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새해의 출발선에 선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선 이곳을 묻는다.

우리는 속도와 요약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손가락 끝으로 넘겨지는 수많은 해답 속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빠른 즉답이 아니라 오래 붙잡고 천천히 마주해야 할 질문일지도 모른다. 마리끌레르 피처팀은 새해를 열며 정보를 얻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드러나는 장치로서 ‘질문’에 주목했다. 인공지능(AI), 환경, 계층, 돌봄, 기술, 도시, 주거, 노동. 오늘의 삶을 규정하는 뜨거운 화두들을 하나의 리스트로 정리하고, 각 영역에 정통한 필자에게 단 하나의 질문만을 던졌다. 기술은 어디까지 인간의 결정을 대신할 수 있는가. 돌봄은 왜 여전히 사적인 희생으로 남아 있는가. 안정적 주거는 언제부터 권리가 아닌 운이 되었는가. 노동은 왜 존엄을 보장하지 못하는가. 특정 분야에 한정한 파편화된 문제가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얽힌 동시대의 구조를 드러내는 질문과 답을 엮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세계를 사유해온 필자 8인의 답변을 통해 우리의 사고가 확장되고, 보다 깊어지길 바란다. 우리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질문을 계속 던져야 하는지를 가늠하는 좌표로서 말이다. 질문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모두에게 이상적이고
무해한 창작물은
존재 가능한가?

천희란
소설가, «영의 기원» «우리에게 다시 사랑이» <작가의 말> 저자

필요한 것은 완전히 무해한 창작물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가를 감지하는 예민한 감각이다.
우리가 가장 무해하다 여기는 창작물에서조차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우리 윤리의 취약성을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규범이 아닌 동력으로서 윤리를 갱신할 수 있다.

먼저, 다음 질문들에 답해야 한다. 지금 모두가 합의한 무해함이 전 시간적, 전 존재적으로도 무해하다는 사실을 보증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이렇게 변형할 수 있다. 인류는 누구도 소외되지 않을 불변하는 이상을 상상할 수 있는가. 질문을 비틀어보자. 영속하는 이상성에 대한 믿음은 우리를 안전하게 하는가 혹은 규범화하는가. 끝내 우리는 무해한 것, 혹은 해로운 것의 보편적 관념에 대한 회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예술의 이상에 관한 질문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유의미한 답도 얻어낼 수 없으며, 사실상 이것은 예술에 관한 질문이 아니다. 어쩌면 답은 정해져 있다. 모두에게 이상적이고 완전히 무해한 창작물은 존재할 수 없다.

다시,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무해한 창작물은 정말로 무해한가. 이것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해야 하는 진짜 질문인지도 모른다. 안전하다고 느껴지는 창작물은 끔찍한 현실의 도피처가 될 수는 있지만, 대안 세계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오직 모방 대상인 현실을 실험하는 장소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실험은 현실 그 자체로는 교환되지 않을 안전한 모험이지만, 모험이기에 모험의 근원적 위험을 동반한다.

물론 이 모험이 현실을 대체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한정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의 규범과 질서를 파괴하는 미학적 모델은 반드시 내적 근거를 갖추어야 하며, 실상 미학적 자유란 계속해서 변화하는 윤리적 감각과의 긴장 속에서 생성된다. 예술은 세계를 모방한다는 측면에서 세계에 포함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모방 대상의 질서와 규범의 연속성 밖에 존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세계 바깥에 있다. 이 안과 밖이 교차하는 장소에서 현실과 창작물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과거의 정전 혹은 현재의 윤리적 감각을 반영하지 않은 창작물에서 불쾌감을 경험하고, 향유자의 비판적 관점은 창작자들이 새로운 미학적 윤리를 구성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나아가 이 과정에서 현실의 윤리와 보편이 새롭게 재편된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완전히 무해한 창작물이 아니라, 무엇이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가를 감지하는 예민한 감각이다. 우리가 가장 무해하다 여기는 창작물에서조차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우리 윤리의 취약성을 발견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규범이 아닌 동력으로서 윤리를 갱신할 수 있다.

모험하지 않는 모든 사유는 물화된다. 무해함은 모험하지 않으려 한다. 무해하게 창조된 세계는 종종 창조된 세계에서 현실의 잠재적 위험과 균열을 추방함으로써 가장 진보적이어야 할 주제조차 보수화하고 만다. 상상과 추상을 통해 세계를 재구축하는 능력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위험하면서 또한 가장 안전한 실험의 도구일 수 있다. 윤리는 입체적이며, 무해함과 해로움 역시 명확한 전선에서 서로를 겨눌 수 없다. 마지막 질문. 우리는 무해함을 충분히 정의할 수 있는가. 선명한 답을 얻기 위해 때로는 더 많은 질문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