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영화의 성장과 지원에 헌신해온 고(故) 김지석 프로그래머의 뜻을 기억하기 위한 ‘지석’ 섹션은 올해도 어김없이 아시아 영화의 지금을 조명한다. 대만, 인도, 일본, 키르기스스탄, 필리핀, 그리고 한국까지. 아시아 중견 감독들이 창조한 영화 세계와 그 안팎의 아름다움에 대해 묻고 들었다.

<빌리지 락스타2> Village Rockstars 2, 인도

DIRECTOR 리마 다스 Rima DAS

PROGRAM NOTE       

리마 다스의 신작 <빌리지 락스타 2>는 전작 <빌리지 락스타>(2017)로부터 7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 두누의 삶을 다시 조명한다. 아삼 지역 작은 농촌 마을에 사는 두누는 고된 노동으로 점차 쇠약해져가는 엄마, 모터사이클이 갖고 싶어 날마다 엄마를 조르는 철부지 오빠와 함께 살고 있다. 이제 10대 후반이 되었지만 두누는 여전히 나무를 타고, 수영을 하고, 무엇보다 밴드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하면서 어린 시절의 삶을 지속하기 원한다. 그러나 삶은 두누의 바람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삶의 신산함을 겪으며 두누는 행복했던 유년 시절을 떠나보내야 하는, 삶의 어떤 경계에 서게 된다. <빌리지 락스타 2>는 리얼리즘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카메라를 통해 두누를 천천히 따라가며 애정 어린 시선으로 그의 선택과 성장을 응원한다. 여전히 새롭고 여전히 단단한 방식으로. WRITER 박선영(프로그래머)

<빌리지 락스타>의 후속작 <빌리지 락스타 2>로 돌아왔다.

가짜 기타를 치며 음악가를 꿈꾸던 두누가 어머니에게 진짜 기타 를 건네받던, <빌리지 락스타>의 마지막 장면이 늘 마음 깊이 남아 있다. 노을 질 무렵 들판에서 두누가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소리를 만들어내던 그 순간이 여전히 마법처럼 느껴진다. <빌리지 락스타>를 만든 이후 어느 날, 시간이 지난 뒤 두누가 어떤 삶을 살고 있을지 다시 영화에 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0년부터 <빌리지 락스타 2> 작업을 시작했고, 4년간의 제작 과정을 거쳐 영화를 완성했다.

이 영화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나?

<빌리지 락스타 2>는 출발선 앞에 선 이들을 위한 영화다. 꿈과 재능이 있지만, 여건이 미비하거나 환경이 따라주지 않는 젊은이가 많지 않나. 10대 후반이 된 두누가 여러 역경을 마주하면서도 자신의 꿈을 좇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다. 도전과 책임, 우정을 포함한 여러 관계, 그를 둘러싼 자연이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두누의 눈을 통해 바라보려 했다.

<빌리지 락스타>에서 함께한 배우들과 7년이 지난 뒤 다시 호흡을 맞춘 것도 새로운 경험이었을 듯하다.

나의 ‘빌리지 락스타 들’과 10년이 넘도록 교류했으니, 우린 꽤 특별한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웃음)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이 영화를 만드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시간에 따른 변화를 함께 받아들이며 꿈같은 순간을 여러 차례 마주했다.

당신의 영화가 어떤 특징을 지녔다고 생각하나?

각본, 촬영, 제작, 편집까지 모두 내 손을 거치니 결국 영화에 내가 느끼는 세상이 그대로 담긴다. 나는 삶, 자연, 사람을 좋아하며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아름다움을 찾는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고, 빛이 많아지면 그림자를 들여다본다. 삶이 빛과 어둠의 균형을 이루듯이, 내 영화도 그 순리를 따라 나아가고 있다.

당신이 영화 안에 머무르는 이유는 무엇인가?

<빌리지 락스타 2>는 나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다.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었지만, 지치거나 싫증난 적이 없다. 내 영화가 누군가에게 가닿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계속 나아가게 한다. 영화를 통해 새로운 우 주를 창조할 수 있다는 건 소중한 일이다. “나는 단지 또 다른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영화를 살아 있게 만들기 위한 투쟁을 하고 있다”는 아녜스 바르다의 말은 늘 깊은 울림을 준다.

