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부산에서 단 열흘 동안 열리는 영화로운 축제를 위해 1년의 시간을 오롯이 쏟는 사람들. 부산국제영화제의 프로그래머 9인이 올해 상영하는 2백79편의 수작 중 눈여겨봐야 할 추천작 5편을 애정 어린 마음으로 전해왔다. 오늘의 영화가 관객의 내일을 풍요롭게 하기를 소망하며.

Asian Cinema
남동철 수석 프로그래머

아시아(일본, 이란, 서아시아)

올해의 경향 올해 장편영화 2편을 만든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올해의 아시아영화인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나미비아의 사막> <마이 선샤인> <고스트캣 앙주> <해피엔드> <슈퍼 해피 포에버> 등 칸영화제와 베니스 국제영화제에 초청된 젊은 감독들의 영화가 많다. 서아시아에서는 이란 영화가 다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그중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칸영화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케이크>는 베를린 국제영화제, <증인>은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프로그래머의 기쁨 부산국제영화제가 발굴한 감독들이 신작을 만들어 국제적 주목을 받는 성과를 낼 때 큰 보람을 느낀다. 2년 전 뉴 커런츠 부문에 <노 엔드>를 선보인 나데르 사에이바르 감독은 <증인>으로 베니스 국제영화제 오리종티 부문의 엑스트라 관객상을 받았고, 오쿠라마 히로시 감독의 <마이 선샤인>은 아시아프로젝트마켓(APM)을 거쳐 완성된 뒤 칸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됐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추억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는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의 별세로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고인의 뜻을 이어받기 위해 모두 분투한 덕에 무사히 영화제를 치렀다. 그해 고(故)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를 기리는 행사에서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이 고인의 사진에 입맞추던 순간이 머릿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함께 보고 싶은 영화 영화는 꿈을 꾸게 만들기도, 세상의 진실을 알려주기도, 살아보지 못한 삶을 경험하게 하기도 하지 않나. 영화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여전히 크다고 생각한다. 좋은 영화를 통해 그 영향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것, 그게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다.

1 쿠노 요코, 야마시타 노부히로 <고스트캣 앙주> 고양이가 말을 하고, 스쿠터를 타고 다니며, 아르바이트로 마사지를 한다는 엉뚱한 상상이 애니메이션으로 구현되었다. 시치미 뚝 떼고 인간과 고양이, 요괴가 공존하는 세상이 무척 귀엽다.

2 마츠시게 유타카 <고독한 미식가 더 무비> <고독한 미식가>를 자주 본 사람 중 하나로서 극장판을 놓칠 수 없었다. 주인공 ‘고로’를 맡은 마츠시게 유타카를 부산 에서 직접 만날 수 있다.

3 야마나카 요코 <나미비아의 사막> <유코의 평형추> <플랜 75> 등에서 눈여겨본 일본의 젊은 배우 가와이 유미가 자신의 모든 걸 가감 없이 보여준다. 감독과 배우가 특별한 관계를 맺어야만 성립 가능한 영화.

4 모함마드 라술로프 <신성한 나무의 씨앗> 이란에서 정치적 탄압을 받은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의 역작. 이란 사회의 현재를 영화로 보여주지만 결코 피상적이지 않은, 심리적 깊이가 대단한 영화다.

5 이만 야즈디 <라나를 위하여> 평범한 가족 드라마처럼 시작하지만, 차곡차곡 쌓아 올린 이야기가 결국 감정의 소용돌이로 휘몰아친다. 이란 영화의 저력을 보여주는 작품.

Asian Cinema
박선영 프로그래머

아시아(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중화권)

올해의 경향 세계 영화계, 특히 칸영화제에서 아시아 영화의 활약이 돋보인다. 무엇보다 좋은 여성 감독의 영화가 지역을 가리지 않고 다수 탄생했다.

프로그래머의 기쁨 1년 내내 영화를 보고, 영화인들을 만나고, 내가 본 영화를 소개하는 이 일을 매우 사랑한다. 특히 가슴이 떨리도록 좋은 작품을 볼 때 행복하고, 이 영화와 영화인들을 무사히 부산에 초청해 관객과 만나게 하는 순간이 참 좋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선 관객들이 SNS에 ‘올해는 이 영화가 이런 점에서 제일 좋았다’고 남긴 게시물을 발견할 때도 큰 기쁨을 느낀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추억 2년 전 양조위 배우의 오픈 토크에 참여하기 위해 10~70대 관객이 객석을 가득 채웠을 때, 질의응답이 분주히 오가던 현장의 열기를 기억한다. 2019년, 아프가니스탄의 사라 카리미 감독이 “우리처럼 영화 교육 환경이 좋지 않은 나라에서 온 감독, 그중에서도 특히 나 같은 여성 감독은 부산국제영화제의 아시아영화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은 뒤 자신의 작품을 들고 부산으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 꿈이다. 난 그걸 이뤘다”고 말했을 때도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이런 순간들이 내가 계속 영화제에서 일하게 하는 힘이 된다.

