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가 올해도 다채로운 영화의 물결을 한데 모아 풍성한 축제의 장을 펼친다. 세계적 거장의 신작부터 신예 감독의 독창적인 수작, 동시대 영화계의 화두를 반영한 특별기획 프로그램, 영화에 관한 열린 담론을 도모하는 다양한 행사까지. 부산에서 펼쳐질 스물아홉 번째 영화 축제에서 저마다의 영화적 순간을 만끽하길.
딛고 일어서며
EDITOR 안유진
다채로운 영화의 물결이 한데 어우러지는 축제의 장, 부산국제영화제가 올해도 어김없이 성대한 시작을 알린다. 국고보조금 삭감이라는 악재 속에서도 지난해에 비해 상영작을 확대하고, 영화제의 미래를 주제 삼아 포럼을 개최하는 등 위기를 딛고 일어나 한층 내실을 다진 모습이다. 한 해 동안 아시아 영화 산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아시아 영화인에게 수여하는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의 영예는 필모그래피 전반에 걸쳐 인간의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담아내온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에게 돌아간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는 개막작 <전,란>부터 폐막작 <영혼의 여행>까지 63개국, 224편의 공식 초청작과 55편의 커뮤니티비프 상영작을 선보인다. 영화제의 시작을 알리는 개막작으로 OTT 오리지널 영화를 선정한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로, 극장의 스크린을 넘어 영화와 만나는 방식이 보다 다양해지는 현 영화계의 흐름을 반영하려는 시도다. 이 밖에도 전 세계 거장들의 신작과 유수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화제작, 월드 프리미어로 부산을 찾는 한국 작품을 다수 상영한다.
올해에는 다큐멘터리 장르의 대중적 확장을 도모하고자 ‘다큐멘터리 관객상’을 신설해 와이드 앵글 섹션의 한국과 아시아 다큐멘터리 경쟁작 10편 중 한 편을 가려 수상한다. 조세영 감독의 <K-Number>와 이소 정 감독의 <모든 점> 등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서 소개하는 한국 감독의 도전적이고 신선한 작품을 통해 확장되고 있는 한국 다큐멘터리의 스펙트럼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갈라 프레젠테이션 섹션에서는 5편의 영화를 선보인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신작 <뱀의 길>과 <클라우드>부터 지아장커 감독의 <풍류일대>, 올해 칸영화제 감독상을 품에 안은 미겔 고메스 감독의 <그랜드 투어>, 현존하는 프랑스 여성 감독을 대표하는 파트리샤 마쥐이 감독의 <보르도에 수감된 여인>까지 아시아와 유럽을 아우르는 거장의 신작을 상영한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3개의 특별기획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미겔 고메스, 명랑한 멜랑콜리의 시네아스트’에서는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오가며 독자적 작품 세계를 구축한 미겔 고메스 감독의 장편 전작 8편을 소개하고, 그의 영화관과 작품 세계를 조명하는 마스터 클래스를 진행한다. 이 밖에도 10대 청소년의 삶을 조명한 아시아의 성장영화 신작을 모아 소개하는 ‘10대의 마음, 10대의 영화’, 지난해 세상을 떠난 배우 이선균의 대표작 6편을 상영하는 ‘고운 사람, 이선균’도 예정돼 있다.
특별 상영 섹션에서는 부산국제영화제 1회부터 15년간 집행위원장을 역임하며 영화제의 기틀을 다진 김동호 전 이사장의 영화적 여정을 되짚는 <영화 청년, 동호>를 상영한다. 영화인 김동호와 인간 김동호의 이야 기가 교차하며 그가 지나온 영화 인생의 깊이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7년 차에 접어든 커뮤니티비프는 마을 공동체가 직접 기획, 촬영, 편집을 거쳐 만든 단편영화를 상영하는 시민 참여 프로그램 ‘마을 영화 만들기’를 이어간다. 올해에는 7편의 단편과 4편의 메이킹 다큐멘터리를 만 날 수 있다. 동네방네비프는 올해도 부산 곳곳의 이색적 명소에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일상 속 특별한 영화적 순간을 선사한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어느덧 30주년을 한 해 앞두고 있다. 영화를 향한 기대와 애정을 품은 관객과의 만남을 기다리며, 부산국제영화제는 올해도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작품들과 함께 생동감 넘치는 영화 축제를 성대하게 열 준비를 마쳤다.