<아이미타가이>, Aimitagai, 일본

DIRECTOR 구사노 쇼고 KUSANO Shogo

PROGRAM NOTE

인생의 어떤 갈림길은 찰나의 순간에 결정된다. 몇 초 사이로 생사가 갈리기도 하고, 모르는 사람의 어떤 행동이 내 삶의 현재를 바꾸기도 한다. <아이미타가이>는 그런 인연의 연쇄 작용에 주목하는 영화다. 아주사와 카나미는 여고 시절부터 단짝인 친구. 카나미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죽은 뒤에도 아주사는 카나미의 핸드폰으로 문자를 보내며 외로움을 달랜다. 카나미의 부모는 아주사의 정체를 궁금해 하고, 죽은 딸이 마음을 쏟았던 고아원을 방문하며 딸의 선행에 감동받는다. 죽은 사람은 다시 살아오지 않지만 그 흔적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고 작은 선행들이 모여 세상을 살아갈 만한 곳으로 만든다. <중쇄를 찍자>(2016), <오키쿠와 세계>(2023) 등에 출연한 쿠로키 하루가 주인공 아주사의 섬세한 감정을 잘 표현했고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2021)을 연출했던 구사노 쇼고의 정교한 화법이 매력적인 영화다. WRITER 남동철(수석 프로그래머)

<아이미타가이>로 부산을 찾는다. 기분이 어떤가?

솔직히 매우 기쁘다.(웃음)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에 이어 다시 한번 초청 받아 영광이다.

이 영화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나?

일상적인 행동, 쉽게 지나칠 법한 작은 사건이 예상치 못하게 다른 이에게 영향 을 미치거나, 그 결과가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것. 이런 사소한 것이 누군가에겐 삶의 의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하고 싶었다.

<아이미타가이>를 만들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

고 사사베 기요시 감독이 남긴 각본의 의도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내 생각을 담아 영화로 완성하는 것. 사사베 감독이 각본을 작성한 이후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에, 현시대에 맞게 표현을 수정하며 최종본을 완성하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배우에게서 진정성 있는 연기를 끌어내는 감독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어떤 점을 중요시하나?

배우가 연기할 때 불편하진 않 은지, 부자연스러운 부분은 없는지 자주 묻는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억지로 말하거나 행동하도록 시키는 게 내게는 다소 기이하게 느껴진다. 배우 개개인에게서 진정으로 우러나오는 것을 포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당신이 좋아하는 이야기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나?

인간의 감정이나 내면의 복잡성을 그려내는 작품을 좋아한다. 그리고 누군 가가 주목하지 않으면 잊힐 수 있는 것, 또는 모두가 기억하지만 언어화되지 않았던 것을 표현하는 작품에 매력을 느낀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영화에 대한 관심뿐만 아니라, 삶과 세상에 대해 집요하게 탐 구하는 힘. 동시에 영화제작 환경이 개선되어야 하고, 감독으로서 배우나 제작진과의 관계가 더 나아져야 한다. 대학 1학년 시절, 처음으로 영화를 만들었을 때 느낀 즐거움과 어려움을 여전히 기억한다. 그 마음이 작아지기보단 오히려 커지고 있기에 영화와 함께하고 있는 것 같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아이 엠 러브>, I Am Love, 한국

DIRECTOR 백승빈 BAEK Seungbin

PROGRAM NOTE

사랑(장선)은 자신이 일하는 약국에 매일 들르는 철수(이유준)를 진심으로 사랑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철수는 약사이자 사랑의 사촌 동생인 종희(한해인)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겼다. 엇갈리고, 가닿지 않는 마음과 시선. <아이 엠 러브>는 이 응답 없는 사랑, 지독한 짝사랑의 열병을 앓는 이의 절박하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 처연한 엘레지, 그럼에도, 포기를 모르고 더 많이 사랑하겠노라 다짐하는 사랑에 매혹된 자의 사랑 찬가다. 말로 자신을 드러내는데 한참 서툰 사랑은 그 대신 시인 W. H. 오든의 사랑 시(時)를 제 삶의 지표로 삼고, ‘러브’라는 이름의 여인이 사랑 때문에 벌였다는 비극적 사건에 빠져들고 몰두한다. 사랑에 압도된 사랑. 과연 이 사랑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 끝에 이르면, 사랑이 그토록 찾던 진공상태와도 같은 편안함에 이를 것인가. WRITER 정지혜(영화평론가)

감독의 언어로 <아이 엠 러브>를 소개한다면?