함께 보고 싶은 영화 어떤 시대의 힘을 지닌 작품들을 관객과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시간과 장소를 증명하고, 그렇기에 힘을 갖고, 그래서 대화의 장을 만드는 작품들. 복합적인 레이어를 지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영화를 함께 보고 싶다.

1 파얄 카파디아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카메라를 따라 흔들리는 두 여성의 마음이 담긴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감독의 탄생을 알린다.

2 파르하트 샤리포브 <사랑의 병정> 카자흐스탄에서 온 뮤지컬영화. 이토록 아름답고 황홀한 음악과 댄스 신이라니!

3 디팍 라우니야르 <경찰관, 푸자> 네팔 여성 경찰이 사건의 깊은 내막을 파헤친다. 신선하고 새롭고 지루 할 틈이 없다.

4 찰스 후 <동쪽으로 흐르는 강> 그것은 현실일까, 꿈일까. 내가 잃어버린 것은 너였을까, 나였을까. 몽환적인 댄스 장면 그리고 느닷없이 부딪치는 과거와 현실. 신인 감독의 영화라고는 믿어 지지 않는 대담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5 슈치 탈라티 <걸스 윌비 걸스> 사춘기에 접어든 딸과 늦은 나이에 인생의 방황기를 맞은 엄마의 성장기가 섬세하게 그려진다. 선댄스영화제 관객상 수상작.

Asian Cinema
박성호 프로그래머

아시아(동남아시아, 아시아단편)

올해의 경향 다수의 동남아시아 신인 감독이 상상력이 돋보이는 장편영화를 만들었고, 거장들은 현장감으로 가득한 사실주의 영화들을 내놓았다. 동남아시아는 상업영화와 예술영화 시장 모두 빠르게 팽창하는 곳으로, 늘 많은 신예가 탄생해 꾸준히 정보를 수집하며 응원하는 중이다. 10편을 엄선하는 아시아 단편 경쟁 부문은 올해 무려 4천3백여 편의 작품이 출품되며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다. 표현의 자유가 확대되며 ‘나’의 서사에 집중한 작품이 전반적으로 늘어났다.

프로그래머의 기쁨 자유로운 창작자를 응원하되 간섭하지 않고, 훌륭한 작품을 빠르게 알아차리는 것은 물론 현장에 있는 영화인들과 네트워킹하고 격려하는 것이 프로그래머의 일이라고 본다. 눈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영화, 영화인, 영화제를 생각한다. 준비 과정은 지난하지만, 영화를 보며 즐거움을 느끼기에 이 일을 지속할 수 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추억 폐막식의 마지막 순서로 야외극장의 대형 스크린에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 이름이 엔딩 크레디트처럼 올라갈 때, 마음이 뭉클해지며 고마움을 느낀다. 매해 영화 축제의 개최를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는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함께 보고 싶은 영화 따뜻한 영화가 좋다. 보고 나면 잊히지 않는, 많은 생각을 하게 하거나 머릿속에 계속 맴도는 작품을 관객과 나누고 싶다. 이런 영화라면 삶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 힘을 지닐 테니 말이다. 영화는 내 세계관을 넓혀주고, 궁극적으로 나를 성장시키는 촉매다.

1 라브 디아즈 <판토스미아> ‘폭력에 휩싸인 사회에서 개인은 어디까지 저항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베니스 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 초청작.

2 리티 판 <폴포트와의 조우> 거짓된 프로파간다 속에서 기자의 양심을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칸영화제에서 프리미어로 상영했다.

3 툼팔 탐푸볼론 <악어의 눈물> 아들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집착이 되는 충격적인 작품이다.

4두옹 디에 린 <돈 크라이 버터플라이> 바람난 남편을 붙잡으려는 어머니와 이 상황이 답답한 딸의 이야기. 베니스 국제영화제 비평가 주간 초청작.

5 에릭 쿠 <영혼의 여행> 성숙한 감동을 주는,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하는 올해의 폐막작. 이번 영화제를 마무리할 최고의 선택이 될 것이다.

