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몇 년 동안 파리는 단지 아트 바젤 파리를 개최하는 것을 넘어, 문화 캘린더 자체를 다시 쓰는 도시가 되었다.
유산과 현대성이 공존하고, 세계 최고의 아티스트와 디자이너, 컬렉터가 모여 ‘다음’을 결정하는 곳.
그곳이 바로 지금의 파리다.

그랑 팔레에서 펼쳐진 2025 아트 바젤 파리 현장

“아트 페어는 박물관처럼 과거를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가장 동시대적 예술의 흐름을 실시간으로 포착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트 바젤 파리는 단순히 ‘파리에서 열리는 아트 바젤’이 아니라, 고유한 정체성을 지닌 독립적인 페어로 자리매김하고자 합니다.” 2025 아트 바젤 파리(Art Basel Paris 2025)를 총괄하는 클레망 들레핀(Clément Delépine, Director of Art Basel Paris)이 올해 페어를 앞두고 남긴 말이다. 준비 기간이 7개월에 불과했던 2022년 첫 회를 지나, 그랑 팔레 공사 지연으로 어수선하게 진행한 2023년과 2024년까지. 아트 바젤 파리는 지난 몇 년 동안 늘 변화 속을 걸어야 했다. 하지만 올해 마침내 복원된 그랑 팔레 전관을 온전히 사용하게 되면서 갤러리 선정, 내러티브 구축, 관람 동선 설계 등 다방면에서 아트 바젤 파리만의 고유성을 구현할 수 있었다.

41개국 2백6개 갤러리가 참가한 올해 페어의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아방 프리미에르(Avant-Première)’의 도입이다. 기존에는 VIP 프리뷰가 실질적으로 관람객에게 작품이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으나, 올해는 하루 먼저 열린 아방 프리미에르를 통해 전시가 사전에 공개되었다. 이 행사에서 참가 갤러리 2백6곳은 각자 원하는 컬렉터에게 최대 6장까지 초대장을 보낼 수 있었고, 이러한 변화는 올해 작품 판매 방식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이 행사로 인해 첫날부터 주요 역사적 작품이 고가에 판매되며 침체된 글로벌 미술 시장에도 활력을 불어넣었다. VIP 프리뷰 당일 아침에는 9시 20분부터 입장을 서두르는 관람객의 긴 줄이 이어졌고, 아방 프리미에르로 이미 달궈진 현장의 분위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박물관급 작품을 선보인 가고시안.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작품 앞에서
데이비드 즈워너의 게르하르트 리히터 작품
화이트 큐브는 중국의 차이 궈 창 작가 작품을 선보였다.

올해 아트 바젤 파리는 근현대 미술 전반에 걸쳐 수준 높은 프레젠테이션이 펼쳐졌으며, 블루칩 작가의 대표작부터 다음 시장을 이끌 차세대 신진 작가들의 작품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이 공존했다. 이 다층적 스펙트럼은 공간 구성에서도 명확히 드러났다. 1층 메인 섹터의 ‘갤러리스(Galeries)’ 섹션에서는 세계 미술 시장의 흐름을 주도하는 메가 갤러리와 메가 아티스트들이 자리했고, 발코니 층에는 미래의 가능성을 먼저 보여주는 ‘이머전스(Emergence)’ 섹션이 마련되었다. 1층 중앙에는 세계 미술계를 움직이는 메가 갤러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그러나 물량이 아니라 작품의 질과 전시 맥락으로 연결된 부스들은 아트 바젤 파리가 단순한 ‘백화점식 나열’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현재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역사적 작품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특히 많은 찬사를 받은 곳은 가고시안(Gagosian)이었다. 이들의 부스는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회화부터 현대미술의 신성 제이드 파도유티미(Jadé Fadojutimi)에 이르는 흐름을 한 공간 안에 구성하며,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예술사의 큰 맥락을 보여줬다. 이는 여느 아트 페어에서는 보기 어려운 구성이었다. 데이비드 즈워너 갤러리(David Zwirner Gallery)는 보도 자료를 통해 이번 아트 바젤 파리를 “지금까지 파리에서 열린 행사 중 가장 성공적인 페어”라고 평가했다. 루스 아사와(Ruth Asawa)의 조각, 마르틴 키펜베르거(Martin Kippenberger)의 회화,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의 회화 등이 높은 가격에 판매됐다. 파리를 본거지로 두고 있는 페로탱(Perrotin) 역시 VIP 프리뷰에서 강력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의 작품 10여 점이 고가에 판매되었고, 다수의 드로잉과 종이 작업도 활발히 거래되었다. 이처럼 화이트 큐브(White Cube), 템플롱(Templon), 타데우스 로팍(Thaddaeus Ropac) 등 유럽의 주요 갤러리들은 견고한 시장의 신뢰와 국제 컬렉터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아트 바젤 파리의 존재감을 공고히 했다.

