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革新):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함.’
30주년을 앞둔 변화의 대열 앞, 기수로 호명된 세 사람을 만났다.

박도신 집행위원장 직무대행

지난해 12월부터 부산국제영화제는 신임 집행부 및 이사회 구성 선임을 위해 부산국제영화제 임원추천위원회를 조직하고 활동했다. 혁신을 목표로 한 영화제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합의해 실현할 리더의 자리는 어느 공석보다 신중히 채워져야 했다. 실무를 실행해야 하는 역할이니만큼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깊은 이해와 식견, 애정도 필요했다. 두 차례에 걸쳐 공모했지만 적임자를 찾지 못했다. 영화제를 6개월 앞둔 지난 4월, 가장 이상적인 구원투수로 박도신 집행위원장 직무대행이 호명되었다. 그간 부산국제영화제 영미권 프로그래머로 활동한 박도신 집행위원장 직무대행은 지난 2001년 계약직 스태프로 시작해 프로그램실장, 홍보실장, 선임 프로그래머, 지석영화연구소 소장 등을 역임하며 24년간 부산국제영화제와 함께해온 이다. 이는 곧 그가 부산국제영화제가 정치적 외압을 견디고, 영화제의 버팀목이던 김지석 수석 프로그래머를 갑작스럽게 잃은 아픈 시간을 겪어냈으며, 전 세계인의 발이 묶였던 팬데믹의 위기를 돌파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위기를 대처하는 태도에도 내성은 생긴다. 우리는 위기로 성장하니까. 그가 집행위원장 직무대행으로 선출된 데 대해 영화제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수긍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긴 시간 영화제의 실무를 고루 경험하고, 영화 산업 전반에 대한 이해와 네트워크를 겸비해 대내외적으로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는 그는 이제 집행위원장 직무대행으로서 초청작 선정과 영화제 행사 기획 전반을 맡아 올해의 영화제를 이끌어가는 중이다.

집행위원장 직무대행 임명 소식을 듣고 놀랐습니다. 조금 갑작스러우셨을 것 같습니다.

임원추천위원회를 꾸리고 두 번에 걸쳐 집행위원장을 공모했는데 두 번 다 해당자 없음이 나와서 의외였죠. 생각을 전혀 안 하고 있던 차에 두 번째 공모에서도 해당자 없음이 나오자 이사장님으로 부터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고민하다가 지금 우리가 과도기라 할 시기를 겪는 중이고, 추가로 다시 공모를 하기에는 시간 여유가 없기 때문에 임시로 맡기로 했습니다.

집행위원장 직무대행으로서 지난 5개월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프로그래머의 일과 행정가의 일이 다르다는 걸 실감하는 시간이었을 것 같습니다.

많이 다르죠. 프로그래머로만 일할 때는 영미권, ‘미드나잇 패션’이라는 심야 상영을 담당했어요. 지석영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었고요. 그때는 맡은 분야만 신경 쓰면 되잖아요. 전체적인 프로그래머 회의, 집행부 회의에도 가끔 참석했지만, 집행위원장 직무대행이라는 자리는 전체를 봐야 하니까요. 영화제에 오래 소속돼 있었기 때문에 집행위원장 직무대행으로서 해야 할 세부 업무를 어느 정도 예상했는데도 처음에는 적응이 잘 안 됐죠. 일하는 범위, 신경 써야 하는 영역, 함께 논의해 결정해야 하는 부분 등이 대폭 늘었으니까요.

그 와중에 영미권 프로그래머와 집행위원장 직무대행 직무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거죠?

영미권 프로그래머로 그간 영어를 쓰는 모든 나라를 커버했거든요. 그런데 올해는 이를 다 소화하기 어려워 미국과 캐나다만 담당하는 것으로 축소했습니다. 그 외 영국과 아일랜드, 호주와 뉴질랜드는 박가언 프로그래머에게 일임하고요. 집행위원장 직무대행으로서 프로그래밍을 한다고 보면 되죠.

영화제 운영 면에서 부산국제영화제의 DNA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집행위원장의 장단점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익히 잘 알기에 경계해야 할 부분도 있을 테고요.