WORLD CINEMA
박도신 프로그래머
영미권(미국,캐나다), 미드나잇 패션

올해의 경향 지난 몇 년간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여성 영화인의 진출이 늘어나고 있음을 체감했다. 작품 수가 증가했을 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크게 향상되었다. 여성 신인 감독들의 활동이 눈에 띄는데, 특히 아리아나 마르티네즈 감독의 <혹시 저를 아세요?>는 대범하고 실험적인 요소와 신인답지 않은 완숙함을 겸비했다.

프로그래머의 기쁨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은 감독이나 배우가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아와 뜨거운 호응을 받을 때가 있다. 머나먼 나라의 관객이 영화를 본 뒤 환호하고, 관객과의 만남(GV) 이후 줄지어 사인을 요청하자 감동을 받는 영화인의 모습은 항상 프로그래머로서 보람을 느끼게 한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추억 지난해 극영화와 다큐멘터리가 혼합된 <본인 출연, 제리>라는 저예산 작품을 선보였다. 감독이 본인의 아버지와 가족이 겪은 이야기를 진솔하게 그렸는데, 당시 온 가족이 부산을 방문했다. 그들은 유명인이 아니었고, 심지어 아버지 역할을 맡은 이는 전문 배우도 아니었다. 그럼에 도 관객의 반응은 너무나 뜨거웠다. 관객에게 둘러싸인 가족의 모습을 보며 참으로 뿌듯했다.

함께 보고 싶은 영화 영화의 기능은 다양하다. 예술성이 강조되기도, 순전히 오락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무엇을 다루든,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 관객이 생각지도 못한, 그럼에도 공감을 자아낼 수 있는 영화를 더 많이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1 션 베이커 <아노라> 2014년 <탠저린>을 선보인 후 꾸준히 연출을 이어온 션 베이커 감독. 그의 작품은 늘 평범함을 거부한다. 그가 왜 세계적으로 사랑받는지 <아노라>를 보며 다시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 제시 아이젠버그 <리얼 페인> 주연과 연출을 함께 맡은 제시 아이젠버그가 배우보다 감독으로서 더 각광받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뛰어난 연출력을 선보인다. 올해 선댄스영화제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작품.

3 수 킴 <마지막 해녀들> 미국 작품이지만 한국 해녀의 이야기를 다룬다. 재미 교포 수 킴 감독의 데뷔작으로, 현재 몇 명 남지 않은 해녀들의 애환을 펼쳐낸다.

4 탁세웅 <괴기열차> 심야 상영을 하는 미드나잇 패션 섹션에 한국 영화가 오른 사례는 드문데, 올해 선정작으로 이름을 올린 웰메이드 저예산 공포영화. 주연을 맡은 주현영의 변신이 큰 재미를 선사한다.

5 알렉스 가랜드 <시빌 워> 미국에서 올해 상반기 개봉해 화제를 모은 영화. 관객을 집중시키는 뛰어난 완성도와 미국 내전이라는 독특한 설정, 사실적인 전투 신이 더없이 훌륭하다.

WORLD CINEMA
서승희 프로그래머
월드(서유럽, 중유럽, 아프리카)

올해의 경향 여성 감독의 작품이 늘어나는 추세가 올해 더욱 돋보인다. 갈라 프레젠테이션으로 선정한 <보르도에 수감된 여인>을 만든 파트리샤 마쥐이를 비롯해 <사랑, 우유, 그리고 치즈>의 루이즈 꾸르보와지에, <미스터 K>의 탈룰라 H. 슈왑, <글로리아!>의 마르게리타 비카리오, <와일드 다이아몬드>의 아가트 리딩거 모두 여성 감독이다. 이들 모두 부산에서 관객과의 대화(GV)를 연다.

프로그래머의 기쁨 프로그램을 준비하며 훌륭한 영화를 선정하는 데 당연히 가장 큰 신경을 기울인다. 더 나아가 좋은 감독과 관객의 만남을 성사시키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초청에도 중점을 둔다. 올해 다수의 유럽 감독들이 부산을 찾아 무척 기쁘다. 개인적으로 미겔 고메스 감독을 그의 작품 DVD를 다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좋아해 특 별전 ‘미겔 고메스, 명랑한 멜랑콜리의 시네아스트’를 즐거운 마음으로 준비했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추억 부산의 수많은 관객 앞에 선 감독이 감동을 받고, 때로는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라주 리 감독의 <레미제라블>과 에마뉘엘 무레 감독의 작품을 야외극장에서 소개했을 때가 문득 떠오른다. 올해 오픈 시네마에서 만날 수 있는 라트비아 감독의 애니 메이션 <플로우>도 자신 있게 권한다.

