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가 올해도 다채로운 영화의 물결을 한데 모아 풍성한 축제의 장을 펼친다. 세계적 거장의 신작부터 신예 감독의 독창적인 수작, 동시대 영화계의 화두를 반영한 특별기획 프로그램, 영화에 관한 열린 담론을 도모하는 다양한 행사까지. 부산에서 펼쳐질 스물아홉 번째 영화 축제에서 저마다의 영화적 순간을 만끽하길.

아홉 편의 성장통

WRITER 임유청(영화 도서 전문 편집자)

<모래 수영장에서 헤엄치기>

우리는 어쩌면 죽는 날까지도 성장하겠지만, 인생의 그 어느 시기에도 결코 10대 시절만큼 격렬하게 성장할 수는 없다. 10대의 성장은 드라마틱하다. 같은 10대라도 열 살과 열아홉 살의 하루는 백일 된 아기와 백 세를 맞이하는 노인의 하루만큼이나 간극이 크다. 10대의 성장은 또한 서로 다른 속도로 자라나는 몸과 마음, 그로 인해 겪는 혼란과 우울을 뜻한다. 이들의 세계는 성장통을 온몸으로 겪으며 커가는 아이들과 그들의 성장 속도를 통제하려는 어른들로 가득하다. 10대는 충돌 대상을 가리지 않는 독립된 원자다. 서로의 세계에 파괴적 위력으로 진입해 우정과 첫사랑, 변화와 자유라는 낭만적 사건을 일으킨다. 그 충돌 뒤에는 갈등과 외로움, 억압과 순응처럼 외면하고 싶은 순간이 반드시 따라와 잊을 수 없는 성장통을 남긴다. 올해 부산 국제영화제에서는 특별기획 프로그램 ‘10대의 마음, 10대의 영화’를 통해 저마다 고유한 깊이와 너 비를 지닌 9편의 성장통을 소개한다.

<여름날의 레몬그라스>

<모래 수영장에서 헤엄치기>는 한여름과 교복, 스포츠 같은 청량하기 그지없는 일본 성장영화의 키 워드가 눈에 띄는 작품으로, 여름방학 기간 체육수업에 빠진 벌로 여학생 넷이 야외 수영장 청소를 하며 시작된다. 배우 배두나의 출연작으로도 잘 알려진 <린다 린다 린다>를 연출한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이 고등학교 시절 만든 연극을 영화로 옮겼다. 자신의 10대 시절에 만든 10대의 성장기를 어엿한 성장영화의 장인이 되어 완성한 셈. 한편 <마이 선샤인>은 설경을 배경 삼는다. 아이스하키 팀에 속해 있지만 크게 열정이 없는 ‘타쿠야’는 어느 날 드뷔시의 ‘달빛’에 맞춰 피겨스케이팅을 하는 소녀 ‘사쿠라’를 보게 된다. 그 뒤로 하키화를 신은 채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도 피겨 연습을 하는 타쿠야에게 피겨스케이팅 코치가 다가와 사쿠라와 함께 아이스댄싱 시합에 도전해보자고 제안한다. 사카모토 준지, 이시이 유야, 고레에다 히로카즈 이들 세 감독의 작품으로 친숙한 인상을 남긴 배우 이케마쓰 소스케가 코치 역을 맡았다.

외모도 성적도 완벽한 전학생, 말괄량이 소녀,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 좋아하는 마음을 감추고 소녀의 곁을 맴도는 소꿉친구의 러브 트라이앵글! <여름날의 레몬그라스>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부터 <나의 소녀시대> <상견니>까지 보는 이들의 마음에 비눗방울을 닮은 설렘을 담뿍 불어 넣는 대만 청춘 로맨스의 계보를 잇는 작품이다. 대만의 청춘스타 차오위닝과 문 리, 보이 그룹 출신 배우 SHOU(루준석)가 출연한다. 올해 부산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소개되는 <우리들의 교복 시절>은 1990년대 대만, 명찰 색깔로 주간과 야간 학생을 나누던 제1여고를 배경으로 삼는다. 주간 입학시험에 실패해 야간 학생이 된 ‘아이’는 주간 학생 ‘민’과 책상을 나눠 쓰다 이내 단짝 친구가 되고, 동시에 ‘루커’라는 소년에게 생전 처음 겪어보는 종류의 감정을 품게 된다.

아시아 성장영화에서 교복은 우정과 첫사랑 같은 풋풋한 마음을 상징하는 한편, 숨 막히도록 치열한 입시 제도를 뜻하기도 한다. 장쉬위 감독의 <피쉬본>은 대입 시험에 실패해 엄마와 갈등을 겪는 데다 실수로 망가뜨린 친구의 휴대폰까지 물어줘야 하는 곤경에 처한 열여덟 소녀 ‘리치’가 성인으로 가는 문턱에서 겪는 막막함, 불안과 고통의 감정을 목구멍에 걸린 생선 가시로 인한 통증에 빗대어 표현한 작품이다. <해피엔드>는 권력에 대한 접대, 약자에 대한 차별, 비윤리적 감시 체계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격렬하게 반항하는 고등학생들의 이야기로,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를 연출한 소라 네오 감독의 첫 장편 극영화다.