강렬한 시작, 영화적 마무리
WRITER 이은선(영화 저널리스트)
부산국제영화제는 올해 대중성을 한층 더 전면에 내세운다. 그 의지는 영화제의 얼굴인 개막작 <전, 란>에서부터 충분히 감지된다. 다가오는 10월에 넷플릭스에서 공개하는 작품으로, 부산국제영화제가 OTT 오리지널 영화를 개막작으로 선정한 것 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편 이는 예견된 수순처럼 보이기도 한다. 부산국제영화제는 2021년 주목할 만한 OTT 오리지널 콘텐츠를 소개하는 온 스크린 섹션을 신설했고, 최근 몇 년간 전통적 스크린을 넘어 플랫폼의 경계를 허무는 작품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았다. ‘관객이 얼마나 즐길 수 있는지가 중요한 기준이었기에 넷플릭스 작품이라 해서 (개막작에서) 제외하는 일은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다’는 것이 부산국제영화제의 공식 입장이다.
<전,란>은 박찬욱 감독이 제작과 각본에 참여한 사극 대작으로 일찌감치 화제를 모았다. 메가폰은 <심야의 FM>을 연출한 김상만 감독이 잡았다. 영화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두 사람의 오랜 인연과 엇갈린 운명, 이들을 둘러싼 혼란스러운 정국을 다룬다.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와 그의 몸종 ‘천영’은 어린 시절부터 신분을 뛰어넘은 우정을 나눈 사이다. 천영은 본래의 양인 신분으로 돌아가고자 종려의 집안에 헌신하지만, 면천을 약속한 종려 집안이 등을 돌리며 이들의 관계에도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전쟁이 일어난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양반이든 민중이든 피할 수 없는 전쟁. 그 격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천영은 의병이 되고 종려는 군주 선조의 최측근 무관이 된다. 친구가 아닌 적으로 재회한 두 사람은 서로에게 울분에 찬 칼끝을 겨눈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기대하게 만드는 것은 ‘믿고 보는 배우들’의 예고된 앙상블이다. 천영을 연기하는 배우 강동원과 종려 역을 맡은 박정민뿐 아니라 의병장 ‘김자령’ 역의 진선규부터 카리스마 넘치는 의병 ‘범동’ 역의 김신록, 잔혹하기 이를 데 없는 일본 선봉장 ‘겐신’ 역의 정성일, 선조 역의 차승원까지 쟁쟁한 배우들이 난세에 던져진, 운명이 얽히고 설킨 이들을 연기한다. 특히 작중 천영은 빼어난 검술로 왜적들을 떨게 만드는 ‘청의 검신’으로 불리 는 캐릭터로, <군도: 민란의 시대>에 이은 배우 강동원의 시원시원한 검술 액션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점도 기대를 모은다. 박찬욱 감독의 글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날 선 유머 감각이 혼란의 시대를 다루는 사극에 어떤 방식으로 조화롭게 녹아들었는지 살펴보는 것 또한 작품의 관전 포인트다.
대중의 환호를 이끌어낼 화제작으로 활짝 연 영화제의 문은 인간 존재와 삶을 향한 근본적 질문을 담은, 지극히 영화적인 작품이 닫는다. 올해의 폐막작은 <면로> <내 곁에 있어줘> 등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싱가포르 출신 연출가 에릭 쿠의 신작 <영혼의 여행>이다. 프랑스와 싱가포르, 일본 3개국이 공동 제작한 작품이다.
<쉘부르의 우산>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에 출연하며 프랑스의 ‘살아 있는 전설’로 추앙받는 배우 카트린느 드뇌브의 주연작으로, 그는 이 영화에서 자신의 마지막 콘서트를 위해 도쿄를 찾는 샹송 가수 ‘클레어’를 연기한다. 성황리에 공연을 마무리한 클레어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 영혼의 상태로 이승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마찬가지로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난 자신의 열혈 팬 ‘유조’의 영혼과 동행하던 클레어는 죽음을 통해 역설적으로 존재와 인생의 의미를 깨닫는다. <냉정과 열정 사이>로 얼굴을 알린 일본의 스타 타케노우치 유타카가 유조의 아들로 출연한다.