1 마우라 델페로 <베르밀리오> <모성>으로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했을 때 반응이 좋았던 마우라 델페로 감독의 두 번째 장편. 베니스 국제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았다. 영상미가 뛰어난 작품이니 반드시 극장에서 관람할 것을 권한다.

2 요한 흐리몬프러 <쿠데타의 사운드트랙> 1960년대 재즈와 정치의 연관성을 리드미컬하게 파고든다. 영화 전체가 마치 재즈 교향곡처럼 느껴진다. 비디오 아티스트 로도 잘 알려진 요한 흐리몬프러 감독을 직접 만날 기회.

3 마르게리타 비카리오 <글로리아!> 배우이자 가수인 마르게리타 비카리오 감독의 첫 장편. 뮤지컬 요소가 있는 시대극인데, 무척 통쾌하고 재미있다.

4 파올라 코르텔레시 <우리에게는 아직 내일이 있다> 역대 이탈리아 영화 흥행 10위에 빛나는, 2023년 이탈리아 영화계를 뒤흔든 영화. 첫 장면에서도, 마지막 장면에서도 깜짝 놀라게 될 것이다.

5 뤼도빅 부케르마, 조란 부케르마 <그들 뒤에 남겨진 아이들> 공쿠르상을 받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덕분인지 시나리오가 탄탄하고, 베니스 국제영화제 신인배우상을 수상할 만큼 연기도 좋고, 무엇보다 음악이 훌륭하다. 큰 감동을 안겨줄 영화.

WORLD CINEMA
박가언 프로그래머
월드(중남미, 동유럽), 영미권(영국, 호주)

올해의 경향 전 세계적으로 밀레니얼 세대가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젊은 여성 감독들의 약진이 특히 두드러진 한 해였다. 프로그래머의 기쁨 관객들이 “부산에서 본 그 영화, 정식 개봉하면 좋겠다”라고 말할 때 달콤씁쓸한 감상에 빠지곤 한다. 영화제에서 소개된 후 국내 관객을 다시 만나기 어려운 작품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낯섦 속에서 접점을 찾아내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히고, 타인에 대한 이해와 포용을 기대할 수 있지 않나. 이를 가능케 하는 기회가 더 늘어나기를 바란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추억 2009년, 제14회 부산국제영화제에 프로그래머가 아닌 계약직 스태프로 함께했다. 당시 초청작과 게스트가 갑자기 늘어나 역대 최다 편수를 기록했는데, 일주일 가까이 밤을 새운 뒤 개막일을 맞이했다. 걱정이 앞섰지만, 막상 요트경기장 야외무대에 대형 스크린이 펼쳐지는 광경을 보니 마법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은’ 듯한 순간. 인생의 크고 작은 고비마다 당시 기억을 떠올린다.

함께 보고 싶은 영화 영화를 보는 행위는 태도와 취향의 교집합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닐까. 영화제가 소개하는, 특히 월드 프리미어로 첫선을 보이는 영화 중에는 뾰족한 태도와 뚜렷한 취향을 강조한 작품이 많아 그 절묘한 균형을 충족하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관객은 영화에 담긴 세상을 간접적으로체험하며 새로운 시선을 얻을 수 있지 않나. 그 경험이 즉각 공감이나 변화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유의미한 환기를 가져올 거라고 생각한다.

1 리치 페피아트 <니캡>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라 역설한 백범 김구 선생의 고견을 떠올리게 한다. 한글날 필수 관람작.

2 루나르 루나르손 <빛이 산산이 부서지면> 비극적인 스토리에 가슴이 저미지만 눈과 귀가 행복해지는 80여 분의 ‘시청각 만찬’.

3 루이스 오르테가 <킬 더 자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주인공, 황당함과 기발함을 오가는 전개가 펀하고 쿨하다.

4 룬가노 뇨니 <뿔닭이 되는 것에 대하여> 잠비아가 지구상 어디쯤에 위치하는지 모르더라도, 그곳 여성들의 분노와 체념은 소름 끼치도록 익숙하게 느껴질 것이다.

5 제쓰로 메시 <폴 & 폴레트> 한없이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한 터치로 풀어낸 프렌치 시크 로맨스영화.

