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향년 96세로 별세했습니다.

©Louis Vuitton

호흡기 질환을 앓았던 프랭크 게리(Frank Gehry)는 이날 로스앤젤레스 산타모니카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고 전해졌습니다. 그는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시애틀 대중문화 박물관,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등을 통해 현대 건축의 형태와 기술, 도시 전략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 변화를 이끌어낸 인물로 평가받는데요. 또한 그는 개념으로만 존재하던 해체주의 건축과 실험실 수준에 머물던 디지털 곡면 설계를 실제 도시 풍경 속 실현 가능한 건축물로 구현해 낸 선구자이기도 하죠.

그는 1929년 캐나다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습니다. 하버드 대학원에서 도시계획을 잠시 수학했으나 곧 학문을 떠나 실무 현장으로 뛰어들었죠. 1950년대에는 ‘쇼핑몰의 아버지’로 불리는 빅터 그루엔(Victor Gruen)의 사무실 등에서 실무 경험을 쌓으며 본격적인 건축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후 1962년, 자신의 사무소를 설립하며 본격적인 독자 활동을 시작했고, 이 사무소는 훗날 게리 파트너스(Gehry Partners)로 자리 잡게 되죠.

유년 시절, 할아버지가 운영하던 철물점에서 다양한 재료를 만지며 작은 도시와 집 모형을 만들던 경험은 훗날 기성 재료를 건축적 감각과 결합하는 그의 독창적 조형 세계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1970년대에는 산타모니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LA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철망·골판 철판·합판 등 공업용과 일상적 재료를 건축에 끌어들이는 실험적 작업을 펼쳤죠. 기존 주택을 낯선 재료로 감싸 해체와 충돌의 미학을 드러낸 이 시기의 작업들은 이후 ‘초기 해체주의’의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Museo Guggenheim Bilbao
©Museum of Pop Culture
©Los Angeles Philharmonic

이러한 실험적 작업들을 바탕으로 그는 점차 국제적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마침내 1997년, 스페인 빌바오에 개관한 구겐하임 미술관을 통해 세계적인 명성을 확고히 다지게 됩니다. 티타늄 패널로 뒤덮인 유선형의 조형은 단순한 미적 성취를 넘어 쇠락하던 산업 도시의 재생을 이끌었고, 이는 ‘아이코닉 건축이 도시 경제를 살린다’는 의미의 ‘빌바오 효과(Bilbao Effect)’라는 용어를 탄생시킬 만큼 강력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2000~2010년대에는 굵직한 프로젝트를 연이어 선보였습니다. 시애틀 대중문화 박물관과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시카고 의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 파리의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 등 도시를 대표하는 상징적 건축물들을 잇달아 완성하며 그만의 조형미를 세계 곳곳에 각인시켰죠.

프랭크 게리가 한국에 남긴 유일한 실현작은 2019년 개관한 루이 비통 메종 서울인데요. 강남구 청담동에 자리한 이 건물은 흰색 석재 큐브 위에 곡선 유리 패널을 여러 겹 쌓아 올린 형태로, 마치 ‘유리 돛’ 혹은 ‘유리 파도’를 연상시키는 독창적 외관을 자랑하죠. 게리는 당시 설계 과정에서 수원 화성, 부산 동래학춤, 종묘 제례 등 한국의 전통 건축과 문화유산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고 직접 밝힌 바 있습니다.

그의 건축은 조각처럼 유기적인 곡선미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구겐하임 미술관, 댄싱 하우스 등에서 확인할 수 있듯, 곡면 패널이 겹겹이 흐르듯 쌓인 실루엣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 잡았죠. 물고기, 파도, 돛, 바람처럼 흐름을 품은 자연의 이미지에서 영감받아, 정지된 건축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작업을 끊임없이 시도해 왔습니다. 또한 그는 ‘값싼 재료’와 ‘고급 건축’이라는 상반된 요소를 충돌시키며 자신만의 미학을 구축했는데요. 초기에는 체인 링크 펜스, 골판 철판, 합판, 노출된 목구조 등 거칠고 투박한 재료들을 과감히 사용해 전통적인 고급 건축의 개념에 도전했고, 이후에는 티타늄, 스테인리스 스틸, 유리처럼 고급 소재를 조형적으로 다듬으며 보다 정제된 형태로 진화해 나갔죠.

이처럼 건축의 스펙트럼을 끝없이 확장해 온 그는 비록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건축의 풍경은 도시와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질문을 던지고 새로운 상상력을 깨우는 유산으로 남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