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革新):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함.’
30주년을 앞둔 변화의 대열 앞, 기수로 호명된 세 사람을 만났다.
김영덕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 위원장
부산국제영화제가 관객과 영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한편에서는 콘텐츠 산업 종사자들이 모여 후일을 도모하는 열띤 장이 열린다. 바로 영화·영상 콘텐츠부터 도서, 웹툰, 웹소설, 스토리 등을 총망라한 거래의 장,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Asian Contents & Film Market, 이하 ACFM)이다. 이곳에서는 콘텐츠를 사고파는 일뿐만 아니라 생산적인 네트워킹이 이뤄지고, 나아가 한국과 아시아 콘텐츠 산업의 현재와 미래를 조망할 수 있는 기회들이 펼쳐진다.
2006년에 처음 시작해 지금은 아시아 최대 규모의 마켓으로 성장한 ACFM의 새 수장으로 김영덕 위원장이 부산에 합류했다. 일찍이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밍팀장, 기획팀장으로 영화제와 함께했으며, 2006년 ACFM의 전신인 아시아필름마켓의 준비 TF팀과 초대 마케팅팀장을 맡아 ACFM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이후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와 제55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된 <크라이 우먼>(2002)을 시작으로 <밤과 낮>(2008), <하나안>(2011), <미싱타는 여자들>(2020) 등 해외 유수의 영화제에 공식 초청되며 화제를 모은 작품의 제작에 참여하며 영화의 기획과 투자·배급, 해외 마케팅 등 다방면에서 활약해왔다.
최근까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로 활동하며 풍부한 네트워크를 쌓아온 김영덕 위원장은 마켓 운영과 콘텐츠 산업 전반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ACFM의 새로운 챕터를 열고자 한다. 한 시간가량 대화가 이어지는 내내 그에게서 출발선 앞에 선 사람 특유의 기대와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장대하면서도 세밀한 비전을 듣는 동안 부산국제영화제의 내일이 생생히 펼쳐졌다.
18년 만에 다시 부산국제영화제로 돌아왔습니다. 영화제에 다시 합류한 지금의 감회가 궁금합니다.
문화학교 서울에서 영어 자막 번역 일을 하는 등 영화 안에 몸담고 있었지만, 정식으로 월급을 받고 일을 한 건 부산국제영화제가 처음이었어요. 앞으로 4년 뒤 임기를 마치면 제가 60세가 되거든요. 돌아보니 부산국제영화제가 나의 시작과 끝인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서사에서 부산국제영화제의 지분이 굉장히 크고, 의미 깊어요. 그래서 지난 18년간 이런저런 부침을 겪는 영화제를 가슴 아프게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최근에는 리더십의 부재로 영화제가 다시 위기를 겪었죠.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많이 배우고 성장한 이로서 마지막으로 영화제가 변화하고, 다시 부흥하는 데 일조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부산에 왔습니다.
이 인터뷰 기사를 읽는 일반 독자와 관객에게 ACFM은 다소 낯설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ACFM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습니까?
ACFM은 영화 산업 관계자들, 영화 산업에 특화된 전문가들이 모이는 B2B(Business to Business) 행사입니다. 영화제가 훌륭한 영화를 선별해 관객에게 보여주는 곳이라면 마켓은 글로벌 무대에서 콘텐츠를 사고파는 거래가 가능한 플랫폼 역할을 하고 있어요. 참가하는 기업에 기회를 주는 곳이라 할 수 있죠. 다양한 영화 산업 종사자의 네트워크가 형성되고, 산업 동향을 파악하는 등 영화 산업의 든든한 베이스가 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전시나 이벤트 성격이 강한 일반 필름 마켓에 비해 영화제 마켓은 영화와 관련한 보다 다양하고 폭넓은 전문가들이 참가합니다. 영화제와 마켓 두 행사에 함께 참가하기 위해 오는 분이 많아요. 이것이 영화제가 여는 마켓의 장점이죠.
이밖에도 ACFM은 인큐베이팅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ACFM의 지원을 받아 완성한 많은 작품이 영화제에서 관객을 만나고 있죠.