이스라엘 작가 아이샤 에 아라르를 소개한 상티 트르
이신자 작가의 다양한 직물 작품으로 주목 받은 티나 킴 갤러리

하지만 아트 바젤 파리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는 1층 중앙부가 아니라 2층에 있었다. 발코니 층의 ‘이머전스’ 섹션을 두고 들레핀 디렉터는 “여기가 미래입니다”라고 소개했다. “오늘의 거장 갤러리라 불리는 데이비드 즈워너, 에스터 쉬퍼, 노이게리엠슈나이더 역시 한때는 리스트(Liste) 같은 바젤의 위성 페어에서 시작한 젊은 갤러리였습니다.” 그는 인내와 큐레이토리얼한(전시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험대 위에 올려놓는) 헌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마리 마데크가 설립한 상티 트르(Sans Titre) 갤러리를 대표 사례로 들었다. 아트 바젤 파리는 이 갤러리를 초기부터 꾸준히 지원해왔고, 이제는 메인 섹터에서도 전시하게 되었다는 말과 함께 “이런 성장을 장려하고 싶습니다. 유행에 휘둘리지 않고, 시간과 함께 성장하는 방식을요”라고 덧붙였다.

이머전스가 미래의 시간을 내다본다면, ‘프레미스(Premise)’ 섹션은 과거를 다시 불러낸다. 2024년에 새롭게 마련된 프레미스는 역사를 하나의 직선으로 바라보는 방식에 의문을 던졌다. 1900년 이전의 작품을 다루지만, 이를 동시대 시선 속에 놓아 서로 다른 시대의 예술이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누도록 한 것이다. 폴린 파베크(Pauline Pavec)는 오랜 시간 가려져 있었던 마리 브라크몽(Marie Bracquemond)을 다시 무대 위로 불러내고, 티나 킴 갤러리(Tina Kim Gallery)는 이신자 작가 작품을 통해 직물이 지닌 표현의 가능성을 새롭게 보여주는 식이었다. 루치아 모홀리(Lucia Moholy)의 시선은 리즈 데셰네스(Liz Deschenes, Kadel Wilborn)의 작업과 겹쳐지며 새로운 결을 만들고, 재닛 올리비아 헨리(Janet Olivia Henry, Gordon Robichaux & STARS)의 정치적 디오라마는 에밀리 캄 킁와레예(Emily Kam Kngwarreye, Château Shatto), 엑토르 이폴리트(Hector Hyppolite, The Gallery of Everything)의 작품들과 함께 놓이며 또 다른 층위를 만들어냈다. 그렇게 이머전스와 프레미스는 전시를 바라보고 시간을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큰 호흡을 이뤄냈다. 앞으로 다가올 것을 비추고, 다른 하나는 아직 충분히 이야기되지 않은, 제 목소리를 얻지 못한 것들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이 두 섹션의 병치야말로 아트 바젤 파리만이 할 수 있는 대범한 시도이며, 아트 페어를 단순히 아트 백화점으로 여기는 이들의 관념을 깨는 도전이었다.

퍼블릭 프로그램의 공식 파트너인 미우미우의 <30 Blizzards>
프티 팔레에서 공개된 율리우스 폰 비스마르크의 키네틱 조각
Courtesy the artist; Alexander Levy, Berlin; Sies + Höke, Düsseldorf

올해는 그랑 팔레를 넘어 도시 전체로 뻗어나가는 장외 전시 역시 제 몫 이상을 해냈다. 단순한 부대 행사를 넘어, 아트 바젤 파리의 외연을 넓히는 중요한 축으로 기능한 것이다. ‘퍼블릭 프로그램’은 도시 곳곳에서 다양한 결을 만들어내며 아트 바젤 파리의 성격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였다. 2025년에도 미우미우(Miu Miu)는 2년 연속 공식 파트너로 참여하며 이 흐름을 이어갔다. 지난해 고쉬카 마추가(Goshka Macuga)가 아카이브와 픽션, 선언문을 결합해 여성의 서사를 드러냈던 <Tales & Tellers>가 그랬듯, 올해 역시 팔레 디에나(Palais d’Iéna)에서는 2016년 터너상 수상자인 헬렌 마튼(Helen Marten)이 패션과 미술, 내러티브를 교차시키며 동시대의 감각을 연결하는 새로운 장을 열고자 했다. 이 밖에 윈스턴 처칠 애비뉴 주변에는 알린 셰쳇(Arlene Shechet), 보이테흐 코바르지크(Vojtěch Kovařík), 토머스 하우스아고(Thomas Houseago)의 조각이 놓여 도시 풍경의 스케일을 한층 넓혔다. 프티 팔레(Petit Palais)에서는 율리우스 폰 비스마르크(Julius von Bismarck) 의 절단된 기린 조각이 비스마르크 동상과 마주 서며 이색적 장면을 만들어냈으며 방돔 광장에서는 알렉스 다 코테(Alex Da Corte)의 크고 유머러스한 개구리 조형물 ‘Kermit the Frog, Even’(2018~2024)이 자리하며 현대미술의 무게를 가볍게 덜어냈다.

