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가 올해도 다채로운 영화의 물결을 한데 모아 풍성한 축제의 장을 펼친다. 세계적 거장의 신작부터 신예 감독의 독창적인 수작, 동시대 영화계의 화두를 반영한 특별기획 프로그램, 영화에 관한 열린 담론을 도모하는 다양한 행사까지. 부산에서 펼쳐질 스물아홉 번째 영화 축제에서 저마다의 영화적 순간을 만끽하길.
구로사와 기요시의 다음
WRITER 이은선(영화 저널리스트)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수상자이기도 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신작 두 편으로 부산을 찾는다. <큐어> <회로> <도쿄 소나타> 등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또렷한 족적을 남긴 그의 새로운 영화 영역을 발견하는 의미 깊은 기회가 될 것이다.
<뱀의 길>은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1998년에 발표한 동명의 스릴러 영화를 각색해 선보이는 리메이크 작품이다. 원작은 영화 <링>의 각본가인 다카하시 히로시가 썼지만, 리메이크작의 각본은 감독이 저널리스트 오렐리앵 페렌치와 함께 직접 썼다. 프랑스 현지에서 프랑스어로 촬영한 프로덕션 상의 변화와 더불어, 주요 인물인 의사 역할의 성별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었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프리랜서 기자 ‘알베르’는 살해당한 어린 딸의 복수를 결심한다. 오랜 시간 프랑스에서 산 일본인 의사 ‘사요코’는 진정한 의도를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로, 알베르의 복수 과정을 돕고 있다. 연관된 사람들을 잡아다 잔인한 고문을 서슴지 않는 이들은 알베르의 딸을 납치했던 단체의 실체에 점차 다가선다. 그러나 여기에는 충격적인 진실이 기다리고 있다. 일상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공포를 창조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인장이 선명한 영화를 기대할 만하다. 주변의 악으로부터 한껏 초연한, 서늘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의 배우 시바사키 코우는 <뱀의 길> 의 진정한 공포를 완성한다.
또 한 편의 신작 <클라우드>는 의류 공장에서 일하는 ‘요시이’의 이야기다. 그는 온라인 사이트에서 ‘라텔’이라는 아이디로 활동하는 전문 리셀러다. 핸드백, 의료 기기 등 온갖 물건을 싸게 사서 부풀린 가격에 되팔던 그는 직장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리셀 시장에 뛰어든다. 시골 마을 호숫가 집을 임대해 사업을 본격적으로 이어가던 어느 날, 요시이에게 적의를 품은 사람들이 모두 팀을 이뤄 복수를 시작한다. 전 직장 상사, 라이벌 리셀러, 요시이에게 물건을 구입한 사람들까지 가세했다.
전반부의 공허하고 차분한 분위기와 확실하게 대조를 이루며 액션 시퀀스로 전환되는 후반부의 전개는 이 영화만의 독특한 스릴을 책임진다. 증오를 넘어 집단 광기로 발현되는 사회병리적 현상의 그늘을 분명한 실체로 포착한다는 점에서, <클라우드>는 판타지의 영역을 떠나 동시대의 한 부분과 밀접하게 맞닿는 작품이 되기를 자처한다. 요시이의 연인 ‘아키코’ 역은 배우 후루카와 고토네, 요시이가 고용한 비서 ‘사노’ 역은 배우 오쿠다이라 다이켄이 연기한다.
시야를 넓히면 다가오는 것들
WRITER 차한비(영화 기자)
독창성과 실험적 요소를 지닌 단편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소개하는 와이드 앵글 섹션은 올해도 다양한 영화적 시도에 주목한다. 한국 단편 경쟁작 중 단연 돋보이는 작품은 다수의 단편을 만들고 지난해 장편 데뷔작 <다섯 번째 흉추>를 선보인 박세영 감독의 신작 <미쉘>이다. 배우 홍경과 김도연이 위태로운 상태에 놓인 연인으로 등장하며, 새벽의 푸른 어스름이 깔린 방에서 기묘한 드라마를 펼친다. 박지훈 감독의 <변주곡>도 주목할 만하다. 영화는 로맨스의 외피를 두른 채 현실과 환상을 거듭 유영하면서 관객을 예상치 못한 길목으로 데려간다. 10대 소녀들을 중심으로 그들 내면의 갈등을 엿보고 관계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품도 눈에 띈다. 임이랑 감독의 <산책자들>, 송지서 감독의 <유림>, 김예원 감독의 <일렁일렁>은 모험과 일탈, 경쟁과 시험 속에서 피어나는 강렬한 순간들을 채집한다.
