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일을 향한 애정으로, 오늘에 최선을 다하는 열정으로.
음악가이자 미술가 김수철이 충실하게 살아온 순간들이 쌓아 올린 50년의 헤리티지.

김수철

첫 개인전 <김수철: 소리그림>이 2월 14일부터 3월 29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 미술관에서 열린다. 개막을 일주일여 앞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전시를 준비하고 있나?

일단 정신이 하나도 없다.(웃음)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전시 공간을 정하면 그 이후에는 순조롭게 준비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걸 정리하고 판단해야 하더라. 예상치 못한 복병이 많아서 지금은 흥분이나 보람을 느낄 상황이 아닌 듯하다.

오늘 이 작업실에 있는 작품들을 미술관으로 옮길 예정이라고 들었다. 시간이 꽤 소요되는 작업일 듯하다.

맞다. 전시 규모가 크다 보니 설치 등을 위한 예산도 많이 든다. 어휴, 아직도 할 일들이 꽤 남아 있다. 그래도 전시가 시작되었을 때 많은 분이 찾아와준다면 고마울 것 같다.

음악가로 널리 알려졌지만, 음악보다 미술을 먼저 시작했다고 들었다.

그림에 처음 흥미를 느낀 건 초등학생 무렵이었다. 그때부터 혼자 이것저것 끼적이다가 중학교 2학년 때 갑자기 음악에 미치는 바람에(웃음) 방향을 바꾼 거다. 대학 진학 이후 다시 조금씩 그림을 그렸고, 팬데믹 시기에 본격적으로 대작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림과 함께 해온 기간이 어느덧 30년이다.

평소 작업 주기는 어떤 편인가? 수십 년간 창작자로 사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아 궁금하다.

거의 매일 작업한다. 그게 내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다른 데 관심을 두는 편이 아니라 생활의 중심이 늘 작업에 있다. 작곡을 하나 끝내면 그림에 집중하는 식인데, 최근에는 그리는 데 시간을 더 많이 썼다.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미리 구상하지는 않는 편이다. 그저 캔버스를 마주한 순간의 느낌을 즉흥적으로 표현한다. 느낌이 있어야 비로소 붓을 움직일 수 있다.

김수철, ‘소리너머소리 2-3’
김수철, ‘소리탄생 30’

캔버스에 담긴 물감의 결, 붓질의 질감을 보니 자유롭게 작업했다는 게 느껴진다. 그동안 그린 작품 1천여 점 중 소리를 시각화한 1백여 점을 추려 <김수철: 소리그림>에서 선보인다고 들었다. 소리를 그림으로 옮기겠다는 발상은 어떻게 하게 됐나?

오랫동안 작곡을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게 들리는 것을 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리는 다양한 곳에서 온다. 나의 상태, 어떤 사람의 감정, 누군가와 나눈 대화를 비롯한 일상적인 소리부터 지구촌과 다른 행성의 소리까지 캔버스에 표현해왔다.

이번 전시는 사물, 인간, 행성, 명상 등의 소리를 그려낸 회화를 4개 섹션에 나눠 소개한다. 다양한 영역의 소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일상이 여유롭고 마음이 편안한 상태라 그렇다. 내면이 지쳐 있지 않으니 여러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요즘은 어떤 소리에 특히 주목하고 있나?

어딘가에서 전쟁의 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걸 느끼고 있다. 또 인간의 욕심으로 파괴된 자연의 이상기후에도 귀 기울이게 된다. 병든 지구의 소리를 자꾸 듣다 보니, 지구 바깥의 다른 행성도 다루게 된 거다. 지구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우주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굉장히 사소하게 느껴질 것 같더라. 그래서 “조그마한 지구에서 왜 그렇게 싸우느냐”는 외부 행성의 메시지를 떠올리며 그림을 그려나갔다.

세계 곳곳에서 크고 작은 충돌이 만연한 시대라는 생각이 든다.

동의한다. 세상이 너무 험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말로만 사랑하자고 하지, 실제로는 공조하며 공생하지 않는다. 우리의 소중한 인류애는 다 어디로 갔나 싶다.

이번 전시가 공존에 대해 사유하며 희망을 되찾는 기회가 된다면 좋겠다.