<호랑이 소녀>

유수의 국제영화제에서 주목한 성장영화들도 놓칠 수 없다. 선댄스영화제 관객상 수상작인 <걸스 윌비 걸스>는 처음 자각한 성적 욕망에도, 자신을 둘러싼 권위적인 시스템에도 질문을 퍼붓기 시작한 10대 소녀 ‘미라’와, 딸이 자신처럼 순응적인 삶을 살길 바라는 엄마 ‘아닐라’가 각자, 또 함께 겪는 성장의 과정을 그렸다. 베니스 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부문 남자배우상을 거머쥔 <바람의 도시>는 울란바토르를 배경으로 학교에서는 평범한 학생이지만 지역 공동체에서는 샤먼으로 살아가는 열일곱 살 ‘제’의 이야기를 그린다. 데뷔작으로 지난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 대상을 수상한 아만다 넬 유 감독의 <호랑이 소녀>도 부산을 찾는다. 열두 살 소녀 ‘자판’이 초경을 시작하자 단짝 친구들은 물론 엄마까지 자판의 ‘여성 됨’을 비난하고 질책 한다. 여성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자연스러운 이차성징의 과정조 차 차별과 억압의 대상이 된다. 자판은 모멸감 속에서 여성으로 자라는 대신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인 호랑이로 변해간다. 이 작품이 말레이시아 자국의 심의를 통과하지 못했다는 점이 영화 속 판타지를 현실로 완성한다.

아시아의 새로운 물결

WRITER 차한비(영화 기자)

<라나를 위하여>

아시아 영화의 새 얼굴을 발굴하는 등용문 역할을 해온 부산국제영화제의 대표적인 경쟁 부문, 뉴 커런츠. 자국에서 작품 검열과 상영 금지로 곤욕을 치른 가운데 올해 칸영화제에서 신작 <신성한 나무의 씨앗>을 공개하며 큰 화제를 모은 이란의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이 심사위원장을 맡고, 한국 영화계의 스타일리스트로 꼽히는 이명세 감독,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와 <소년 시절의 너>로 국내 대중에게도 익숙한 배우 저우둥위 등이 심사 위원으로 합류해 총 10편의 작품을 심사한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두 편의 한국 영화를 소개한다. 최종룡 감독의 <수연의 선율>은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된 ‘수연’의 생존기를 그린다. 친구와 이웃마저 등을 돌린 상황에서 수연은 저보다 어린 아이 ‘선율’에게 다가간다. 역할과 기능을 상실한 공동체, 각자의 이유로 책임을 포기한 어른들. 영화는 그 속에서 제 길을 고심하는 두 아이를 뒤따르며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데뷔작 <불도저에 탄 소녀>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박이웅 감독은 3년 만에 두 번째 장편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는다. <아침바다 갈매기는>은 한 어부의 실종 사건으로 시작한다. 잔잔해 보이던 작은 어촌 마을은 주민들 사이의 얽히고설킨 관계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차츰 뜨겁게 요동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오랜 공백 끝에 돌아온 배우 윤주상과 양희경의 존재감이 특히 돋보인다.

후루카와 고 감독의 <가네코의 영치품 매점>은 선과 악, 희망과 분노를 맞대어보며 순도 높은 심리극을 펼친다. 폭력 전과가 있는 주인공 ‘가네코’는 가족에게 의지하며 새로운 일상을 꾸려가는데, 어느 날 예상치 못한 비극을 맞닥뜨리면서 또다시 시험대에 오른다. 찰스 후 감독의 <동쪽으로 흐르는 강>은 상이한 두 세계를 한 폭의 스크린에 새겨 넣는다. 동창회에서 친구와 재회한 ‘리’는 오래도록 외면했던 과거의 그늘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12년 전 사라진 아버지가 남기고 간 카메라는 현실과 비현실을 겹쳐 보이며 상실과 고통으로 얼룩진 리의 기억이 하나둘 되살아나는 여정에 동행한다.

테 마우 나잉 감독의 <침묵의 외침>은 4년 만에 뉴 커런츠 부문에 초청된 미얀마 작품이다. 쿠데타로 인해 나라는 혼란에 빠지고, 사람들은 잔뜩 경계 태세를 갖춘 채 하루하루 숨죽이며 살아가는 상황. 영화는 생존과 생계를 동시에 위협받는 열여덟 살 여성 ‘미텟’을 중심으로 폭력, 차별, 노동 등 다양한 담론을 싣고 달린다. 올리버 시쿠엔 찬 감독의 <현대 모성에 관한 몽타주> 또한 젊은 여성의 분투를 그린다. 딸을 출산한 후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엄마 되기’를 요구받는 ‘징’의 하루를 뒤따르며, 영화는 벼랑 끝에 내몰린 한 여성의 시간을 낱낱이 기록한다.