‘사랑이라는 감정은 질병이고, 사랑에 빠진 사람은 환자이며, 우리는 기꺼이 환자 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전하는 영화.

이 영화의 시작점은 사랑일 것이다. 사랑의 어떤 면이 당신을 매료시켰나?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누구보다 좋 아하는 사람으로서, 언젠가 어떤 식으로든 다루고 싶은 소재였다. 사람을 미치게 하는 여러 복잡한 감정 가운데 가장 강렬한 것이 사랑이지 않나. 그래서 영화를 통해 사랑을 최대한 낭만적으로 부검해보고 싶었다.

사랑에 대해 깊이 탐구했을 것 같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생각이 변하기도 했나?

오히려 기존의 입장이 더 강해졌다. 사랑은 무시 무시한 질병이 맞다. 걸리면 약도 없고. 그냥 부서지는 게 아닐까.(웃음)

사랑이라는 복잡한 감정을 영화 안에 담아내야 하니, 배우와 의견을 교류하는 과정에서도 고민이 많았을 듯하다.

적은 예산으로 신속하게 촬영해야 하는 환경인지라, 충분히 숙고하고 성찰하는 과정이 부족한 듯해 늘 아쉽다. 배우들과의 의견 교류도 거의 속도전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희생되는 것이 아쉬워 늘 캐스팅에 공을 들인다. 영화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나만큼이나 공감하고, 어쩌면 나보다 더 잘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거다.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손잡고 달려 나갈 준비가 된 사람, 그런 배우를 만나기 위해 애쓴다고 해야 할까.

이번 영화를 만들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무엇이었나?

각 회차의 촬영 분량을 모두 맞춰 크랭크업을 하루도 늦추지 않는 것. 그래서 촬영감독이 예정대로 자신의 첫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의 기쁨을, 본인이 원하는 장소에서 가족과 함께 누리게 하는 것.

영화제작 과정에서 발견한 사랑의 순간이 있다면?

누구도 안 볼 영화를 또 한 번, 최선을 다해 찍었음을 다행스러워하며 귀가하던 크랭크업 날의 순간.

영화를 만들며 끊임없이 되새기는 마음이 있다면 무엇인가?

영화를 만드는 건 기회고 선물이지만, 사치스러운 일이며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를 만든다고 뭐라도 되는 양 착각하지 말라”던 덴젤 워싱턴의 말을, 정확히는 그 맥락을, 매번 짐작하고 또 곱씹으며 영화를 만들고 있다.

<옌과 아이리, 모녀 이야기>, Yen and Ai-Lee, 대만

DIRECTOR 린슈위 Tom LIN Shu-Yu

PROGRAM NOTE

영화는 늦은 시간, 한적한 시골 마을 골목길에서 피투성이가 된 채 나타난 한 여성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화면이 전환되면 8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돌아온 옌이 엄마 아이리와 재회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면서 복권을 파는 아이리는 다소 직설적인 반면, 오랜 복역으로 평범한 일상이 낯선 옌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어느 날 옌의 나이 어린 이복동생이 찾아오면서 가까스로 균형을 이루던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이 폭발한다. 린슈위 감독은 흑백 화면을 통해 옌과 아이리의 이야기를 각각의 시점으로 차분하게 풀어가며, 이들이 서로를 보듬게 되는 순간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양귀매와 하우교는 엄마와 딸, 그 지긋지긋한 애증의 관계에 긴장감 넘치는 연기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WRITER 박선영(프로그래머)

<옌과 아이리, 모녀 이야기>가 부산국제영화제 지석 섹션에 초청되었다. 소감이 어떤가?

고 김지석 프로그래머는 대만 영화 의 든든한 지지자였고,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나의 영화를 지원해주었다. 그의 비전을 담은 섹션에 초청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 영화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었나?