KOREAN CINEMA
정한석 프로그래머
한국

올해의 경향 흥미로운 최신 상업영화의 소개와 뛰어난 독립영화의 발굴을 모두 지향한다. 이는 서로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화제라도 껴안아야 할 숙제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전자는 스페셜 프리미어 섹션, 후자는 비전 섹션에 해당한다. 스페셜 프리미어 섹션은 5편을 상영하며 역대 최다 작품 수를 기록했고, 비전 섹션도 올해 10편에서 12편으로 다시 확대했다. 양측 모두 성과가 있어 개막을 기다리는 마음이 흐뭇하다.

프로그래머의 기쁨 내가 좋다고 느낀 작품이 영화계 관계자와 관객에게도 좋은 영화로 다가가고, 그 작품이 관심과 애정을 받고, 작품을 만든 사람들도 화제가 되어 그들에게 더 훌륭한 영화를 만들 기회가 주어지는 순간들을 맞는 게 보람차다. 올해는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데뷔한 감독들이 대거 부산을 다시 찾아오는 해이기도 하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추억 끝날 것 같지 않던 펜데믹 기간이 지나고 영화제의 문을 다시 연 2021년이 기억에 남는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같이 웃고 떠든다는 게 이토록 기쁜 일이었나 싶었다. 영화 축제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감격스러웠던 시간. 함께 보고 싶은 영화 소개하고 싶은 영화가 너무나 많고, 매해 조금씩 다르다. 올해는 ‘호기심’과 ‘이상함’을 지닌 영화를 관객과 나누고자 한다.

1 박송열 <키케가 홈런을 칠거야> 비전 섹션에서 만날 수 있는 박송열 감독의 신작. 안쓰럽고, 그러다 무섭고, 그런데 너무 웃기다.

2 강미자 <봄밤> 주인공이 시 한 편을 낭송한다. 그 시를 찾아 일주일 내내 읽고 또 읽었다. 이 영화가 마치 한 편의 시 같다.

3 박이웅 <아침바다 갈매기는> <불도저에 탄 소녀>를 선보인 박이웅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이 영화를 볼 때, 지겹도록 많이 보고 들은 이야기인데도 갑 자기 눈앞이 흐려졌다. 다시 볼 때도 역시나 비슷했다.

4 최종룡 <수연의 선율> 처음에는 주인공 아이가 불쌍했다. 조금 지나고 나니 아이가 영악해 보였다. 끝날 무렵엔 아이의 얼굴에 세상의 많은 것이 담겨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다다르게 한 영화.

5 이종수 <인서트> 남자와 여자가 영화 현장에서 만나 서로에게 이끌린다. 남자가 여자를 더 좋아해 매달리고 오래 기다린다. 신랄하고도 매력적인 연애담.

WIDE ANGLE
강소원 프로그래머
와이드 앵글

올해의 경향 올해 한국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은 감독의 첫 장편 또는 신예의 작품들로 채워진다. 한국 다큐멘터리계의 지형 변화를 체감하는 흥미로운 장이 될 거라 기대한다. 아시아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에는 나 혹은 가족의 이야기로 출발하는 ‘퍼스널 다큐멘터리’가 많은데, 보다 보편적인 소재를 개인적 차원에서 다뤄 흡인력이 높은 작품을 소개한다.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소개되거나 수상한 작품들로 막강한 라인업을 구축한 다큐멘터리 쇼케이스 섹션도 만족스러운 관람 경험을 안길 것이다.

프로그래머의 기쁨 국제영화제 서킷에 아직 알려 지지 않은 감독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인의 영화를 월드 프리미어로 소개할 때, 그리고 객석의 반응에 고무될 때. 내가 한 일에 대해 칭찬을 받은 듯 뿌듯해진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추억 2022년 개막식에서 양조위 배우가 아시아영화인상을 수상한 현장이 뇌리에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각인되어 있다.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 사운드트랙 중 ‘유메지의 테마’가 흐르는 가운데 야외상영관 스크린에는 양조위의 경력이 그려낸 ‘가장 아름다운 순간’들이 상영되었고, 이후 그가 무대에 올랐다. 내 청춘의 기억과 나란히 자리한 영화와 배우가 눈앞에 나타나 자 가슴이 울렁울렁했다.

1 이토 시오리 <블랙 박스 다이어리> 선댄스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작품으로 토네이도처럼 강력한 다큐멘터리의 힘을 입증한다. 초청이 확정될 때까지 가장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마음을 졸였던, 놓칠 수 없었던 영화.