이란에서 도착한 <라나를 위하여>는 심금을 울리는 가족 드라마이자 냉철한 사회 드라마다. 주인공 부모는 딸 ‘라나’를 살리기 위해 심장을 기증해줄 이를 찾아 나선다. 영화는 생명과 애정마저 돈으로 셈하는 세상의 어두운 면을 예리하게 응시하는 동시에 어떻게든 희망과 기적을 붙잡으려 애쓰는 가난한 이들의 진심을 어루만진다. 카자흐스탄 감독 엘자트 에스켄디르의 <아벨> 또한 자본주의의 파괴력을 고발하는 작품이지만 표현 방식은 사뭇 다르다. 소비에트연방이 붕괴한 후 정세가 급변한 1993년을 배경으로, 노동자들에게 닥친 시련과 부조리를 건조한 시선으로 그린다.

올해 뉴 커런츠 부문 상영작은 인간 존재의 한계와 이상을 두루 돌아보며 시스템을 향해 물음표를 던지는가 하면, 점차 후순위로 밀려나는 듯한 무형의 가치에 힘을 실어주기도 한다. 가족과 사회, 개인의 내밀한 기억과 공동체가 감당해야 할 역사를 저마다의 방식으로 연결하는 작품을 통해 새로운 아시아 영화의 물결을 느껴보기를 기대한다.

확장하는 한국 영화

WRITER 박동수(영화평론가)

<더 킬러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다채로운 한국 영화를 만날 수 있다. 먼저 탄탄한 국내 마니아층을 보유한 동명의 대만 청춘영화를 리메이크한 두 편의 영화가 눈길을 끈다. <청설>은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두각을 나타낸 신예 배우 노윤서와 홍경이 각각 손으로 말하는 소녀 ‘여름’과 여름에게 첫눈에 반한 ‘용준’을 연기해 원작 특유의 풋풋한 감성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는 K-팝 아티스트 겸 배우 진영과 다현이 동갑내기 주인공으로 분해 2000년대 한국을 배경으로 철없는 첫사랑 이야기를 그려낸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드라마 <인간실격> 등으로 인물 간의 관계와 정서를 세밀하게 포착해온 허진호 감독은 네덜란드 작가 헤르만 코흐의 장편소설 <디너>를 영화로 구현한 <보통의 가족>으로 부산을 찾는다. 김종관, 노덕, 장항준, 이명세 감독은 하나의 프로젝트를 위해 뭉쳤다. <더 킬 러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살인자들>과 이 소설에서 영감 받은 에드워드 호퍼의 회화 작품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두 고전 작품에서 모티프를 얻어 네 감독이 각자의 시선으로 풀어낸 단편 옴니버스 영화다. 감독의 해석에 따라 배우 심은경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영화의 영역에서 활약하던 감독들의 신작도 눈에 띈다. 자신의 동명 단편을 장편으로 확장한 이기혁 감독의 <메소드연기>는 코믹 연기를 질색하는 배우가 정통 사극의 임금 역할을 맡으며 벌어지는 소동을 담는다. 단편과 마찬가지로 배우 이동휘가 자신의 본명으로 출연한다. 전선영 감독의 <폭로: 눈을 감은 아이>는 초등학교 시절 절친했던 두 인물이 형사와 용의자 신분으로 재회한 이야기를 담아낸다. 드라마 <파친코>로 주목받은 배우 김민하와 안정감 있는 연기로 호평받은 배우 최희서가 호흡을 맞춘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춥고>를 연출한 박송열 감독의 신작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 에서는 전작에 이어 감독 자신과 그의 배우자이자 각본가 원향라가 작중 부부로 출연한다. 단순하고 직선적인 이야기 속에서 두 창작자의 리얼리즘이 뻗어가는 방식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재작년에 <기행>으로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았던 이하람 감독은 살인범 커플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로드무비 <뭐 그런 거지>를 선보인다.

온 스크린 섹션에서는 드라마 장르로 활동 영역을 넓힌 영화감독들의 작품을 만날 수 있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와 <애비규환>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은 김혜영 감독과 최하나 감독이 손잡고 드라마 <내가 죽기 일주일 전>을 선보인다. 동명의 판타지 소설을 영화화한 이 작품에서는 배우 김민하가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청년 ‘희완’을, 배우 공명이 6년만에 나타난 희완의 첫사랑이자 저승사자 ‘람우’를 연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