과정 면에서는 영화제에 대해 전혀 모르는 분보다 낫기는 하겠죠. 하지만 영화제를 잘 모르더라도 확실한 비전이 있다면 그 또한 영화제에 도움이 될 거라 봅니다. 말씀하신 대로 영화제를 잘 안다는 것이 장점일 수 있지만 단점이 될 수도 있거든요.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부분을 새로운 시야로 보기도 해야 할 테고요. 지금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정상화로 가는 길목에 있다고 봅니다. 내년에 새 집행위원장님이 오시기 전까지 안정적으로 운영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획기적인 변화를 꾀하기보다 지금 이 상황에서 영화제가 무사히 치러질 수 있도록 제 역할을 다하려 마음먹고 있습니다.

2001년 처음 부산국제영화제에 합류해 24년간 근무했습니다. 영화제에 대한 애정이 누구보다 강하리라 짐작됩니다. 프로그래머로서 세계 여러 영화제를 다니며 느낀, 부산국제영화제만이 가진 것은 무엇이라 생각하시나요?

부산국제영화제의 정체성이자 대표적 성공 요인이라면 아시아 영화의 중심 역할을 한다는 것일 겁니다. 1990년대만 하더라도 아시아 영화를 집중적으로 볼 수 있는 영화제가 드물었어요. 홍콩과 도쿄의 국제영화제가 있었지만, 신인 감독과 독립영화에 체계적인 섹션을 만들어 주목한 영화제는 없었습니다. 당시 영화 산업 종사자나 평론가들이 획기적이라 평가했죠. 그 정체성은 지금도 여전하고요. 예전만큼 아시아 영화 중심으로 운영하는 것은 아니지만, 변화하지 말아야 할 핵심 축은 여전히 아시아 영화여야 한다고 봅니다.

지아장커 등 부산에서 주목한 아시아 감독들이 이제는 세계적인 거장이 되었죠. 그런 발견을 위한 시도가 계속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고 보십니까?

영화제 초창기에 비해 상황이 많이 달라졌죠. 우리도 그 목표를 지향할 예정이지만 1990년대만 해도 영화제에서 소개되는 것만으로도 프로모션 효과가 상당히 컸습니다. 벌써 30년 전 얘기인데 영화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영화가 많았죠. 젊은 감독들이 영화를 상영하고, 관객을 만나고, 매체와 연결돼 자신을 알리는 판로가 적었고요. 부산국제영화제가 이 역할에 큰 비중을 두고 운영되었는데 시대가 변하고, 지금은 영화 보기가 훨씬 쉬워졌죠. 무엇보다 극장에서 영화 보는 분이 점점 줄고, 예술영화나 독립영화에 대한 관심도 예전에 비해 많이 떨어졌습니다. 그 변화에 따라 영화제도 여러 정책을 바꾸고 모색해야 하는 거죠. 감독들이 부산을 찾았을 때 단순히 영화 프로모션을 넘어 산업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루트를 마련하기 위해 지난 2~3년간 노력했습니다. 실험적이기도 하고, 예산 문제도 있어서 과감히 시도하지 못했는데요. 앞으로는 이 부분에 더 투자해 상영만 하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든, 작품이든, 스토리만이든 여러 형태의 연결 고리를 만들고자 합니다. 요즘 한국 콘텐츠가 인기가 많지 않습니까. 젊은 감독들이 글로벌 인더스트리에 알려질 수 있도록 하는 데 필요한 역할을 하고자 합니다.

브라운 터틀넥 스웨터, 팬츠, 더비 슈즈 모두 Loro Piana.

지금의 부산국제영화제가 지켜야 할 것, 변화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앞서 이야기한, 아시아 영화의 중심축이라는 정체성만큼은 지켜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도 아시아 영화가 미주나 유럽 영화에 비하면 세계 무대에 진출할 기회가 적은 것이 사실이죠. 이 간극을 줄이는 것이 저희 목표입니다. 방법론적 변화 또한 도모하려 합니다. 단순히 아시아 국가끼리 협력하기보다 미국 등 영향력 있는 인더스트리를 끌어들이는 것이죠. OTT 등으로 인해 지금 콘텐츠 전쟁 중이에요. 좋은 콘텐츠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재능 있는 감독도 있어야 하지만 좋은 스토리도 필요합니다. 작품 자체도 세계적으로 배급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하고요. 이런 노력을 더욱 더 확대하며 변화할 예정입니다.

