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새해의 출발선에 선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이곳을 묻는다.

우리는 속도와 요약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손가락 끝으로 넘겨지는 수많은 해답 속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빠른 즉답이 아니라 오래 붙잡고 천천히 마주해야 할 질문일지도 모른다. 마리끌레르 피처팀은 새해를 열며 정보를 얻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드러나는 장치로서 ‘질문’에 주목했다. 인공지능(AI), 환경, 계층, 돌봄, 기술, 도시, 주거, 노동. 오늘의 삶을 규정하는 뜨거운 화두들을 하나의 리스트로 정리하고, 각 영역에 정통한 필자에게 단 하나의 질문만을 던졌다. 기술은 어디까지 인간의 결정을 대신할 수 있는가. 돌봄은 왜 여전히 사적인 희생으로 남아 있는가. 안정적 주거는 언제부터 권리가 아닌 운이 되었는가. 노동은 왜 존엄을 보장하지 못하는가. 특정 분야에 한정한 파편화된 문제가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얽힌 동시대의 구조를 드러내는 질문과 답을 엮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세계를 사유해온 필자 8인의 답변을 통해 우리의 사고가 확장되고, 보다 깊어지길 바란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하는지를 가늠하는 좌표로서 말이다. 질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무엇이 혐오의 말을
멈추게 할 수 있나?
김멜라
소설가, <멜라지는 마음> <환희의 책> <리듬 난바다> 저자
나와 다른 타인을 마주하는 자세와 연습은 느리고
꾸준한 교육에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문화의 다양성에서 나온다.
확 내뱉고 싶을 때 가만히 돌이켜보는 마음의 힘,
그 힘이 우리를 이어주고 지켜주길 바란다.
근래 나만큼 인터넷에 올라온 험한 말을 많이 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나는 <리듬 난 바다>라는 소설을 쓰면서 ‘욕을 먹을수록 돈을 버는 방송’을 설정했다. 자료 조사를 위해 인터넷 게시판과 실시간 방송 플랫폼을 오가며 온갖 조롱과 욕설을 수집했다. 그렇다고 현실의 욕을 그대로 쓸 순 없었다. 화장실 변기도 미술관에 갖다 놓으면 예술이 된다지만, 실제로 사용하던 변기는 아니었을 것이다. ‘생생한 가짜’로 보이기 위해 무수히 단어를 다듬고 맥락을 재배치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사람들의 거친 말을 두려워한다. 여성, 아이, 노인, 동물, 자신과 다른 세대나 계층을 혐오하는 말에 신체적 고통을 느낀다. 미량의 바이러스를 주입해 면역력을 키우듯 나는 그 욕설들을 직시했다. 그대로 보면 눈에 상처를 입을 것 같아 소설이란 허구의 필터를 끼우고서.
모두가 아무렇지도 않게 침을 뱉고 다니는 거리를 떠올려본다. 그저 흔한 일상이 되어 잘못인 줄도 모르는 지경 말이다. 만약 거리가 아닌 사람이라면? 살아 있는 누군가의 얼굴에 그런 짓을 한다면 어떤가. 혐오는 말로 뱉는 침이다. 삼키면 몸에 약이 되지만, 뱉어 버릇하면 지저분한 습관을 고치기 힘들다. 바이러스처럼 사람의 수치심을 숙주 삼아 퍼지고, 어쩌다 옮으면 내가 느낀 모욕을 다른 이에게 갚아주고픈 복수심이 싹튼다.
다행히 함부로 혐오를 뱉으면 안 된다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는 듯하다. 인종, 지역, 직업, 장애 등을 이유로 차별을 정당화하거나 조장하는 인터넷의 혐오 표현을 금지하는 법안이 국회에 상정되었다. 그러나 번번이 그랬듯 ‘성적 지향’이란 구절을 문제 삼은 특정 종교 집단의 반발로 철회되었다. 이 부분을 삭제하고 법안을 통과시키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여기엔 침 뱉지 마시고요. 저기 우리가 배제한 소수자 구역에 가서 뱉으세요.’ 그런데 과연 혐오는 그 구역 안에서만 그칠까.
프로이트의 말마따나 인간의 원초적 감정은 증오가 먼저이고, 사랑은 그것을 이겨낸 다음 얻는 잠시뿐인 승리일지 모른다. 우리는 누군가의 혐오를 완전히 없앨 수 없다. 게다가 언어와 삶이라는 게 살균되고 어여쁜 말로만 이뤄지지도 않는다. 속 시끄러울 때 중얼대는 상스러운 말은 마음의 짐을 덜어주기도 하니까. 나는 인터넷에 떠도는 거친 뉘앙스의 말에 때론 웃기도 했다. 욕 같은데 욕이 아닌, 정성을 조금 들여 에두른 기발한 표현에 새삼 말하는 능력을 지닌 종의 기쁨을 느꼈다.
혐오 발언을 제재하는 법은 비유하자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최저시급 같은 것이다. 그 밑으로 떨어져선 안 된다는 것이지, 거기로 하향 평준화되라는 뜻은 아니다. 나와 다른 타인을 마주하는 자세와 연습은 느리고 꾸준한 교육에서, 서로의 차이를 인정 하면서도 자유롭게 자신을 표현하는 문화의 다양성에서 나온다. 확 내뱉고 싶을 때 가만히 돌이켜보는 마음의 힘, 그 힘이 우리를 이어주고 지켜주길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