루이 비통 재단의 <게르하르트 리히터>전

무엇보다 올해 아트 바젤 파리를 성공적으로 이끈 주체를 꼽는다면 메가 미술관의 특별전일 것이다. 이들의 전시는 10월 넷째 주의 파리를 도시 전체가 살아 있는 전시 공간으로 확장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뮤지엄 전시, 갤러리 디너, 위성 전시가 끊임없이 이어지며, 파리는 하나의 거대한 예술 네트워크처럼 움직였다. 그중 루이 비통 재단(Fondation Louis Vuitton)의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한 세대에 단 한 번 목격할 만한 방대한 회고전이자, 2025년 가장 중요한 미술관 전시로 손꼽히는 기획이었다. 디터 슈바르츠(Dieter Schwarz)와 니컬러스 세로타(Nicholas Serota)가 큐레이션한 이번 전시는 1962년부터 2024년까지 제작된 리히터의 작품 2백70여 점을 아우른다. 사진을 기반으로 한 리얼리 즘 작품부터 빛처럼 흔들리는 추상화, 그리고 말년의 유리 작업까지, 작가의 거의 모든 시기를 관통하는 이 연대기적 구성은 ‘기념비적 회고전’이라는 평가를 충분히 납득하게 했다.

장 누벨이 완성한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부르스 드 코메르스 전시 <미니멀(Minimal)> 내 메그 웹스터(Meg Webster)의 설치 작품

가장 뜨겁게 회자된 이슈 중 하나로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의 개관도 있었다. 장 누벨(Jean Nouvel)이 설계한 파리 팔레-루아얄 (Place du Palais-Royal)의 새로운 건물에서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이 마침내 문을 연 것이다. 개관전 <Exposition Générale>는 작가 1백 명이 참여한 작품 6백 점을 한데 모아 미술관이 도시 안에서 어떻게 존재하고 기능할 수 있는지를 새롭게 정의한 전시다. 열린 구조,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동선, 그리고 동시대적 삶의 리듬과 깊이 연결된 공간. 까르띠에 재단이 지향하는 미술관의 모습을 온전히 구현해냈다. 이와 더불어 이 예술의 소란함의 대척점에서 부르스 드 코메르스(Bourse de Commerce)는 전시 <미니멀(Minimal)> 을 통해 성찰하는 미술의 본질로 시선을 돌렸다. 애그니스 마틴(Agnes Martin), 댄 플래 빈(Dan Flavin), 로버트 리먼(Robert Ryman) 등 전통적인 미니멀리즘 거장뿐만 아니라 일본의 모노하(Mono-ha), 브라질의 네오콘크리트주의 등 아시아·남미 작가들까지 포함해 미니멀리즘의 지형을 확장했으며 전통적으로 백인 남성 미국 작가 중심으로 축소돼 있던 미니멀리즘 미술사를 넘어 여성 작가와 유색인종 작가, 비서구권 작가들을 미니멀리즘의 중심으로 재위치시켰다. 이와 동시에 파리의 다른 한편에서는 디자인 마이애미가 열렸고, 보다 대담하고 실험적인 성격을 띠는 파리 인터내셔널(Paris Internationale)이 개막했다. AKAA, 아시아 나우(Asia NOW), 새롭게 등장한 세라믹 아트 페어 파리(Ceramic Art Fair Paris)에 이르기까지 활발한 인디 신이 만들어내는 조합으로 동시대적 생기가 흘렀다.

올해 파리는 막대한 자본력과 깊은 역사적 기반 덕분에 더 이상 바젤과 경쟁하는 도시가 아니라, 이미 그 지점을 넘어섰다는 평을 받았다. 이제 미술 관계자와 애호가들은 이 일주일을 중심으로 연간 일정을 짠다고 한다. “런던과 파리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저는 파리를 택할 겁니다. 이곳이야말로 유럽의 심장이며, 언더그라운드 감성과 대형 미술관이 공존하는 곳이죠.” 상하이 탱크 아트센터 디렉터 단차오(Dan Qiao)의 이 말은 10월 넷째 주의 파리가 얼마나 온전히 예술로 가득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제 파리는 마이애미, 바젤, 런던을 제치고 컬렉터들이 가장 사랑하는 ‘아트 위크’라는 위치를 공식적으로 차지했다. 지난 몇 년 동안 파리는 단지 아트 페어를 개최하는 데 그치지 않고, 문화 캘린더 자체를 다시 쓰는 도시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유산과 현대성이 공존하고, 세계 최고의 아티스트와 디자이너, 컬렉터가 모여 ‘다음’을 결정하는 곳. 그곳이 바로 지금의 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