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영화라는 게 꽤 가치 있는 일이지 않나 싶다. 적어도 나에겐.” 놓지 않았기에, 계속했기에 김상만 감독은 나의 영화를 만날 수 있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그의 영화 <전,란>을 만나야 하는 이유다.
‘입체적인 인물들이 전란의 시대를 지나며 빛나게 된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전,란>의 프로그램 노트에 적힌 이 문장은 영화를 만든 김상만 감독의 영화 여정을 설명하는 말로 쓰여도 무방하다. 호기롭게 나의 영화를 만들겠다고 뛰어든 이후 그는 치열하게 부딪히고, 무너지고, 그럼에도 계속하며 자신의 영화를 꿈꿔왔다. 계속하는 것에는 어떤 힘이 있다고 믿으며. 그 시간을 지나 나의 영화 <전,란>을 만난 그의 눈은 마치 이제 막 시작한 이처럼 반짝였다. 그가 말하는 영화 하는 일의 즐거움, 가치에 대해.
<전,란>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되었다.
소식을 듣고 설렘보다 다행이라는 생각이 앞섰다. 언제나 영화 한 편을 완성하고 나면 따르는 불안이 있다. 내 영화가 잘 만들어졌나 계속 돌아보게 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영광스러운 자리에 초대되었다는 사실이 나의 불안을 조금은 덜어준 것 같다.
각본과 제작에 박찬욱 감독이 참여했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감독과 미술 감독으로 만났던 두 사람이 20년을 훌쩍 넘어 새로운 작품에서 감독과 각본가로 만나게 되었다는 점에서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영화 <해피 엔드> 미술감독으로 촬영을 마칠 때쯤 명필름에서 감독을 해볼 생각이 있냐는 제안을 받았다. 지금이라면 고민을 좀 했을 것 같은데, 그땐 겁 없이 하겠다고 했다. 다만 현장 경험이 부족하니까 한 작품만 더 미술감독을 하면서 배워보자 했는데, 그 영화가 <공동경비구역 JSA>였다. 그 덕분에 박찬욱 감독님에게 아주 많은 것을 배웠고, 그 때의 경험으로 내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감독님의 시나리오를 받게 되었을 때, 묘한 감정이 들었다. 운명론까진 아니지만 그때의 만남이 지금의 영화로 이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래서 더 잘 완성하고 싶었다.
신철 작가와 박찬욱 감독이 쓴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어떤 인상을 받았나?
세다, 강렬하다, 도전적이다. 처음 읽었을 땐 이런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읽었을 땐 무척 잘 짜인 이야기구나 싶었다. 영화의 테마를 각각의 캐릭터에 절묘하게 반영했다는 점에서도 흥미로웠다.
강렬한 기운을 지닌 이 이야기를 영화로 완성하는 과정에서 가장 고심한 부분은 무엇이었나?
‘대비가 선명한 그림을 만들고 싶다’가 일차적인 목표였다. 그래서 시퀀스를 구성하는 측면에서 상반된 두 가지 상황을 병치시키는 방식을 썼고, ‘천영’(강동원)과 ‘종려’(박정민)의 다른 관점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고자 했다. 그렇지만 그 대비가 단순하게 선과 악, 흑과 백으로 나뉘어 보이지 않아야 했다. 역시 이 영화는 캐릭터들의 부딪침이 제일 중요했고, 그래서 각 인물의 입장을 섬세하게 매만지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이어 이를 잘 표현해줄 배우를 만나는 것도 관건이었는데, (그 부분에서도) 내가 너무 큰 복을 받은 것 같다.(웃음)
그러잖아도 캐스팅에 관해 물으려던 참이었다.(웃음) 주인공 강동원과 박정민부터 차승원, 김신록, 진선규, 정성일 등 배우 라인업이 무척 화려하다. 각각의 캐릭터에 어떻게 이 배우들을 연결 짓게 된 건가?
우선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인물 천영은 목적이 선명하지만, 과도하게 진지하진 않길 바랐다. 더불어 검을 유려하게 다루는 기술적인 면도 필요했는데,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할 최선이자 유일한 답이 강동원 배우였다. 유일하게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한 지점이 천민이라는 신분인데(웃음), 배우가 앞장서서 외형을 흐트러뜨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분장 팀과 의논하는 과정에서 수염을 붙이는 게 좋을지, 머리가 과하게 산발은 아닌지 설왕설래가 있었는데 배우가 캐릭터를 위해서는 그러는 게 맞다며 적극적으로 임해줬고 그 점이 무척 고마웠다. 천영이 하나의 결로 이어지는 인물이라면, 그와 부딪치는 종려는 굴곡이 많은 인물로 다양한 감정을 보여주는 게 중요했는데, 그래서 박정민 배우가 합류하기로 결정되었을 때 안심이 되었다. 종려를 완성하는 데 박정민 배우의 연기력에 많이 의지했다. 그 외에 차승원, 김신록, 진선규, 정성일 배우도 각각의 캐릭터를 생각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올린 배우였는데 함께하게 된 게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다. 지금에 와서야 그 좋은 배우들을 모아놓고 결과물이 아쉽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걱정이 되지만, 촬영하는 동안은 내내 행복하기만 했다.
이 배우들이 모인 현장에서 어떻게 디렉팅을 할 것인지가 하나의 과제였을 것 같다.