이 작품의 주요 장면은 혼슈 지역의 도시 다카사키를 위시해 일본을 배경으로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에릭 쿠 감독의 개인적 애도가 깃든 작품이기도 한데, 그는 2018년 세상을 떠난 자신의 반려견 ‘우피’를 떠올리며 이 영화를 만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나의 절친한 친구 우피에게 바치는 헌사”라는 것이 에릭 쿠 감독의 설명이다.
반갑고 익숙한 거장들
WRITER 박동수(영화평론가)
주요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된 거장의 신작을 상영하는 아이콘 섹션에서는 올해도 반갑고 익숙한, 부산국제영화제의 단골손님이라 할 법한 거장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단연 눈에 띄는 이름은 지난 해 <청춘(봄)>으로 부산을 찾았던 왕빙 감독. 그는 2014년부터 2019년까지 6년간 중국 저장성 쯔리전(織里鎭)의 의류 공장 지대에서 촬영을 이어온 ‘청춘 3부작’의 남은 두 편 <청춘(하드 타임즈)>과 <청춘(홈커밍)>을 선보인다. 각각 226분과 152분으로 러닝타임이 결코 짧지 않지만, 왕빙 감독의 팬이라면 오히려 반가울 소식이다. 필모그래피 전반에서 이에 못지않은 긴 러닝타임의 작품을 선보여 온 필리핀의 거장 라브 디아즈 감독은 247분에 달하는 신작 <판토스미아>로 부산을 찾는다. 꾸준히 역사와 국가 폭력, 권력관계와 인권을 화두로 다뤄온 그답게 이번 작품 또한 주인공의 군 복무 시절 트라우마를 소재로 삼았다.
올해 각종 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작품들 또한 부산을 찾는다. 먼저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션 베이커 감독은 <아노라>에서 우연한 계기로 러시아의 재벌가 아들과 결혼한 스트리퍼 ‘애니’의 이야기를 다루며, 전작 <레드 로켓>에 이어 다시 한번 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한편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을 거머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의 <룸 넥스트 도어>는 그의 첫 영어 장편으로 배우 틸다 스윈턴과 줄리앤 무어가 나란히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과정을 담았다. 베를린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상을 수상한 브루노 뒤몽 감독의 신작 <엠파이어>도 눈여겨보자. <스타워즈>와 <듄> 시리즈를 노골적으로 패러디하는 이번 영화에서도 <릴 퀸퀸> <꽥꽥과 잉여인간> 같은 전작에서 볼 수 있던 브루노 뒤몽 감독만의 기상천외한 코미디를 만날 수 있다. 이 밖에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와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에밀리아 페레즈>, 특별상을 수상한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의 <신성한 나무의 씨앗> 또한 기대되는 수작이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부산을 찾는 반가운 이름 역시 여럿 보인다. 이란의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은 <여기 아이들은 같이 놀지 않는다>를 월드 프리미어로 선보인다.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은 단편영화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으로 부산을 찾는다. 매년 꾸준히 한두 편의 영화를 발표하는 홍상수 감독은 올해 자신의 서른한 번째 영화 <여행자의 필요>를 상영한다. 이 밖에도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그 여름의 시간들>, 키릴 세레브레니코프 감독의 <리모노프: 에디의 발라드>, 알랭 기로디 감독의 <미세리코르디아> 등 부산국제영화제와 오랜 인연을 이어온 감독들의 신작 또한 선보인다. 챙겨볼 영화의 목록은 끝없이 길어지지만, 그중에서도 레오스 카락스 감독의 실험성 짙은 단편영화 <잇츠 낫 미>는 아이콘 섹션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수작이다. 전작 <아네트>에서 여전한 괴력을 선보인 그이기에, 이번 작품에서는 어떤 힘으로 관객을 사로잡을지 기대를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