그러기를 바란다. 전시를 열기 전 미술계 전문가들에게 내 그림을 보여드렸을 때 “맑다”, “순수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관람객도 이번 전시를 통해 마음을 치유하고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음악에 대해서도 묻고 싶다. 1970년대 후반 밴드 멤버로 데뷔해 1980년대에 솔로 가수로서 큰 사랑을 받았고, 이후 국악과 영화음악 등으로 반경을 넓히며 꾸준히 활동했다. 지난 1월 중순에는 새 앨범 <불림소리 Ⅲ>도 발매했다.

어, 어떻게 알았나? 조용히 냈는데.(웃음) 첫 불림소리를 1989년, 두 번째 불림소리를 1997년에 공개했으니 29년 만이다. ‘인류를 위한 음악’을 만들자는 생각으로 수년간 작곡하고 녹음한 곡들을 담은 앨범이다.

앨범 소개에 “늘 사람들 곁에 건강한 소리가 머물기를 원한다”는 말을 남겼다. ‘건강한 소리’란 어떤 소리라고 생각하나?

사회를 건강하게 만드는 소리. 사람들이 서로를 안아주고 끌어주는 사회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 내가 문화 예술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감동을 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불림소리 Ⅲ>가 대중적인 음악은 아니다. 하지만 1백만 명 중 3명만이라도 좋아해준다면 그것으로 됐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창작자라면 대중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싶다. 대중성을 중시하지 않는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대중성은 온전히 파악할 수 없고, 그것만을 겨냥하는 예술가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나는 대중성의 유무, 히트 여부를 작업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그저 내가 하고 싶은 표현을 할 뿐이고 그 이후는 대중의 몫이다. 어쩌다 반겨주면 기분이 좋고, 그렇지 않을 땐 ‘망했구나’ 하면서 다음 작업으로 넘어간다. 결과에 연연하는 사람은 나아갈 수 없으며 실패는 나아가기 위한 교훈만을 남긴다고 생각한다. 그게 내가 꾸준히 국악 앨범을 낼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약 40장의 앨범 중 12장만 가요 앨범이고, 나머지는 전부 국악 앨범으로 알고 있다. 비인기 장르인데도 뚝심 있게 해나갈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이었나?

좋아하면 된다. 나는 한 번 좋아하면 마음이 쉽게 변하지 않고, 그 마음을 돌려받지 못해도 계속 좋아하는 편이다. 미련한 거지.(웃음) 한데 그토록 좋아하는 일을 하면 어떤 반응이나 평가에도 덜 속상하고, 푸념도 후회도 하게 되지 않더라. 적어도 내가 선택한 일이니, 스스로 책임지고 감수하게 되는 거다. 그래서 무언가를 계속 저지를 수 있는 듯하다.

그런데 진정으로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게 참 쉽지 않다.

사회구조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워낙 긴박하게 돌아가니, 하고 싶은 게 뭔지 고민할 겨를이 없는 거다. 하지만 여기저기 좌충우돌해봐야 본인에게 맞는 일을 비로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길로 초지일관 가다 보면, 계속 갈지 말지 확신도 설 것이다.

본인의 경험으로 증명했기에 할 수 있는 조언인 듯하다. 그렇게 지금까지 올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 같나?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늘 부족하다고 느끼기 마련인데, 그 무지를 채우기 위해 부지런히 공부했다. 공부만 하기에도 아주 바쁘다. 이제는 육체 연령이 있다 보니 책을 2시간만 읽어도 눈이 아프다.(웃음) 그래도 밖으로 자주 나돌아다니는 편이 아니어서 잘 쉬고 있다.

홀로 치열하게 공부하며 외로움을 느낀 적은 없나?

외롭다. 후배들이 아직도 내게 음악 작업 의뢰가 들어오는 걸 부러워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말해준다. 네가 다른 것들을 신경 쓸 때 나는 계속 공부했다고.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작업 역시 본인이 한 만큼 나오 는 것 같더라.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작업을 가장 우선시했고, 물질적 욕심을 부릴 법한 상황이 오더라도 그게 내 일이 맞는지 먼저 생각했다. 그렇기에 지금 내가 여기에 앉아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진심으로 작업한 결과물의 가치를, 누군가는 분명히 알아봐줄 것이란 생각도 든다.

맞다. 그래서 감사한 마음으로 더 열심히 살고 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 3년 전 ‘100인조 동서양 오케스트라’ 공연의 작곡과 지휘를 맡았던 일이 떠오른다. 잘될 거란 기대가 전혀 없었지만 작업의 의미만을 생각하며 도전했는데, 금세 매진됐다.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한 회 공연은 저소득층 공무원들을 무료로 초대했다. 내 음악을 조용히 응원해주는 이들의 존재를 실감한 경험이었다.