<옌과 아이리, 모녀 이야기>는 가부장적 사회에서 과거의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모녀의 이야기다. 우리가 가장 많이 갈등을 빚는 사람이 자신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다.

<옌과 아이리, 모녀 이야기>를 만들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배우인 아내와 함께 작업할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하루는 ‘효자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라는 제목의 뉴스 기사를 접했는데, 그게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기사를 읽어보니 오랜 학대에 시 달려온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는 내용이었다. 아내가 오래도록 모녀 관계에 관심이 많았기에, ‘효녀가 아버지를 죽인다’는 이야기를 생각했다.

아내의 모녀 관계가 영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듯하다. 아내는 어머니와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어릴 때는 가족에게서 멀어지려 했고, 여러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몇 년 전 우리가 이사하게 되자 가족들을 우리 근처로 오게 하려고 새로운 집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이 두 사람 사이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고, 그 애증의 관계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서로 온전히 이해하지 못할 엄마와 딸의 관계, 거기서 비롯되는 복잡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중요했으리라 짐작한다. 이를 위해 신경 쓴 점은 무엇인가?

‘아이리’라는 또 다른 인물을 만드는 접근법을 선택했다. 옌과 똑같이 생긴 아이리가 연기 수업을 받으며 다른 사람이 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통해 복잡한 관계를 풀어나가려 했다.

배우들과 어떤 소통 과정을 거쳤나?

가장 중요한 건 배우들과 이야기하며 의견을 수용하고, 인물을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하며 그에게 변화를 허용하는 것이었다. 또 배우가 안정감을 느낄 만한 현실적 환경을 만드는 게 중요했다. 결국 배우들이 ‘연기’를 최 대한 적게 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당신의 영화를 통해 관객이 어떤 변화를 맞길 바라나?

<옌과 아이리, 모녀 이야기>를 본 뒤 타인에게 더 너그러워지기를 바란 다. 나는 혼돈의 세상에 희망을 주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의 말을 빌리자면 영화는 “공감을 생성하는 기계”다. 훌륭한 영화는 사람을 하나로 모으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수많은 이들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는데, 나는 그것을 영화로 시도하고 있다고 믿는다.

<뭐 그런 거지>, So it Goes, 한국

DIRECTOR 이하람 LEE Haram

PROGRAM NOTE

사랑하는 젊은 남녀가 차를 몰고 돌아다니며 살인을 저지른다. 시체, 총, 칼, 로프, 술병 등이 여기저기 어지러이 널려 있다. 들, 숲, 강, 바다, 도심에 이르기까지, 두 사람은 함께라면 어디든 간다. 기괴한 정조와 이미지의 난장인 데뷔작 <기행>(2022)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던 이하람의 세 번째 장편이다. 또 하나의 기행(奇行)이자 기행(紀行)이다. 잔혹하고 폭력적인 인간과 역사를 향한 유희적 일격, 지구 멸망의 기운이 짙은 디스토피아적 세계 앞 당돌한 복수, 비가시적 존재들의 낭만적 사랑, 죽음까지도 끌어안아 버리는 멜랑콜리의 정서가 한데 뒤섞여 이룬 기묘한 콜라주. 무엇과도 비교되지 않고, 어디로도 수렴되지 않는 기이한 혼종 세계. 여기에 서부극, 공포, 고어, SF, 로드무비, 로맨스의 흔적과 냄새마저 감지된다. 기꺼이 헤매고 싶은 도발적인 기행이다. WRITER 정지혜(영화평론가)

데뷔작 <기행>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이후 이번엔 지석 섹션에 초청받았다. 소감이 어떤가?

부산국제영화제에 처음 초청받았던 2022년에 지석 섹션이 신설되었다. 당시 이 상이 추구하는 바가 아름답게 느껴져 고 김지석 프로그래머에 대해 찾아봤다. 그리고 언젠가 좋은 영화를 만들어 지석 섹션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오겠노라 다짐했다. 그로부터 2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그 생각이 실현되어 기쁘다. 하지만 이곳에 함께 초청된 다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보니, 부담감과 함께 새로운 자극이 느껴진다.

