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새해의 출발선에 선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이곳을 묻는다.

우리는 속도와 요약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손가락 끝으로 넘겨지는 수많은 해답 속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빠른 즉답이 아니라 오래 붙잡고 천천히 마주해야 할 질문일지도 모른다. 마리끌레르 피처팀은 새해를 열며 정보를 얻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드러나는 장치로서 ‘질문’에 주목했다. 인공지능(AI), 환경, 계층, 돌봄, 기술, 도시, 주거, 노동. 오늘의 삶을 규정하는 뜨거운 화두들을 하나의 리스트로 정리하고, 각 영역에 정통한 필자에게 단 하나의 질문만을 던졌다. 기술은 어디까지 인간의 결정을 대신할 수 있는가. 돌봄은 왜 여전히 사적인 희생으로 남아 있는가. 안정적 주거는 언제부터 권리가 아닌 운이 되었는가. 노동은 왜 존엄을 보장하지 못하는가. 특정 분야에 한정한 파편화된 문제가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얽힌 동시대의 구조를 드러내는 질문과 답을 엮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세계를 사유해온 필자 8인의 답변을 통해 우리의 사고가 확장되고, 보다 깊어지길 바란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하는지를 가늠하는 좌표로서 말이다. 질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인간다움은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우숙영
디자이너 겸 미디어 아티스트, <어느날 미래가 도착했다> 저자

인간다움을 정의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것인가?’를 묻는 일일 수밖에 없다.
당신은 이 세계에서 어떤 존재로 살다 죽고 싶은가?
어떤 형태의 삶을 살고 싶은가?
당신의 인간다움이 궁금하다.

‘인간다움’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면 우연히 본 한 장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오른쪽에서는 침팬지가, 왼쪽에서는 인공지능(AI) 로봇이 가운데에 선 인간을 바라보고 있는 이미지다. 동물과 인간 사이에 비좁게 낀 존재. 오늘날 인간이 처한 존재론적 딜레마를 적절하게 표현한 장면이다.

생각해보면 인간은 오랜 시간 동안 이성을 기준 삼아 동물과 자신을 구분하며 인간다움을 정의해왔다. 하지만 최근 상황이 달라졌다. 인간보다 더 이성적이고 지적으로 뛰어나 보이는 AI라는 존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러자 우리는 사랑과 같은 감정, 그리고 생물학적 존재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불완전함을 인간다움의 근거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감정과 신체에서 비롯된 불완전함은 동물들도 지닌 특징이다. AI와 거리를 두자, 오히려 동물과 가까워졌다. 애매해졌다.

하지만 나는 이 ‘애매함’이 꽤 인간답다고 생각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음’에 가깝다. AI와 인간의 큰 차이 중 하나는 존재 이유에 있다. AI는 인간에 의해 목적과 존재 이유가 규정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정하고, 그 선택에 따라 삶을 살아간다.

‘인간다움’에 대한 정의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믿었던 많은 일을 AI가 대체하면서 인간다움의 정의가 흔들리고 있다고 말하지만, 현실에서 인간다움은 기능이나 능력으로 통용되지 않는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코딩하는 일은 오랜 시간 인간의 영역이었지만, 우리는 글을 잘 쓰고 그림을 잘 그리고 코딩을 잘하는 사람을 ‘인간답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우리가 인간답다고 말하는 장면은 자신이 좋아하는 간식을 반으로 쪼개 친구에게 나누어 주는 어린아이의 손이고, 힘들어하는 친구를 생각하며 밤새 뒤척이는 모습이다. 내가 아닌 존재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며,그의 삶을 존중하는 마음과 태도다. 내재되어 있는 기능이나 속성이 아니라 존재 방식인 셈이다.

그렇기에 인간다움을 정의하는 일은 필연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것인가?’를 묻는 일일 수밖에 없다. 당신은 이 세계에서 어떤 존재로 살다 죽고 싶은가? 어떤 형태의 삶을 살고 싶은가? 당신의 인간다움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