아시아 단편 경쟁 부문은 다양한 국가와 주제, 장르를 아우른다. 올해 선보이는 10편의 상영작은 각국의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는 동시에 현실에 저항하는 인물들에 초점을 맞춘다. <1+2 폭탄세일>과 <운수 좋은 개>는 각각 무료한 옷 가게 점원과 그를 지켜보는 어항 속 물고기, 이민 비자를 신청하기 위해 캐나다 대사관 앞에 줄을 선 개를 주인공 삼아 대담한 블랙코미디를 완성한다. <애쉬밸리의 제닐>은 거대 기업과 국가의 횡포를 목격한 인물을 통해 개인을 지우는 방식으로 시스템을 운영하는 사회체제에 반기를 든다. 한편 <블루 보이>는 전통과 금기를 깨고 성 정체성을 찾아가는 소년의 여정을 진중하면서도 유쾌한 필치로 그린다. 어린이를 화면 중앙에 데려와 그의 성장을 함께 지켜보도록 하는 작품 중에는 <해변의 먼지>처럼 서정적인 이미지와 내레이션이 돋보이는 영화도 있다.
다큐멘터리 상영작은 경쟁 부문 10편, 쇼케이스 부문 17편, 총 27편으로 구성된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경쟁 부문.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다큐멘터리 장르의 대중적 확장을 도모하며 ‘다큐멘터리 관객상’을 신설해 한국과 아시아 다큐멘터리 경쟁작 10 편을 대상으로 관객 투표를 진행한다. 이중 국내 작품은 총 5편. 먼저 지난해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에서 <밤 산책>을 선보인 손구용 감독의 신작 <공원에서>가 눈에 띈다. 전작과 궤를 같이하는 작품으로 산책자의 소박하면서도 충만한 정취가 흑백 화면을 넉넉히 채운다. 단편영화 <로맨틱 머신> <코랄 러브>를 만든 이소정 감독의 첫 번째 장편 <모든 점>은 선형 구조에 갇히지 않는 특유의 유연함과 감각적 이미지가 흥미롭게 다가온다. 장편 다큐멘터리로 10여 년만에 스크린에 복귀한 조세영 감독의 <K-Number> 또한 주목할 만하다. 가족을 찾기 위해 한국을 찾은 해외 입양인 ‘미오카 밀러’를 따르던 카메라는 점차 국가 폭력의 그늘 속으로 들어간다. 도쿄와 뉴욕을 기반으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후쿠나가 다케시 감독의 신작 <아이누 푸리>도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서 만날 수 있다. 홋카이도 출신 아이누 원주민 부자 ‘시게’와 ‘모토키’의 삶을 들여다보면서, 영화는 낯선 타인을 타자화하는 대신 그와 공존하는 길을 모색한다.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부문에서는 두 번째 작품을 내놓은 감독들의 이름이 빛을 발한다. 2020년 <내언니전지현과 나>로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킨 박윤진 감독은 두 번째 게임 다큐멘터리 <세이브 더 게임>을 공개한다. 전작이 RPG 게임 ‘일랜시아’의 이용자들에 주목하며 게임 산업의 동향과 마니아 문화를 살펴봤다면, 신작은 게임업계 종사자들의 증언과 사료를 바탕으로 한국 게임 산업의 역사와 그 문화적 의미를 탐구한다. 한편 첫 장편으로 극영화 <밤빛>을 만들었던 김무영 감독은 두 번째 장편으로 반공 이데올로기와 이미지의 역사를 톺아보는 다큐멘터리 <폭력의 감각>을 선보인다. 영화, 사진, 건축에 기입되고 삭제된 감각을 쫓으며 낙인처럼 새겨진 기억을 추적한다. 이외에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하고 ‘올해 최고의 다큐멘터리’로 거론되는 마티 디옵 감독의 <다호메이>, 칸영화제에서 황금눈상을 받은 라울 펙 감독 의 <사진작가 어니스트 콜>, 픽션과 다큐멘터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기욤 브락 감독의 <올드 랭 사인> 등도 놓치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이 시대의 시네아스트
WRITER 이은선(영화 저널리스트)
동시대의 가장 흥미로운 시네아스트의 영화 세계를 탐험한다는 것은, 지금 이 시간에도 새로운 페이지가 넘어가는 영화의 현재 진행을 가장 가까운 시공간에서 목격하는 적극적 관찰자가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올해의 특별기획 프로그램 ‘미겔 고메스, 명랑한 멜랑콜리의 시네아스트’는 이 같은 경험을 원하는 이들을 위해 마련된 자리다. 1972년생, 포르투갈 출신의 감독 미겔 고메스의 전작, 총 8편의 장편 연출작이 새로운 발견과 탐색을 기다리고 있다.