2 왕빙 <청춘(하드 타임즈)>, <청춘(홈커밍)> 왕빙 감독은 ‘좋은 사람이 좋은 영화를 만든다’는 말을 증명하며 현대 아시아 다큐멘터리계의 신화가 되어가고 있다. 지난해 상영한 <청춘(봄)>에 이어 그의 3부작 중 2, 3편을 함께 소개한다.

3 이소정 <모든 점> 심상치 않은 단편들을 만들어온 이소정 감독의 첫 장편 다큐멘터리. 매 숏이 영감을 안겨주고, 모든 순간이 매혹적이다. 신비하고 미스터리한 체험을 선사할 작품.

4 손구용 <공원에서> 소음으로부터 평정을 유지하며 자신의 우주를 조금씩 확장해가는, 시적인 정취가 가득하고 다정한 영화. 이 작품을 보면 마음이 맑아진다. 감독도 영화와 꼭 닮은 사람일 것 같다.

5 쇼날리 보스 <플라이 온 더 월> 안락사라는 테마를 생의 찬가로 뒤바꿔놓는 예상 밖의 영화. 많은 생각과 복잡한 감정은 영화가 끝난 뒤에 몰려든다.

Community BIFF
정미 프로그래머
커뮤니티 비프

올해의 경향 ‘미래’, ‘풍류’, ‘청춘’. 우리 문화의 근본을 이루는 풍류를 바탕으로 다음 세대를 위한 신명 나는 판을 깔고자 했다. 심야 상영 ‘취생몽사1: 오리지널(올나잇)’을 잇는 ‘취생몽사2: 한성파티시네마’를 신설했고, 에픽하이를 비롯한 뮤지션과 소설가의 참여도 돋보인다. 극장이 공연장이나 강의실이 되고, 지역 명소가 상영관이 되는 우연을 통해 희열을 느끼기를 바란다.

프로그래머의 기쁨 좋은 사람들과 어울리며 새로운 것들을 배울 수 있기에 이 일을 지속해왔다. 진심을 다해 마련한 영화 축제를 찾아온 관객들이 매년 가을이면 떠올리는, 동창회 같은 영화제를 기대한다.

부산국제영화제의 추억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당시 월드 시네마 코디네이터였는데, 매일 저녁 남포동과 해운대를 오가는 셔틀 여객선을 탔다. 제23회 때 커뮤니티비프를 신설하며 이를 재현하고 싶었지만 꿈으로만 남았다. 그사이의 22년 동안, 묵묵히 우리를 도와주신 안성기 선배님이 떠오른다. 이후에도 영화제는 새로운 시도를 이어갔다. 그게 관객의 마음 깊이 남았다면, 초창기부터 함께해준 게스트와 스태프들 덕분일 것이다.

함께 보고 싶은 영화 인생이 ‘나’의 고유함을 알아가는 연습이라면, 영화만큼 도움이 되는 건 없다. 두 시간 남짓한 대리 체험은 내가 모르는 세계를 알려주며 일상을 새롭게 탄생시킨다. 영화를 만든 사람들의 목소리, 분위기, 비전이 녹아든 작품들을 나누고 싶다.

1 J짐 샤먼 <록키 호러 픽쳐 쇼> 반복 관람, 코스프레, 싱어롱 등 관객 참여 문화를 새로 쓴 컬트 고전으로 ‘취생몽사2’에서 상영한다. 수전 서랜던의 풋풋한 얼굴, 모그의 음악, 구혜선 배우와의 토크로 마무 리되는 한 편의 무도회.

2 김다민 <막걸리가 알려줄거야> 독특한 질문, 기발한 상상이 톡 쏘는 듯한 경쾌함을 느끼게 한다. 온 가족을 위한 성장영화.

3 안톤 코르빈 <힙노시스: LP 커버의 전설> 음반 커버 디자인 스튜디오 ‘힙노시스’의 천재들 못지않게 대단한 감독의 재능과 제작자의 진심이 느껴진다. 상영 후 장정일 작가와 함께 영원한 록을 재조명한다.

4 박근영 <정말 먼 곳> 청춘영화 <청설>로 부산을 찾는 배우 홍경의 첫 주연작. 강원도의 풍광, 독립영화를 이끄는 배우들과 제작진의 뒷받침에 힘입어 홍경의 시대를 예고한다.

5 블라인드시네마 정성일, 신형철 평론가가 각각 고른 영화를 아무 정보 없이 연속 관람하는 시간. 상영 후 이어지는 대화까지 장장 6시간이 소요되는, 우리나라 영화 비평사의 기념비적인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