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히 따라온 시계와 달력, 표준시는 과연 누구의 기준일까. 샤넬 컬처 펀드의 후원으로 진행하는 리움미술관의 중장기 연구 프로그램 ‘아이디어 뮤지엄’이 세 번째 프로젝트 <블랙 퀀텀 퓨처리즘: 타임 존 프로토콜>을 선보인다. 지워진 역사와 억압된 목소리를 복원하며, 저마다의 속도와 리듬으로 흘러가는 또 다른 시간의 풍경이 그 안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리움미술관의 중장기 연구 프로그램 ‘아이디어 뮤지엄(Idea Museum)’이 세 번째 프로젝트로 시간성에 대해 탐구하는 전시 <블랙 퀀텀 퓨처리즘: 타임 존 프로토콜>을 선보인다. 샤넬 컬처 펀드(CHANEL Culture Fund)의 후원으로 2023년부터 개최해온 아이디어 뮤지엄은 미술관의 사회적 역할을 모색하고자 해마다 시의성 있는 주제를 선정해 강연, 대담, 워크숍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자리다. 지난 2년간 기후 위기, 젠더와 다양성에 관한 심포지엄을 진행한 데 이어 올해는 시간이라는 주제에 주목해 아티스트 컬렉티브 ‘블랙 퀀텀 퓨처리즘(Black Quantum Futurism)’의 프로젝트를 바탕으로 우리가 익숙하게 따르던 시간 개념에 질문을 던지고, 그 바깥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무대를 마련했다.
블랙 퀀텀 퓨처리즘은 음악가 카메이 아예와(Camae Ayewa)와 작가 겸 변호사 라시다 필립스(Rasheedah Phillips)로 이루어진 아티스트 듀오로, 흑인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경험해온 시간의 억압과 단절을 주요한 주제로 다뤄왔다. 이들은 시간의 흐름을 과거에서 현재, 미래처럼 한 직선 위에 늘어선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여러 갈래로 중첩되고 교차하는 경로로 이해할 것을 제안하며, 주류적 시간관이 지워온 목소리를 복원하는 것을 기조로 삼는다.
전시의 출발점은 1884년에 워싱턴에서 열린 국제 자오선 회의다. 이 회의에서 영국의 그리니치천문대를 통과하는 자오선이 본초자오선으로 채택되며 세계 표준 시간의 기준으로 지정된 것은, 세계의 시간을 서구를 중심으로 재편한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었다. 블랙 퀀텀 퓨처리즘은 이에 의문을 제기하며 서구화된 규범이 어떻게 흑인 공동체의 고유한 시간 감각을 억압하고 배제해왔는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추적한다.

9월 1일 열린 개막 행사에서는 두 아티스트가 40분에 달하는 퍼포먼스 ‘붕괴된 시간, 표류하는 선들’을 선보이며 전시의 시작을 알렸다. 시계와 자오선, SF소설 속 미래를 주제로 한 선언적 텍스트를 낭독하는 목소리 위로 즉흥적으로 구현한 사운드가 겹쳐지며 공간 전체를 감쌌다. 이어서 전시가 열리는 M2 공간에는 세계 표준시의 체계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작품들이 펼쳐졌다. 그중 ‘TZP 시간 지도’는 역사적 사건들을 연대기순이 아닌 비선형적 연결망의 형태로 배열해 세계의 시간 질서가 서구를 중심으로 식민화된 과정을 시각화해 보여준다. 또 다른 작품인 ‘CP 시간선’은 “흑인들은 약속 시간에 항상 늦는다”는 의미로 사용되곤 하는 ‘CP Time(Colored People’s Time)’이라는 차별적 표현이 대중문화 속에서 어떻게 재생산되어왔는지를 돌아본다.
블랙 퀀텀 퓨처리즘이 제안하는 대안적 시간성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 안에서 교차하고, 공동체의 기억과 리듬이 저마다의 속도로 흘러가는 다층적인 구조를 띤다. 이 관점은 표준시, 달력, 시계가 만든 획일화된 기준을 거부하고, 흑인 여성 공동체가 삶을 조직하고 시간을 체험해온 고유한 감각을 바탕으로 시간 개념을 새롭게 설계하려는 시도로 이어진다. 이번 전시는 퍼포먼스뿐만 아니라 매핑, 사운드, 영화, 진(매거진)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지역사회와 긴밀히 연결된 프로젝트를 선보여온 블랙 퀀텀 퓨처리즘의 작업 세계를 망라한다.

전시장 한쪽에는 관객 참여형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세계의 시간선에서 바꾸거나 고치고 싶은 사건은 무엇인가요?” “젠더, 성적 지향, 나이, 인종, 장애와 같은 개인의 정체성이 시간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나요?” 이 같은 질문에 답을 남기며 관람객은 그간 당연시했던 서구 중심의 타임라인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개막 직후 사흘간 이어진 연계 프로그램 <본초자오선 언컨퍼런스>에는 아티스트를 비롯해 종교학자, 생태학자, 건축가 등 문화계 인물들이 참여해 서울이라는 맥락 속에서 아시아의 시간성을 탐구하는 자리를 가졌다.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가 빚어낸 시간에 대한 감각을 교환하며 대안적인 시간성을 모색하는 실험적인 현장이었다.
<블랙 퀀텀 퓨처리즘: 타임 존 프로토콜>은 묻는다. 하나의 통일된 질서가 세계에 강요될 때 무엇이 배제되고, 공동체의 기억과 리듬은 어디로 사라지는가? 전시는 관객에게 표준화된 시간을 거슬러 저마다의 속도로 흐르는 또 다른 시간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아이디어 뮤지엄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단순히 동시대의 담론을 전시하는 것을 넘어 미술관이 세계에 대한 사유와 상상의 지평을 확장하는 현장으로 거듭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블랙 퀀텀 퓨처리즘: 타임 존 프로토콜
기간 9월 4일~28일 후원 샤넬 컬처 펀드
장소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리움미술관 M2 2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