<뭐 그런 거지>의 시작점은 무엇인가?

이 영화의 모든 것은 청춘에서 시작됐다. 내가 느끼기에 청춘은 미스터리하고 아름답고 폭력적이며 부조리하다. 앞을 보며 나아가지만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길을 잃고, 도중에 자신만의 끔찍하고도 아름다운 세상을 목격한다. 결국 영화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와 젊음이 지닌 부조리를 풍자하고 싶었다.

제목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나?

영화 <뭐 그런 거지>는 커트 보니것의 소설 <제5도살장>에서 많은 부분 영감을 받았다. 외 계인에게 납치당해 시간에서 해방된다는 설정이 매력적이었고, 전쟁을 극적으로 잔인하게 묘사하지 않고 블랙코미디로 구현 한 것이 재미있었다. 주인공은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을 죽이고 “뭐 그런 거지”라고 말한다. 그 말을 1백 번 넘게 하는데, 나는 이 표현이 부조리와 허무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것을 함축하고 있다고 느꼈다.

이 영화의 도전 과제는 무엇이었나?

배우들이 구현해야 할 부조리한 느낌의 연기였다. 사실 시나리오 자체를 이해하기 힘들 거라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인물들이 등장해 끔찍한 짓을 저지르는데, 그 이유도 알지 못하며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니 말이 다. 배우들이 이 내용을 이해하기보다 그저 느끼길 바랐다. 연기를 위한 연기를 하기보다 말투나 행동, 표정을 통해 그간 해오지 않은 것을 시도해달라고 요청했다.

앞으로 영화에 어떤 이야기를 담고 싶나?

구상해둔 이야기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종교와 영적 존재를 다루는, 숭고함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 안드레이 타르콥스키의 영화를 보고 일종의 편지를 받은 기분이 들어 나도 영화로 답장을 하고 싶다 고 생각했다. 세상을 구하는 세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당신이 생각하는 영화의 매력은 무엇인가?

매력적인 가짜는 온전한 실제보다 훨씬 강렬하게 사람을 끌어당긴다. 그게 내가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가 아닐까 한다. 삶과 존재로부터 해방되어 허구의 세상을 마주할 수 있게 해주는, 이토록 아름다운 영화라는 매체에서 나는 도저히 헤어나지 못할 것 같다.

<마더랜드>, Motherland, 필리핀

DIRECTOR 브리얀테 멘도사 Brillante MENDOZA

PROGRAM NOTE

<마더랜드>는 필리핀 북부 이푸가오족 출신 경찰 특수작전부대(SAF) 요원 다오아연의 생존기를 다루고 있다. 그는 고향에 임신한 아내와 나이 든 어머니를 두고 대통령에게 승인된 특수작전에 투입되기 위해 필리핀 최남단으로 소집된다. 목표는 테러리스트이자 폭탄 제조자인 마르완을 제거하는 것. 여러 가지 사정으로 여러 번 연기되거나 취소된 적 있는 위험한 작전이다. 동료들과 함께 낯선 땅에서 어둠을 뚫고 전개한 작전은 원활히 성공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귀환하는 과정에서 수백 명의 적군에 포위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2015년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마마사파노 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국가와 영웅의 실체에 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 WRITER 박성호(프로그래머)

필리핀의 마마사파노 사건(필리핀 경찰 특수부대와 이슬람 반군 간의 충돌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사건)이 이 영화의 시 작점이다. 이 사건의 어떤 점이 <마더랜드>를 만들게했나?

나라를 위해 헌신한 이들과 그들의 가족을 생각했다. 마마사파노 사건은 필리핀의 쓰라린 역사이며, 우리는 긴 애도의 시간을 보냈다. 타인의 야망 탓에 누군가가 희생되었음에도, 시간이 지나면 그 죽음이 하나의 숫자로만 기억되기도 하지 않나. 그 이면에 누군가의 생이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영화에서 ‘국가’와 ‘영웅’의 본질에 대해 어떤 질문을 던졌나?

