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주년을 맞아 더욱 알찬 라인업으로 꾸린 올해의 마리끌레르 영화제에는
15편의 근사한 영화들이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고 있다. 세 명의 필자가 이 중 7편을 선정해
그 안에 담긴 아름다움을 꺼내 보여주었다. 영화제를 앞둔 설렘을 더하는 추천의 글과 함께.

WRITER
진명현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사랑의 탐구 The Nature of Love

감독 모니아 쇼크리
출연 마갈리 레핀 블롱도, 피에르-이브 카르디날, 모니아 쇼크리

“<사랑의 탐구>는 에로틱한 긴장감과
로맨틱한 서정 그리고 경쾌한 대사의
풍미를 두루 갖춘 흥미로운 작품이다.”

사랑이란 감정 또한 감정할 수 있을까? 온몸으로 사랑을 감각하는 절정의 순간에도 이성의 개입이 가능할까? 영화 <사랑의 탐구>는 이렇듯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들로 채워진 지적이고 감각적인 사랑 영화다. 자비에 돌란 감독의 <로렌스 애니웨이> <하트비트> 등의 작품에서 배우로 만날 수 있었던 모니아 쇼크리가 감독의 재능 또한 입증한 작품으로 2023년 제76회 칸 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초청작이자 2024년 세자르 영화제 외국어상 수상작이다.

영화는 경쾌하고 익살맞은 대화가 오가는 프랑스풍 식탁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재치 있는 말장난이 오가는 성인 남녀들의 수다는 영화 <타인의 취향>이 연상되는데 미소와 실소 사이를 오가는 이들의 대화 속에는 어쩐지 날카로운 가시가 박혀 있다. <사랑의 탐구>라는 제목처럼 지적인 대화의 핑퐁 게임이 이어지며 사랑의 속성에 대해 논하는 영화일 것만 같은 도입부다. 하지만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화의 분위기는 드라마틱하게 전환된다. 중년의 기혼 여성이 우연히 치명적인 성적 매력을 지닌 남성을 만나 세차게 흔들리는, <언페이스풀> 같은 불륜극으로 바뀌는 것이다. <사랑의 탐구>는 에로틱한 긴장감과 로맨틱한 서정 그리고 경쾌한 대사의 풍미를 두루 갖춘 흥미로운 작품이다.

철학 강사인 소피아(마갈리 레핀 블롱도)는 지적 매력을 갖춘 중년 여성이다. 결혼 10년 차인 남편 자비에(프랑시스-윌리엄 레움)와는 각방을 쓰는 사이지만 잠들기 전까지 방문을 열어두고 다정한 대화를 나누는 친밀한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어느 날 소피아는 수리를 위해 그들의 별장을 홀로 찾게 되고, 그곳에서 인테리어 업자 실뱅(피에르-이브 카르디날)을 만나게 된다. 자비에와 완전히 다른, 직선적이고 거친 강렬한 매력을 갖춘 실뱅에 게 겉잡을 수 없이 빠져든 소피아는 결국 자비에 대신 실뱅을 택한다. 잠깐의 바람이라고 자비에와 헤어지지 않는다고 말하던 소피아는 실뱅을 향한 단순한 열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새롭게 보게 된다. 이 지점이 <사랑의 탐구>를 통속적인 불륜극이나 전형적인 에로 드라마와 결을 달리하게 만드는 흥미로운 지점이 된다.

소피아는 실뱅과 맺는 솔직한 관계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 식사 자리에서 전위적 예술가 데미언 허스트를 대화의 소재로 삼는 유식하고 지적인 주변인들의 모습에서 지금까지 느끼지 못하던 자신이 속한 세계의 위선과 허세를 발견하게 되고, 심지어 남편인 자비에마저 ‘엄마, 아빠의 도움으로 아무 학위나 두 개 받은 사람’으로 치부하게 된다. 소피아는 그렇게 자신의 세계를 스스로 깨뜨려 만든 틈에 생긴 실뱅이라는 깊고 뜨거운 계곡 안으로 망설임 없이 빠져든다. 격정적인 육체적 관계로 돌진해 오면서도 시를 인용해 사랑을 고백하는 남자 실뱅에게 소피아는 속수무책으로 빠져든다. 그렇다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합치되는 것처럼 보이는 소피아와 실뱅의 사랑은 얼마나 견고하고 또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소피아는 실뱅을 만나 얻은 새로운 사랑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했을까.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새롭게 생기는 사랑에 관한 질문들로 소피아와 실뱅, 그리고 관객으로 하여금 이완과 긴장의 순간을 반복적으로 마주하게 한다.

