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새해의 출발선에 선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이곳을 묻는다.

우리는 속도와 요약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손가락 끝으로 넘겨지는 수많은 해답 속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빠른 즉답이 아니라 오래 붙잡고 천천히 마주해야 할 질문일지도 모른다. 마리끌레르 피처팀은 새해를 열며 정보를 얻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드러나는 장치로서 ‘질문’에 주목했다. 인공지능(AI), 환경, 계층, 돌봄, 기술, 도시, 주거, 노동. 오늘의 삶을 규정하는 뜨거운 화두들을 하나의 리스트로 정리하고, 각 영역에 정통한 필자에게 단 하나의 질문만을 던졌다. 기술은 어디까지 인간의 결정을 대신할 수 있는가. 돌봄은 왜 여전히 사적인 희생으로 남아 있는가. 안정적 주거는 언제부터 권리가 아닌 운이 되었는가. 노동은 왜 존엄을 보장하지 못하는가. 특정 분야에 한정한 파편화된 문제가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얽힌 동시대의 구조를 드러내는 질문과 답을 엮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세계를 사유해온 필자 8인의 답변을 통해 우리의 사고가 확장되고, 보다 깊어지길 바란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하는지를 가늠하는 좌표로서 말이다. 질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초연결 사회,
나는 누구이고자 하는가?

김선희
강원대학교 철학과 교수

매끄러움은 편하지만, 편한 만큼 주체성은 퇴화한다. 주체성은 정신과 몸을 통한 움직임에서 탄생한다.
우리가 손가락만으로 클릭하고 스크롤하는 동안, 우리의 몸은 서서히 사라진다.
몸이 사라지면 감각도 희미해진다. 감각이 희미해지면 생각 또한 희미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손을 뻗어 알람을 끄고, 날씨를 확인하고, 메시지와 뉴스, 친구들의 SNS를 훑으며 우리는 매일 아침을 시작한다. 아직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지도 않았지만, 이미 수많은 정보와 타인의 감정과 감각이 우리에게 닿아 있다. 이것이 초연결 시대의 일상이다. 기술은 더 이상 우리의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기술은 친절하게도 축적된 방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우리의 생각과 취향, 행동을 세밀히 분석하며 우리를 재편할 수 있는 용의주도한 ‘데우스엑스마키나(Deus ex Machina)’, 즉 기계 신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 기중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인간의 난제를 단번에 해결하던 기계 신처럼, AI는 점점 우리의 일상 깊숙이 개입해 들어온다.

디지털 기계 신이 우리를 사로잡은 미덕은 무엇보다도 ‘매끄러움’이다. 클릭 한 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기다림은 없다. 실수도 없다. 이 세계에서 모든 과정은 실크처럼 매끄럽게 이어진다. 사용자의 욕구에 맞춰 최소한의 시간, 최소한의 노력, 최소한의 불편만이 허용된다. 지금 우리의 삶은 매끄럽다. 그리고 편안하다. 선택에 따르는 피로는 줄어들고, 사용은 습관화되고, 그 사이 우리의 결정권은 AI, 즉 기계 신에게 조금씩 양도된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삶의 주체가 아니라, 매끄럽게 흐르는 안락한 기계 세계의 객체로 편입된다. 매끄러움은 편하지만, 편한 만큼 주체성은 퇴화한다. 주체성은 정신과 몸을 통한 움직임에서 탄생한다. 우리가 손가락만으로 클릭하고 스크롤하는 동안, 우리의 몸은 서서히 사라진다. 몸이 사라지면 감각도 희미해진다. 감각이 희미해지면 생각 또한 희미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철학자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힘은 오직 저항 속에서야 비로소 자신을 느낀다”. 저항이 결핍된 익명의 매끄러움은 우리의 힘을 앗아간다.

그렇다면 매끄러움에 대한 욕망은 어디서 오는가. 그것은 역설적으로 삶의 피로에서 비롯되어 삶의 무기력으로 가속화된다. 피곤할수록 우리는 편안함을 원하고, 편안할수록 더 무기력해진다. 반대로 우리가 강하고 건강할수록 모험을 선호하고 불편을 감내할 힘을 갖게 된다. 피로와 과로에 장시간 시달려온 우리에게 AI가 제공하는 매끄러움은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매끄러움에 기대는 순간, 나의 주체성은 소멸하기 시작한다. 주체성은 매끄럽지 않다. 오히려 거칠고, 느리고, 불편하다. 주체성은 기다림과 망설임, 실패와 더딤, 나아가 저항이라는 불편 속에서 태어난다.

기계 신의 재편에 저항하는 나의 첫 질문은 이것이다. 매일 아침 기계 신이 보낸 알람이 울릴 때, 나는 조용히 묻는다.
“오늘, 나는 누구이고자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