대가로 불리면서도 젊은 세대와 소통을 이어가고 있다. 2024년 여름에 오른 ‘DMZ 피스트레인 뮤직 페스티벌’ 무대도 화제가 됐다.

어휴, 그때는… 무대를 보는 친구들이 신나게 뛰어놀길래 나도 같이 뛰었다. 힘들어서 죽는 줄 알았다.(웃음) 그래서 앙코르를 안 받았지, 하하하! 이 페스티벌을 계기로 내가 MZ세대에게 알려진 덕분에 한동안 젊은이들과 공연으로 교감하는 시간이 많았다.

젊은 세대와 교감할 때의 기분은 어떤가?

좋지! 20대 친구들을 보면 ‘아,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나는 지금 세월이 흘러 무엇을 하고 있나?’ 하면서 깨달음을 얻곤 한다. 조금 게을러지거나 나의 길에서 벗어나더라도 다시 방향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거다. 여물거나 물들지 않은, 어린아이의 첫 발걸음 같은 순수함이 새싹처럼 새록새록 자라나는 느낌을 참 좋아한다. 나도 그들처럼 꿈을 꾸고, 꿈을 먹고 사는 사람이다. 적극적으로 비현실적인 사람.(웃음) 그래서 오히려 현실적인 문제를 걱정하는 동년배보다 젊은이들과 잘 맞는다. 어린 친구들이랑 얘기할 때, 초반 5분만 지나면 나이의 경계가 사라지더라. “나도 너네랑 똑같다” 하면서 각자의 꿈 얘기를 실컷 하게 된다.

본인처럼 젊은이들도 꿈을 바라보며 나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

그렇다. 돌이켜보면 내게도 고생한 순간이 참 많았다. 잘된 일만 조명되고 회자되어서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지난 50년간 얼마나 많이 울었겠는가. 한데 우는 날이 많았어도, 슬픔은 덜했다. 내 꿈을 좇았기 때문에. 젊은 친구들도 어려움을 참고 ‘나의 것’을 끝까지 해나가기를 바란다. 그러면 언젠가 반드시 빛날 날이 올 거다. 이건 자신 있게 말해줄 수 있다.

“나는 현재진행형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어떤 마음으로 오늘에 충실하나?

오늘을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보장할 수 없는 세상이지 않나. 그러니 일단 지금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앞으로 생기는 일들은 그때 가서 보자는 주의다. 내 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고, 어제를 돌아보지 않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어제를 말하지 않기에는 그간 이룬 성취가 많은 것 같다.

음… 그런가? 생각나지 않는다. 내가 뭘 성취했지?

가수이자 작곡가, 국악인으로서 이뤄온 일들이 있지 않나. 그 성취를 기리는 한국대중음악상 공로상, 보관문화훈장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다 지나간 얘기잖아.(웃음) 이렇게 인터뷰할 때만 말하는 과거의 흔적이다. 대중에게 나를 가장 많이 알린 솔로 1집 수록곡 ‘못다핀 꽃 한 송이’, 우리나라를 위해 일하는 계기가 되어준 1988년 서울올림픽 음악, 국악을 알릴 기회를 준 영화 <서편제> OST, 어린아이들과 교감한 만화 <날아라 슈퍼보드> 주제곡. 이렇게 4개 정도는 보람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중 ‘김수철의 헤리티지’에 꼭 남았으면 하는 것을 하나만 꼽는다면 무엇인가? 대대손손 전해 내려오는 우리 소리를 국민과 전 세계에 들려주기 위해 노력한 것. 국악을 현대화하고, 국제 무대에 선보이면서 긍지를 가질 만한 우리 문화를 알리고자 한 것. 그건 맞다고 생각한다.

내년에 데뷔 50주년을 맞이한다고 들었다. 지금 그리는 목표가 있나?

없다.(웃음) 내게는 아무 계획서가 없다. 지금으로서는 화가로 데뷔하는 이번 개인전이 잘되기를 바라는 한 가지 마음뿐이다.

미래를 계획하진 않지만, 앞으로도 좋아하는 일에 열정을 다할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 한 것 같다.

맞다. 나답게, 최선을 다해 곡을 쓰고 그림을 그렸는가? 그게 앞으로의 유일한 관건이다.

김수철 개인전 <김수철: 소리그림>

2월 14일~3월 29일
예술의전당 한가람디자인미술관
(서울시 서초구 남부순환로 2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