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이 자리의 충만함을 믿는 마음, 내일로 기꺼이 향하기 위한 내면의 근육, 삶을 지탱하는 힘.
사랑을 말하는 예술 작품 속 언어들을 모았다. 우리의 세계가 각양각색 사랑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바라며.

유수연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문학동네

“내 마음은 재배중
같은 슬픔만 계속 키워내는 중

단숨에 타오르고 싶나
작은 군불을 기다리나

반짝이면 다 사랑인 줄 알았다”

유수연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

사랑은 슬픔을 동반하는 일이란 생각을 자주 한다. 모든 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하고, 영원할 수 없기에 필연적인 상실감을 안길 테니 말이다. 사랑할 용기가 희미해질 때면 유수연의 두 번째 시집 <사랑하고 선량하게 잦아드네>를 펼치곤 한다. “산다는 게 슬픔을 갱신하는 일”(‘정중하게 외롭게’) 같다며 책을 연 시인은 사랑과 사람, 삶 속에 자리한 슬픔을 익숙하면서도 다정한 언어로 말하듯이 전한다. “사랑도 삶도 맛만 보며 살 순 없을까”(‘우리의 허무는 능금’), “사랑하지 않을 때까지 사랑해보면 / 사랑 못할 게 없으니까”(‘수석’), “해결하면 사라지는 것 / 사랑은 사라지지 않아요”(‘행복 1’).
지나간 기쁨을 떠올리고, 미련과 허무를 끌어안으며 사랑으로 인한 감정을 여러 결로 섬세하게 펼쳐놓은 유수연의 시구들은 관계의 흔적을, “흐름의 시작을 찾을 수 없는 유수와 같은 시절”(‘소양강 소로우’)을 돌아보게 했다. 그렇게 ‘사랑의 원류’를 좇는 화자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니 사랑의 불가피한 특성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사랑하며 마주하는 감정들은 삶의 시간만큼 쌓여간다는 것을, 그 다양한 감정을 온전히 느끼다 보면 내일을 기꺼이 맞이할 ‘내면의 근육’이 자란다는 사실을 페이지를 넘기면서 깨달았다. “우리를 키울 거름은 우리가 떨군 사랑”이라던 시인의 표현을 되새기며.

자비에 돌란 <로렌스 애니웨이>

(주)엣나인필름

“우리의 사랑은 안전하지 않았지만, 어리석은 건 아니었어. ”

자비에 돌란 <로렌스 애니웨이>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사랑의 사전적 의미를 곱씹다 문득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얼마나’ 아끼고, ‘어떻게’ 귀중히 여겨야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걸까? 이 질문의 실마리를 최근에 다시 본 <로렌스 애니웨이>에서 찾을 수 있었다. 1980~1990년대 몬트리올을 배경으로, 교사이자 소설을 쓰는 청년 ‘로렌스’와 그의 연인 ‘프레드’가 10여 년에 걸쳐 써나간 서사를 담은 영화.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믿음을 기반으로 단단해진 둘만의 세계는 “남은 일생을 여자로 살고 싶다”는 로렌스의 고백으로 커다란 균열을 맞이한다. 성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지금보다 훨씬 보수적이던 시기, ‘평범하지 않은’ 관계가 된 두 사람은 서로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감당하기 힘든 주변의 시선, 사그라지지 않는 내면의 고통과 순간적인 환희가 복잡하게 뒤엉킨 감정 속에서도 서로를 오롯이 포용하려 애쓰는 이들의 이야기는 사랑의 본질을 강렬하게 파고드는 것 같았다.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또 사랑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그 과정 자체가 사랑에 주어지는 온갖 잣대를 무력하게 만드는 듯했다. 자기만의 크기와 깊이를 지닌 마음이라면, 어떤 형태든 사랑이라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안전할’ 필요도, ‘어리석을’ 수도 없는 모든 사랑을 소중히 대하는 태도를 로렌스와 프레드에게서 배웠다.

강아솔 ‘모두가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려 걸어가네
내가 있을 곳으로
모두가 있는 곳으로”

강아솔 ‘모두가 있는 곳으로’

사랑을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아왔지만, 정작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하다 보면 선뜻 답을 낼 수 없었다. 내게 사랑이란 모호하고 막연한, 닿을 듯하면서도 저 멀리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랑을 모른 채 모두에게 애정을 쏟으려고 애쓰던 시절, 내 마음과 닮은 음악을 선물해준 강아솔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2018년 겨울, “그럼에도 계속 사랑하자”고 노래하던 그는 5년 여의 시간을 건너 완성한 네 번째 정규 앨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모두가 있는 곳으로>를 통해 사랑에 관한 사유를 한 편의 소설 같은 곡들로 펼쳐냈다. 앨범 제목처럼, 사랑을 잃고 아무도 없는 곳에 숨어들었다가 결국 모두가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사람의 이야기. 누구도 미워하지 않으려다 스스로를 외로이 버려두고(‘누구도 미워하지 않는’), 어둠 속에서 슬퍼하며(‘아무 말도 더 하지 않고’) 사랑하던 이를 세상에서 지워내려다(‘헤어지지 말아요’) 마침내 “사랑은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밖에 없는 것”(‘사랑은’)임을 깨달았다는 고백이 일곱 개의 트랙을 따라 이어진다.
담담하면서도 의연한 음색으로, 고독의 시간 속에서 “나를 혼 자로 두지 않고 모두를 떠올렸다”(‘모두가 있는 곳으로’)고 전하는 곡들을 찬찬히 들으면서 생각했다. 사랑은 불쑥 찾아오거나 한순간에 떠나는 게 아니라, 살아가는 내내 가까운 곳에 고요히 자리한다는 것을. 더 많이, 힘껏 사랑해도 괜찮겠다는 믿음이 앨범의 끝에 다다라서야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