. ‘포트레이트 피스트(Portrait Fist)’는 애니메이션에서 발견할 수 있는 ‘얼굴’ 이미지에 주목하며 그것이 어떻게 개인의 정체성이나 성격을 함축해 전달하는지 살피고, 그 안에 담긴 문화적 의미를 탐구한 작품이다. 이처럼 그의 작품 세계는 동시대 이미지의 생산과 소비, 복제와 유통 방식을 둘러싼 사회현상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기계, 인형, 일상적 사물을 자신의 신체와 결합하여 인간과 사물의 관계를 탐구해온 시각예술가 정금형도 이번 전시에 함께한다. 그의 작품 세계에서 사물은 고정된 관찰의 대상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인간과 교감하는 살아 있는 존재다. 더 나아가 그는 사물 간 관계를 탐구하는 식으로 작업을 확장해왔는데, 그 과정에서 ‘작업실 겸 수장고’라는 공간을 운영했다. 전작 ‘컨디션 체크(Condition Check)’ 역시 미술관 수장고를 주제로 사물이 보존 및 관리되는 방식, 제도적으로 일반화된 유통과 소유의 메커니즘을 탐구한 결과다.
앞서 언급한 두 작가가 물리적 영역의 수집을 다룬 것과 달리, 염지혜는 보이지 않는 데이터를 수집한다. 그는 이번 특별전에서 유일하게 비디오와 영상 설치 형식을 활용한다. 작가는 방대한 리서치를 통해 개인적인 경험과 역사의 거대한 서사가 교차하는 지점을 탐색하고, 그것을 하나의 영상으로 탄생시키는 작업을 이어왔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자신이 오래도록 탐구해온 수집의 방법론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을 선보인다. 아마존에서 분홍돌고래를 마주한 경험을 바탕으로 제작한 작품 ‘분홍돌고래와의 하룻밤(A night with a Pink Dolphin)’에는 돌고래에 얽힌 원주민의 전설, 식민 역사, 생명 착취의 문제가 다층적으로 얽혀 있다.


디지털 이미지를 수집해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진열해온 오가영 작가는 도시를 거닐며 스마트폰으로 찍은 자연의 사진을 전시 환경에 맞춰 변형하고 재배열한 작품인 ‘해프 스티키(Half Sticky)’ 연작을 선보인다. 그는 단순히 이미지를 수집하는 것뿐만 아니라, 매체가 수집되고 진열되는 방식에 주목한다. 디지털 이미지를 프린팅하고 ‘사진-설치’ 작업으로 새롭게 구현하는데, 이 과정을 통해 ‘사진’은 순간을 기록한 이미지에 머물지 않고 낯선 조각의 형태로 새로운 의미를 품은 채 공간에 자리한다.

Dynasty, Japanese silk thread, Japanese silk cloth, 12×12×8.3cm, 2025
한편 다케무라 케이는 파손된 일상 사물에 담긴 기억과 흔적을 수집하고, 또 보존한다. 아끼던 식기가 떨어져 산산조각 났을 때, 깨진 조각을 얇은 커튼 천에 급히 감싸안던 우연적인 순간에서 작가의 ‘Renovated XXX’ 연작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는 깨진 조각을 비단실로 정성스레 잇고 감싸는 과정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감각하게 하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인터넷 경매로 구한 조선시대 찻잔을 복원한 작업을 선보인다.

마지막으로 다카하시 센의 작품은 관람객에게 ‘무언가를 수집하고 영원히 소장하려 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조각을 보존하고 수복하는 전문가로 일하던 그는 역설적으로 사물이 지닌 소멸의 필연성을 탐구해왔다. ‘모든 것은 변하며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 그것이 작가가 작업을 이어가며 품고 있는 태도다. 그의 작품 ‘부패하는 컬렉션’은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작품과 컬렉션이 지니는 의미 역시 끊임없이 변화함을 드러낸다.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으로

<리버스 캐비닛>의 ‘진열장을 뒤집는 행위’는 진열장의 물리적 재배치만을 뜻하지 않는다. 여섯 명의 작가가 수집과 진열에 대한 저마다의 사유, 그것에 기반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컬렉션을 선보였을 때 우리는 익숙하게 믿어온 질서 자체를 전복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마주하지 못했던 무수한 현실의 목록을 제시하며, 세계가 언제든 다시 수집되고 진열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개인의 취향을 넘어 시대를 비추는, 끊임없이 아름다움을 창출하려는 ‘수집’. 그리고 그것을 세상에 드러내며 함께 가치를 공유하는 ‘진열’. <리버스 캐비닛>은 이 수집과 진열의 잠재력을 동시대 미술의 문맥 안에서 새롭게 조명한다.
키아프 서울 2025 특별전
<리버스 캐비닛(Reverse Cabinet)>
일정 9월 3일~9월 7일 (키아프 서울 2025 개최 기간)
장소 코엑스 Hall A, B홀 및 그랜드볼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