<사랑의 탐구>는 철학 강사 소피아의 강의 장면을 통해 철학자들이 남긴 각기 다른 사랑의 아포리즘을 보여준다. 저명한 이들이 고심 끝에 남겼을 말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일 만큼 명문장이지만 이 말들을 한데 모아놓으면 모두가 충돌하는 아이러니가 되기도 한다. 자신의 생을 뜨거운 온도로 살아가는 한 여성, 소피아가 선택한 사랑의 행로에서 실뱅은 과연 종착지일까 아니면 자비에처럼 경유지일까. 이 영화의 엔딩은 관객에게 예측 가능한 반전일 수도, 가슴을 쓸어내릴 안도일 수도 있다. 결국 정답으로도, 오답으로도 채점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라는 문제일 테니 말이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I Wish I Had a Wife

감독 박흥식
출연 전도연, 설경구

“이 서툰 남녀를 연기하는
설경구와 전도연의 호흡은 다시
보아도 눈이 부시다.”

이 영화의 잊히기 어려운 제목을 들으면 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2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대한민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두 배우 설경구와 전도연, 영화 속 봉수와 원주의 뒷모습이 담긴 장면이다. 그 장면을 오랜만에 꺼내 찬찬히 다시 봤다. 어느 여름날 오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이제 막 연애 비슷한 것을 시작하는 단계에 있는 두 남녀가 비를 피해 녹음 아래로 뛰어든다. 봉수(설경구) 곁에 선 원주(전도연)가 내리는 비를 보면서 ‘’여우가 시집가나? 해가 있는데 비가 오네”라고 말하자 봉수는 “호랑이가 장가가네. 지나가는 비인가?”라고 말한다. 마치 처음 호흡을 맞춰보는 듀엣처럼. 두 사람은 각자 다른 곳을 보며 혼잣말을 하듯 그렇게 각자의 속내를 은연중에 내비친다. 그러더니 봉수가 눈앞에 흔들리는 잎이 달린 가지를 하나 툭 꺾어 잎을 한 장씩 뜯어가며 “이 여자다, 아니다, 이 여자다, 아니다”라고 약간은 비겁한 중얼거림 같은 말로 잎 점을 치고, 원주도 냉큼 가지를 하나 꺾어 “이 남자다, 이 사람이다, 이 남자다”라고 씩씩한 미래를 다짐한다. 누가 봐도 이 여자가 정답이다. 봉수는 원주의 속내와 진가를 알아차린 건지 원주가 쓰고 있는 안경을 달라고 하더니 뿌옇게 변한 안경을 안경닦이로 정성껏 닦아 다시 건넨다. 봉수가 “잘 보여요?”라고 묻자 원주는 환하게 웃으며 “잘 보여요, 아주 잘 보여요”라고 대답한다.

아직은 각자의 속내를 여름날 소나기처럼 시원하게 꺼내놓지 못하는 두 사람. 스스로의 감정이 못 미더운 남자는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이 사람도 혹시나 지나가는 사람은 아닐지 염려하며 주저한다. 얼마 전에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이별을 당한 경험이 남아 있는 탓이다. 열렬하진 않았지만 조금도 식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남자의 곁으로 다가온 여자는 시큰둥한 유머를 남기는 이 남자가 귀엽고 좋다. 알다시피 누군가가 누군가를 귀여워 하기 시작하면 게임, 끝난 거다. 그리고 이 서툰 남녀를 연기하는 설경구와 전도연의 호흡은 다시 보아도 눈이 부시다. 대개 뭉툭해 보이지만 어쩐지 부드러운 양감으로 뭉쳐진 듯한 봉수의 미더움과 말갛게 개인 날의 아침처럼, 남아 있는 감정의 습기에 선명하게 비치는 원주의 해사함. 두 배우는 악기를 조율하듯 봉수와 원주를 섬세하게 표현한다.

박흥식 감독의 데뷔작인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엄밀히 말하면 일반적인 로맨틱 코미디 장르와 거리가 먼 작품이다. 로맨스와 코미디의 함량이 이 장르를 애호하는 관객의 기대치보다 적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기분 좋은 잔향처럼 스쳐가는 순간들이 이 영화의 로맨스가 머금은 기분 좋은 당도를 충분히 납득시키지만, 얼음이 가득 담긴 달콤한 탄산의 맛은 확실히 아니다. 비유하자면 액상 시럽을 넣지 않고 꽤 긴 시간을 우려서 건네는 아이스티의 맛이랄까.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하나의 로맨스를 위해 둘의 일상을 서두르지 않는 영화다. 영화는 보습 학원 강사인 원주와 은행원인 봉수의 하루를 사뿐사뿐 따라간다. 영화에 담긴 20년 전 과천의 풍경에는 지하철에서 신문을 읽는 이들이 있고, 분식집에 모여 앉아 썰렁한 유머에도 깔깔대며 시간을 보내는 ‘인강’ 탄생 전의 학생들과 선생님이 있다. 누군가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 만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영화는 특별한 충격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대신 평범하다고 통칭하는 타인의 고유성을 정성껏 바라보는 것을 택한다. 흘러가는 하루하루를 살뜰하게 챙기는 영화의 태도는 관객에게 봉수의 외로움과 원주의 그리움에 스며들게 한다. <8월의 크리스마스>와 <미술관 옆 동물원> 사이에 있는 듯한 이 영화의 따스한 경쾌함에는 조성우 음악감독의 기분 좋게 만드는 재즈 넘버들도 큰 몫을 한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가 개봉한 2001년은 대한민국 멜로영화, 로맨스영화에 기념비적인 해다. <봄날은 간다>와 <엽기적인 그녀>가, <번지점프를 하다>와 <파이란>이라는 걸출한 작품이 한 해에 개봉했다. 그리고 이 놀라운 작품들 중에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가 지닌 고유한 싱그러움이 돋보인다. 두 배우의 오랜 팬들에게도 언젠가 받은 손편지 같은 소중한 작품일 테지만 이 영화를 처음 보게 될 관객들에게는 러키 드로 당첨 같은 즐거움을 안길 사랑스러운 꾸러미다.