미겔 고메스의 영화는 언제나 놀라운 상상력을 기반으로 다큐멘터리부터 픽션, 때로는 동화의 영역까지 거침없이 오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편집 과정에서 이 이음새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더욱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인위성을 강조한다. 그는 영화를 ‘어린 시절로의, 믿을 수 있었던 시간으로의 복귀’라 말한다. 감독의 영화 세계를 가로지르는 테마를 흔히 포르투갈어 ‘사우다드(saudade)’로 압축해 설명하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고독을 의미하는 라틴어(solitas, solitatem)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노스탤지어, 멜랑콜리, 그리움 등의 감정을 포괄한다. ‘갈망하는 무언가에 대한 기억’을 뜻하기도 한다.
감독 스스로 최고작으로 꼽는 첫 장편 <네게 마땅한 얼굴>은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이한 주인공 ‘프란시스코’에게 닥친 실존적 위기에 관한 영화다. 어린아이처럼 홍역을 앓게 된 그는 7명의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시골집에 갇혀 지낸다. 코미디, 뮤지컬, 동화, 성장 모험극이 뒤섞인 몽환적 구성 안에서 주인공에게 떨어진 과제는 유년 시절을 대하는 낭만성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미겔 고메스가 포르투갈의 격언(‘서른 살까지는 신이 주신 얼굴을 가지고 있고, 그 후에는 당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얼굴을 갖게 된다’)을 떠올리며 만든 환상적인 모험담은 이후에도 지속될 그의 영화적 지향을 읽게 한다.
두 번째 장편 <친애하는 8월>은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흥미로운 크로스오버다. 로맨스영화를 준비 하지만 제반 상황이 여의치 않은 감독 ‘고메스’는 팀을 꾸려 포르투갈 중부의 한 산골 마을로 향한다. 여름의 한가운데를 지나던 8월의 어느 날, 흥이 오른 음악 축제의 분위기와 그곳 사람들의 모습이 감독의 16mm 카메라에 담긴다. 영화가 애초에 목표로 한 방향성이 점차 길을 잃는 동안, 고메스는 급기야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털어놓는 모습을 촬영하는 데 더 열중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한 기타리스트와 애틋한 사랑에 빠진 소녀 가수 ‘타냐’의 사연이 서사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이 모든 순간의 포착은 감독의 계획에 따른 것일까, 혹은 우연한 행운에 불과할까. 인과관계 중심의 관습적 내러티브를 벗어나 영화와 현실 세계 사이를 마법처럼 유영하는 자유로움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이 밖에도 베를린 국제영화제에서 알프레드 바우어상을 수상하며 미겔 고메스 감독을 21세기의 젊은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든 <타부>, 정치와 경제 위기에 직면한 포르투갈 사회의 초상을 <천일야화>의 구조에 빗대어 배치한 야심찬 3부작 <천일야화> 시리즈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0년 8월 포르투갈에서 촬영을 시작한 <더 트스거오 다이어리>는 영화제작이 멈춰버린 상황을 일상에 존재하는 환상적이고 신화적인 요소와 버무려 완성한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결과물이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상영작은 미겔 고메스 감독의 최신작이자 올해 칸영화제 감독상에 빛나는 <그랜드 투어>다. 영화의 제목은 인도에서 시작해 중국이나 일본에서 끝나는, 20세기 초에 유행한 아시아 투어의 명칭에서 따왔다. 1970년대, 떠나버린 약혼자와 그를 뒤따르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여정이 감독의 아카이브 속 아시아와 상상 속 모험의 배경인 아시아가 공존하는 대서사시 안에서 펼쳐진다. 2019년 실제로 그랜드 투어를 시작해 직접 영상을 수집하고, 팬데믹 기간에는 포르투갈에서 원격으로 아시아 현지의 촬영팀을 감독할 수밖에 없었던 미겔 고메스 감독의 작업 환경 역시 이 영화만의 독특한 스펙터클을 만들어낸 배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