우리는 때때로 어떤 집단이나 거기서 만들어진 규율을 미덕으로 여기고, 그걸 최우선의 가치라 생각한다. 그 안에 속한 개인이 꿈과 가족을 가진 한 사람임을 잊기도 한다. 그 생각 아래 희생된 이들을 ‘영웅’이라 입체감 없이 납작하게 부르는 게 과연 옳은 일인지, 그에 대한 의문을 던지고 싶었다.

이 영화의 도전 과제는 무엇이었나?

진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가 가장 어려운 문제였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인 만큼 더 세심하게 다가가려 했다. 사건에 대해 꼼꼼히 연구하고, 여러 관점을 두루 살폈다. 또한 사실을 기반으로 하되 따뜻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

영화를 만들며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나?

어떤 혐오나 증오는 세대를 거쳐 답습된 것이라는 사실. 어떤 환경에 처해있든 사람 대 사람으로 진솔하게 이야기를 나누면,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권력이 우리의 감정과 판단을 조종하는 것에서 벗어나서 말이다.

영화를 통해 사회문제를 드러내고 이를 세상에 전하는 일이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뉴스를 통해 사건을 마주할 땐, 통계를 보거나 일부분만 알게 돼 그 내용이 쉽게 잊히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그 삶이 실존했음을 알려줄 수 있다. 카메라를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을 담아내면,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켜 변화의 불꽃을 만들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를 정의한다면 그 안에 무엇이 담기길 바라는가?

진실. 세상에 오래 남을 아름다운 것을 만들고 싶지만, 때때로 진실은 혐오스럽고 지루하며 좌절감을 안긴다. 그럼에도 진실을 영화 안에 구현하려는 의지를 내려두고 싶지 않다.

<나 홀로 여행하기>, Traveling Alone, 일본

DIRECTOR 이시바시 유호 ISHIBASHI Yuho

PROGRAM NOTE

<아침이 오면 공허해진다>(2022)로 오사카아시안영화제에서 수상한 이시바시 유호의 세 번째 장편. 첫사랑의 기억과 현재의 상실감을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섬세하게 연출한 작품이다. 도쿄에서 10년을 일한 미사키는 고향에서 가족과 친구들을 다시 만나 오붓한 시간을 보낸다. 동창들이 모이는 행사에 간 그녀는 중학교 때 좋아했던 소년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태풍이 불던 날 도서관에서 처음 대화를 나눴던 그때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미사키는 다시 태풍이 오는 날 도서관을 찾는다. <나 홀로 여행하기>는 마음의 빈자리를 채워 넣는 또 다른 방법을 알려주는 영화다. MD플레이어로 같이 듣던 음악이 그때 그곳의 감정적 충만함을 보여주지만 영화는 직접 그 음악을 들려주는 대신 그때 상황만을 그린다. 비어 있어서 상상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고 이뤄지지 않아서 애틋한 사랑이 있는 것이다. WRITER 남동철(수석 프로그래머)

<나 홀로 여행하기>라는 제목에 어떤 의미를 담았나?

이 이야기를 구상했을 때, 주인공 미사키가 일과 사랑에 얽매인 채 자신을 찾아가는 모습이 마치 ‘혼자 여행하는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인생에는 수많은 만남이 있지만, 잠깐 스치고, 오랜 시간 같은 길을 걷기도 하고, 멀어졌던 사람과 재회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이란 결국 혼자 하는 여행이고, 이 땅 위의 삶이 끝난 후에도 또 다른 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 홀로 여행하기’라는 제목을 지었다.

이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5년 전, 내 첫 장편영화인 <사요나라>를 보고 광고 감독 제안을 한 사람이 있었다. 왜 <사요나라>를 좋아했는지 묻자, 중학교 때 남자 친구가 세상을 떠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가 이야기를 전하던 모습이 오래도록 내 가슴속에 남았다. 그의 일화를 다루고 싶었다기보단 당시 그가 느꼈을 감정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리움이나 상실감을 비롯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여러 감정을 영화에 담았다.