나는 배우들에게 뭘 많이 건네는 스타일은 아니다. 해석의 여지를 많이 두고, 같이 이야기를 하면서 만들어가는 편이라 디렉팅 과정이 그다지 험난하진 않았다. 오히려 워낙 경험이 많은 배우들이다 보니 내가 생각하지 못한 인물의 결을 찾아내줄 때의 희열이 컸다. 배우들이 다들 열정이 넘쳐서 내가 오케이를 해도 한 번 더 가자고 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케이 소리가 경쾌하지 않다면서, 하하. 그래서인지 <전,란> 현장은 몸이 힘든 줄도 몰랐다. 매일 쉼 없는 작업의 연속이었음에도 가뿐한 마음으로 현장에 나갔다. 현장은 오히려 즐거움에 가까웠고, 본격적인 고뇌는 편집 과정에서 마주했다.(웃음)
편집 과정에서 맞닥뜨린 고난은 무엇이었나?
촬영하면서 구상한 핵심적인 이미지가 있는데, 그게 편집 과정에서 허물어지는 경우가 있다. 이야기의 흐름을 위해 이 그림에 대한 원칙을 포기해야 하나, 아니면 최초에 생각한 이미지를 관철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결국 처음의 의도를 놓치지 말자는 방향을 택했고, 이를 지켜내느라 숱한 고민의 밤을 보냈다.
영화 제목이 ‘전란’이 아닌 ‘전,란’이다. 쉼표의 역할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전란’이라는 한 단어로 쓰면 전쟁에 초점이 맞춰지는데 중간에 쉼표를 넣으면 전쟁과 난, 전쟁 그 이후의 난, 이런 설명이 가능해진다. 이 영화는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하지만 전쟁 자체를 그린 영화는 아니기 때문에 그 쉼표가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전쟁으로 시스템의 기반이 허물어지면서 일어나는 민란, 반란. 그 안에서 각 인물들이 충돌하는 이야기라는 게 쉼표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되지 않았나 싶다.
즐거운 촬영과 고난의 편집, 그 외의 숱한 밤을 지나 영화가 완성되었고 이제 관객을 만날 일만 남았다.
아까 개막작으로 선정되며 불안을 조금 덜었다고 말했는데, 그럼에도 불안하다.(웃음)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의도가 온전히 잘 전달될까, 무엇을 더했어야 하나 싶다. 무엇도 장담할 수 없는 시기라 그런 것 같다.
그 와중에도 확신하는 어떤 것이 있다면?
배우들의 연기. 다른 건 몰라도 배우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좋은 이야기를 들을 거라 확신한다.
치열하게 나의 영화를 만들다 보면 소진되기도, 반대로 축적되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이 영화를 통해 떠나보낸 것과 얻은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보낸 것은 모발과 건강… 분명히 좋아서 하는 일인데 하면 할수록 머리숱이 줄어든다, 하하. 그리고 얻은 것이라면 다음 영화를 위한 동력이지 않나 싶다. 사극이라는 장르도, 이런 유의 이야기도 처음 다뤄봤는데, 하고 나니 또 다른 도전을 해볼 수도 있겠다 싶다. 그리고 너무 좋은 배우들과 즐겁게 작업하는 경험도 귀중하다. 뭐, 이 정도면 건강과 맞바꿀 만하지 않나 싶다, 하하. 그만한 가치가 있는 시간이었다.
전작 <더 테너 리리코 스핀토> 이후 무려 10년 만의 영화다.
그사이에 여러 가지 일이 있었다. 시나리오는 끊임없이 계속 쓰긴 했는데, 아무튼 쉽지 않은 여정이었다. 그래도 끝내 영화를 놓지 않았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놓지 않고 영화를 계속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발현되었던 건가?
무모하게 감독 해보겠다고 했을 때 정지우 감독님이 해준 얘기가 있다. <해피 엔드> 촬영 막바지였는데 대기 시간에 나를 불러 감독 제안받은 거 얘기 들었다, 참 잘됐다고 생각한다면서 본인 얘기를 해주셨다. 영화 처음 할 때 자기보다 재능 많은 친구들이 있었는데, 결국 지금까지 현장에 있는 건 자기 하나라고, 오래 버티는 놈이 이기는 것 같다, 힘든 일이 진짜 많을 텐데 버티라고 말 해주셨는데 영화 하는 내내 힘들 때마다 그 말을 떠올렸다. 어휴, 그렇게 버텨서 이런 기회가 온 건가 싶다. 인생이 예기치 못한 일의 연속인데 그래도 계속 버티고 서 있다 보면 뭐라도 만나게 되는 것 같다.
다음엔 어떤 이야기를 만나게 될 거라 생각하나?
감독 하겠다고 맨 처음에 준비한 게 SF였다. 당시에는 좀 이르다는 평을 받고 결국 못 했지만. 늘 누가 뭐 하고 싶으냐고 물으면 스릴러나 호러, SF 얘기를 했고, 그래서 첫 영화도 범죄 스릴러로 시작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사회를 이루는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싶다. 일상을 살면서도 계속 질문하게 되는 부분이고, 어떤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어떤 장르를 차용하더라도 가능한 이야기이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다음 영화는 머지않아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때는 2년에 세 편씩 찍어야지 했는데, 그땐 꽤 호기로웠던 것 같다.(웃음)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계속하다 보면 또 때가 오겠지 싶다. 다만 또 10년은 아니길 바란다, 하하. 어쨌든 늘 그래 왔듯이 나의 작업을 꾸준히 하는 게 바람이자 목표다.
영화 <전,란>의 공개일에 어디서 누구와 감상을 할 예정인가?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니 보는 장소와 시점이 자유롭지 않나.
평소에는 혼자 노트북으로 보는 편인데, 이번 영화는 집에서 가족들과 같이 보고 싶다. <전,란>은 좀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당당하게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 이 영화를 통해 얻은 또 하나가 아닐까 싶다.
맞다. 그러니까 영화라는 게 꽤 가치 있는 일이지 않나 싶다. 적어도 나에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