그 일환으로 올해 새롭게 선보이는 프로그램이나 행사를 기획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올해부터 다큐멘터리 장르의 대중적 확장을 도모하고자 ‘다큐멘터리 관객상’을 신설했습니다. 와이드 앵글: 다큐멘터리 경쟁 부문은 차별화된 비전과 독창적 시각을 지닌 다큐멘터리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으로 이 중 한 편을 가려 시상할 예정입니다. 매년 우수한 다큐멘터리 작품과 창작자를 발굴해 선보인 이 섹션에서 관객이 투표로 직접 선정하는 만큼 다큐멘터리가 보다 친숙한 장르로 관객과 만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는 영화 산업에서 여성의 위상을 높이고 문화 예술적 기여를 이끌어내기 위해 샤넬과 함께 ‘까멜리아상’을 마련했습니다. 아시아의 여성 영화인, 혹은 여성 영화인이 발돋움할 수 있도록 기여한 인물이 수상 대상자입니다. 전통적 규범과 사고에 도전하고, 아시아 영화에 공헌한 분들을 치하하는 상을 신설한 것이 지난해와 달라진 점입니다.

영화제가 추구하는 바는 매해 같으면서도 다를 것 같습니다.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는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까?

안정적인 운영 그리고 30주년을 위한 준비입니다. 지금까지 해온 것을 점검하고 변화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야겠지요. 30주년 관련 회의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보여주기식 이벤트보다는 현실적으로 영화제가 바뀌어야 할 부분을 중점적으로 고려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있습니다.

개막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이번 영화제가 ‘잘 마무리되었다’는 말을 어떻게 정의하고 싶으신가요?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항상 조마조마합니다. 프로그래머일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지금은 말할 것도 없고요. 매해 영화제가 끝날 때쯤에는 ‘걱정했던 것이 다 기우였구나’ 하고 느낍니다. 중요한 게스트가 왔을 때, 대규모 행사를 치를 때 걱정도 많이 되는데요. 매해 영화제 게스트와 관객들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서 이야기한 부산국제영화제만의 강점 중 하나를 덧붙이자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는 관객입니다. 부산을 찾는 여러 감독과 배우, 관계자들에게 큰 호응으로 화답을 해주셨기에 많은 감독과 배우들이 찾는 영화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작은 규모의 영화에서 관객들의 뜨거운 반응이 나올 때 큰 보람을 느낍니다. 잘 알지 못하는 감독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영화를 재미있게 보면 상영 후 사인을 받거나 사진을 찍는 등 적극적으로 호의를 표시하는 관객이 부산에는 참 많습니다. 감독 입장에서는 본인이 한국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만큼 과연 관객이 자신의 영화를 좋아할지 걱정하게 되는데요. 상영 후 GV(관객과의 대화)를 마치고 나면 그 걱정이, 생각이 싹 바뀌는 모습을 옆에서 자주 목격합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 뿌듯하죠. 부산국제영화제에 열정적인 관객이 계속 찾아주신다면 올해 영화제도 성공하리라고 봅니다. 영화인과 관객이 만나 즐거운 자리를 갖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해요.

마지막으로 프로그래머로서 올해 부산에서 단 한 편의 영화를 봐야 한다면 어떤 영화를 추천하고 싶으신가요?

단 한 편을 고르기는 너무 어렵네요. 전략적 추천작과 개인적 추천작이 있는데요….

그렇다면 두 작품을 꼽아주시겠어요?(웃음)

전략적으로는(웃음) 가장 큰 극장에서 상영하는 ‘오픈 시네마’ 섹션의 작품 <시빌 워>를 추천합니다. 영화를 관심 있게 보는 분이라면 다 아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독립영화 제작사 A24의 작품입니다. 올 상반기에 미국에서 상영했는데 A24 자체 흥행 기록을 갈아치운 영화입니다. 주류 영화가 아님에도 박스오피스 1위까지 오른 저력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주제도 굉장히 특이하고요. 무엇보다 큰 스크린에서 보면 굉장히 좋을 작품입니다. 또 다른 작품은 션 베이커 감독의 <아 노라>입니다. 올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에요. 션 베이커 감독은 정형화되고 있는 상업영화에서는 볼 수 없는,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만들어온 감독이죠. <아노라>는 션 베이커 감독이 독립영화 감독으로서 왜 미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사랑과 지지를 받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 다른 영화들이 불쑥불쑥 떠오르네요. 추천작을 묻는 질문이 늘 참 곤란합니다. 진짜 더 많은데.(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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