우리 삶에 공감은 분명 필요하지만, 쉽 게 접근하거나 다뤄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내게 심각한 문제를, 다른 이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많지 않나. 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이 있음을 생각하며, 어떻게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지 고민한다. 관객이 ‘나만 이런 게 아니구나’라고 느끼고, 조금이나마 편안해지길 바라며 말이다.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작품을 깊이 들여다볼 때마다,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해 얼마 나 모르는지를 깨닫게 된다. 가장 두려운 것은 내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당신이 생각하는 영화의 힘은 무엇인가? 왜 영화라는 세계 안에 머무르고 있나?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삶을 다루는 이야기 를 통해 늘 위로받았다. 창작자와 감상자의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은, 상호적인 것이라 믿는다. 내가 영화 안에서 작은 구원을 만 나온 것처럼, 나 또한 나의 영화를 통해 누군가와 연결되길 바란다. 영화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아주 작은 부분일지라도 그 안에 존재하고 싶다.

<국경에서의 거래>, Deal at the Border, 키르기스스탄

DIRECTOR 다스탄 자파르 르이스켈디 Dastan ZHAPAR RYSKELDI

PROGRAM NOTE

키르기스스탄과 카자흐스탄 국경지대에서 마약 밀매 조직원으로 일하는 아자와 사맛은 어느 날, 인신매매를 당했다가 가까스로 도망친 나지크를 마주친다. 아자는 밀매대금을 포기하고 나지크를 구하지만, 나지크는 강을 건너던 중 사망한다. 아자는 나지크의 유해라도 고향으로 보내주기로 결심하는데, 그 결심은 아자를 더 큰 위험으로 밀어 넣는다. 거대 마약 생산지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한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의 국경 지대는 거대한 마약 밀매 장소이자, 각종 조직범죄가 자행되는 곳이다. 생존의 절박함에 떠밀린 이들이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동안, 카메라는 자주 뒤로 물러나 거대하고 무심한 국경 산악 지대의 풍광을 비춘다. 장르적이면서도 절제된 대사와 구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WRITER 박선영(프로그래머)

<국경에서의 거래>의 시작점은 무엇인가?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출발했다. 중학생 때 친형 ‘악탄’이 건설 노동자로 해외에 나갔 는데, 몇 달 동안 연락이 두절된 적이 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형이 노예로 갇혀 있다가 기적처럼 탈출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운 좋게 다시 만날 수 있었지만, 몇 주간 형의 생사를 알 수 없어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 나는 감독, 형은 각본가가 되어 함께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기로 했다.

이 영화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이 얼마나 큰 비극인지 말하고 싶었다. 마음의 상처가 신 체적 감금만큼이나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영화는 여러 중앙아시아 국가의 국경 지역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를 만들며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인가?

영화 전반에서 진 정성을 추구하기 위해 애썼다. 실제 국경에서 촬영할 수 없었지만, 최대한 사실과 가깝게 담아내려 했다. 중앙아시아의 국경은 주로 높은 산맥과 큰 강을 가로지르기에, 이 풍경을 온전히 구현하는 것이 어려웠다. 또 특정한 날씨가 필요했는데, 그건 우리 뜻대로 되는 게 아니지 않나. 배에서 촬영한 첫날에는 폭풍이 일었고, 그로 인해 마지막 두 장면이 어둡게 담겼다. 이 장면을 다시 찍겠다고 끝까지 고집해, 배우들이 어려운 상황에서 7시간 넘게 배에 머물러야 했지만, 결국 멋진 장면을 완성해냈다.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램 노트에 이런 문장이 있다. “생존의 절박함에 떠밀린 이들이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는 동안, 카메라는 자주 뒤로 물러나 거대하고 무심한 국경 산악 지대의 풍광을 비춘다.” 절망적인 삶과 웅장한 자연경관을 대조시키며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나?

내 생각에 키르기스스탄 영화는 그리스비극과 유사한 점이 있다. 주인공이 실패할 것임 을 알면서도 자신이 믿는 ‘선’을 따라 나아간다는 것이다. 반면 자연은 그들에게 무관심하고, 그 여정에 아무런 도움이나 희망을 주지 않는다. 이러한 풍경이 그들의 투쟁을 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귀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당신이 영화를 만들며 붙들고 있는 믿음이 있다면?

인간의 선함을 믿는다. 우리에게 변화의 동력이 있다고도 생각한다. 이러한 힘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내게 큰 용기를 준다. 나 또한 강인한 개인의 이야기를 담은, 희망을 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