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새해의 출발선에 선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이곳을 묻는다.

우리는 속도와 요약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손가락 끝으로 넘겨지는 수많은 해답 속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빠른 즉답이 아니라 오래 붙잡고 천천히 마주해야 할 질문일지도 모른다. 마리끌레르 피처팀은 새해를 열며 정보를 얻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드러나는 장치로서 ‘질문’에 주목했다. 인공지능(AI), 환경, 계층, 돌봄, 기술, 도시, 주거, 노동. 오늘의 삶을 규정하는 뜨거운 화두들을 하나의 리스트로 정리하고, 각 영역에 정통한 필자에게 단 하나의 질문만을 던졌다. 기술은 어디까지 인간의 결정을 대신할 수 있는가. 돌봄은 왜 여전히 사적인 희생으로 남아 있는가. 안정적 주거는 언제부터 권리가 아닌 운이 되었는가. 노동은 왜 존엄을 보장하지 못하는가. 특정 분야에 한정한 파편화된 문제가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얽힌 동시대의 구조를 드러내는 질문과 답을 엮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세계를 사유해온 필자 8인의 답변을 통해 우리의 사고가 확장되고, 보다 깊어지길 바란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하는지를 가늠하는 좌표로서 말이다. 질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돌봄 노동의 가치는
어떻게 회복되는가?
김유담
소설가, «돌보는 마음» «탬버린» <이완의 자세> 저자
나는 소설가다. 그리고 한 아이의 주양육자다. 돌봄과 작업을 병행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아이를 낳는 것도, 소설을 쓰는 것도 모두 나의 온전한 선택에서 비롯되었기에 매일 꾸역꾸역 주어진 일을 해내며 버티는 중이다.
“OO는 엄마가 집에 있어서 좋겠어. 우리 며느리도 이렇게 집에서 애 키우는 직업을 택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니던 시절, 오늘 치 주어진 작업을 해내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안고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에 만난 이웃 할머니의 말에 울컥 화가 치솟았다. 할머니의 손자는 내 아이와 같은 어린이집을 다녔고, 할머니는 직장에 다니는 며느리 대신 아이의 등·하원과 돌봄을 전적으로 맡고 있었다.
나는 대꾸 없이 그저 헛헛하게 웃었다. 소설가는 아이를 키우기 좋은 직업이 아니라고, 집에서도 늘 일하는 상태로 존재하는 사람이며 작업에 몰두하기 위해 긴 시간이 필요하다고, 어린아이를 곁에 두고 소설을 써야 하는 상황은 재난에 가깝다는 사실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소설가를 아이 키우기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아이 키우기 좋으려고 소설가가 된 건 더더욱 아니다. 글을 쓰는 게 좋았고, 세상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주변에 있는 일하는 여성 중 그 누구도 자기 일이 ‘아이를 키우기 좋은 직업’이 라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직업에 종사하는 것도, 아이를 키우는 것도 몸과 마음의 에너지를 한없이 쏟아부어야 하는 일이다. 이 둘 사이에는 어쩔 수 없이 상충하거나 맞설 수밖에 없는 시간이 존재한다. 문제는 선택의 기로에서 많은 양육자, 그중에서도 다수의 여성이 일을 포기한다는 사실이다. 자기 일을 포기하지 못하는 다른 양육자들은 돌봄을 아웃소싱하고, 때로는 일정 부분 ‘육아 공백’을 감수한다.
한국 사회의 많은 노동자, 직업인은 ‘자신을 갈아 넣어야’ 현재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는 구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육아와 돌봄은 돌발 상황의 연속이다. 아이가 아프다거나 양육자의 손길이 긴급하게 더 필요한 순간에 돌봄에 투입될 수 있는 나와 같은 프리랜서를 ‘아이를 키우기 좋은 직업’이라고 여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과연 그런가. 안정적인 소득과 일을 보장받지 못하지만 가정 내에서 돌봄이 필요할 때 가장 빠르게 동원될 수 있는 인력이 되고 싶어서 작가가 된 건 아닌데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아이 키우기 좋은 직업이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이 키우기 좋은 직업을 가진 엄마들이 아니다. 필요한 것은 몇몇 ‘좋은 직업’이 아니라, 아이를 키운다는 이유로 경력이 끊기지 않고, 소득이 흔들리지 않으며, 죄책감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사회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일을 지키면서도 아이를 돌볼 수 있는 노동 환경이 기본값이 되는 사회로 전환해야 한다.
근무시간의 유연성 확대와 육아휴직 및 돌봄 휴가의 실질적 보장이 대표적인 대안이 될 수 있을 터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해보자면, 근무시간의 유연성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기본값이 되어야 하고, 재택근무나 시차출퇴근제를 자유롭게 쓰더라도 성과에 따라 업무 능력을 평가받는 방식이 정착해야 할 것이다. 육아 때문에 자리를 비우는 양육자들이 ‘눈치’나 ‘배려’ 같은 비공식 합의에 의존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육아휴직과 돌봄 휴가 또한 제도로만 마련할 것이 아니라 실제 노동 현장에서 얼마나 활발하고, 자유롭게 이용될 수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육아휴직과 돌봄 휴가는 개인의 눈치나 조직 문화에 따라 소진되는 권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권리여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권리는 엄마인 여성에게만 보장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양육자에게도 똑같이 보장될 때 제대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돌봄이 개인의 희생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책임지는 일이 될 때, 우리 세대의 다음, 그다음을 기대할 수 있으리라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