만추 Late Autumn

감독 김태용
출연 탕웨이, 현빈

“<만추>는 ‘격정’이라는 감정이 인간에게서 어떻게
태어나고 자라는지를 아주 천천히 들여다보는 영화다.”

‘쓸쓸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1 외롭고 적적하다, 2 날씨가 으스스하고 음산하다’이다. 형용사지만 어쩐지 동사 같기도 한 이 단어를 고스란히 영화로 옮겨놓은 작품이 있다. 영화 <만추>를 본 이들이라면 이 영화가 스크린에 번진 채로 새긴 듯한 외로움과 적적함이라는 감정에, 으스스하고 음산한 날씨라는 스산한 감각에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제목 그대로 늦가을이, 계절의 정서가, 그 정서를 간직한 두 남녀가 온전히 포개지는 영화가 <만추>다.

김태용 감독의 영화 <만추>는 낯선 공간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녀가 아마도 평생을 간직하게 될 3일이라는 짧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애틋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7년 째 수감 중인 죄수 애나(탕웨이)는 어머니의 부고로 3일 간의 휴가를 허락받는다. 장례식장에 가기 위해 시애틀 행 버스에 탄 애나는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 다급하게 버스에 올라탄 남자 훈(현빈)에게 차비를 빌려주게 된다. 장기수인 애나는 돌아갈 곳과 시간이 정해진 채로, 사랑을 필요로 하는 여자들에게 자신의 몸과 시간을 제공하는 남자 훈과 3일의 시간을 함께하게 된다.

<만추>는 ‘격정’이라는 감정이 인간에게서 어떻게 태어나고 자라는지를 아주 천천히 들여다보는 영화다. 기구한 사연을 가진 여자와 불안하기 그지없는 남자가 우연히 만난다. 둘은 처지도, 국적도, 서로에게 원하는 것도 다른 상태로 비와 안개가 가득한 늦가을의 도시를 서성인다. 비와 안개가 아니더라도 채도가 낮은 이 시공간에서 둘의 모든 것은 선명해지기 어려운 상태다. 애나와 훈은 서로에게 의심과 동시에 호기심을 갖는데, 이 감정들은 함께 피어나다 만개한 채로 다른 감정으로 변모한다. 어느덧 둘 사이에는 연민과 공감이 바람처럼 떠돌다가 낙엽이 되어 서로의 어딘가에 내려앉기도 하고 때로는 시야 밖으로 멀어졌다 다시 날아오르기도 한다. 마침내 말하기 어려운 비밀을 서로에게 털어놓는 순간에는 말로는 다할 수 없던 타인의 마음들이 천천히 열린다. 그렇게 서로의 열린 문으로 들어가는 예상치 못한 입장. 굳어지게 내버려둔 벽에 사랑이라는 감정의 금을 허락하는 균열. 영화는 그 마법 같은 순간들을 고요하게 응시한다. 김우형 촬영 감독과 조성우 음악감독 그리고 조상경 미술감독 등 국내 영화 신을 대표하는 스태프들은 근사한 하모니로 이 풍경화의 구석구석을 살뜰하게 채운다.

또한 <만추>는 오랜만에 컴백한 김태용 감독 특유의 섬세한 아름다움으로도 가득한 영화다. 단편 <달리는 차은>, 장편 <가족의 탄생> 등을 통해 마음을 줄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캐릭터와 유려하고 힘 있는 연출을 보여준 그는 <만추>를 통해 마술적 리얼리즘과 러브 스토리를 교차하는 매혹적인 연출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무엇보다 <만추>는 배우 탕웨이의 영화다. 초반부와 후반부에 완전히 다른 눈빛으로 관객을 사로잡는 현빈의 매력도 놀랍지만 한 배우가 영화 전편의 무드를 장악하는 탕웨이의 존재감은 가히 압도적이다. 낮지만 깊은 울림을 주는 단단한 목소리, 작은 동작 하나에도 캐릭터의 서사가 드러나는 우아한 몸짓 그리고 대사와 몸짓으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미세한 감정들을 응축한 깊고 아득한 눈동자까지. <만추>는 배우 탕웨이가 고전적인 러브 스토리를 가장 세련된 방법으로 연기할 수 있는 훌륭한 테크니션이자 아티스트임을 입증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