맞습니다. APM(아시아프로젝트마켓)에서는 영화가 만들어지기 전 기획 및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 투자자와 제작 파트너를 만날 수 있도록 돕는 동시에 신진 감독이 데뷔할 수 있는 무대의 역할도 하고 있습니다. ACF(아시아영화펀드)는 직접적으로 지원 공모를 하는 펀드도 운영하고 있고요. 부산스토리마켓도 주목받고 있어요. 영화 산업이 변화하면서 그에 발맞춰 마켓도 다방면으로 확장하는 중입니다. 단순히 완성된 영화를 거래하는 기능을 넘어선 것이죠. 부산스토리마켓은 콘텐츠 플랫폼 CP(Content Provider) 간의 원천 IP 거래 시장이에요. 지금은 먼저 원작 IP를 확보하는 게 중요하거든요. 앞으로 원작과 제작이라는 부분이 굉장히 중요해질 거라고 봐요. 완성된 영화가 아니라 영화의 설계도를 사고파는 것이죠.
이렇듯 ACFM 내에서도 다양한 섹터가 존재하는데요. 그 가운데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의 역할은 무엇이라 보십니까?
어떤 면에서 마켓은 그리 복잡한 일은 아닙니다. 국가기관과 여러 협회에서 이런 영화 산업 관련 행사를 하고 있지만 본질적 차이는 ‘누가 참가하는가’, 그리고 그들에게 ‘어떤 콘텐츠와 정보를 제공하는가’에서 만들어집니다. 참가 주체와 그 내용이 마켓의 차별성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니 마켓 위원장은 참가자에 대해 분석하고, 이들을 연결할 강한 네트워크를 확보해야 합니다. 위원장을 비롯해 마켓의 모든 스태프가 영화 산업과 관련한 정보 모니터링에 충실해야 하고요. 특히 리더는 이에 대해 더 깊이 있는 정보를 끊임없이 체크하고, 필요에 따라 다른 전문가들과 소통하는 데도 열린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가령 AI 기술이 화두인 지금 모니터링을 통해 어떤 업체가 AI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투자를 받았는지 정보를 빠르게 파악해야 하며 나아가 해당 정보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의미 있다고 판단했다면 이를 마켓으로 끌어들일 수도 있는 네트워크를 동원할 수 있어야 하죠.
급변하는 콘텐츠 산업 환경에 발맞춰 올해 새로 시작하는 프로젝트도 있습니까?
국제 공동 제작과 파이낸싱을 위한 새로운 네트워킹 플랫폼 ‘프로듀서허브 (Producer Hub)’를 신설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완성된 영화에 대한 판권 거래 중심에서 제작자와 창작자 중심으로 콘텐츠 마켓의 거래 비중이 옮겨가면서 국제 공동 제작과 파이낸싱의 중요성도 커지고 있습니다. 프로듀서허브를 통해 글로벌 프로듀서들이 영화제작 환경 변화, 국가별 시장 경향을 공유하고, 투자를 비롯해 제작, 촬영, 지원 사업 등에 관한 정보를 나눌 수 있는 여러 세션을 열고자 합니다. 이와 더불어 매년 ‘올해의 국가(Focus Country)’를 선정해 해당 국가의 프로듀서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형식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첫 올해의 국가는 개최지인 한국입니다. 한국 영화가 위기라고 하는데, 보다 자세히 말하면 투자가 되지 않는 것이 위기입니다. 한국에는 좋은 시나리오도, 인재도 많습니다. 일종의 포화 상태에 이른 한국 영화의 자원을 수출해야 할 시점이 온 것이죠. 한국 콘텐츠와 인력을 확산하려면 프로듀서들이 기획력을 가지고 해외 파트너를 직접적으로 만나고, 해외 펀딩을 적극적으로 찾아나서야 합니다. 이게 유능한 프로듀서가 해야 하는 일이거든요.
어느 섹터보다 산업의 동시대성을 반영해야 하는 프로젝트입니다.
그래서 올해 가장 힘을 실어주고, 질적으로 강화한 것이 콘퍼런스입니다. 동시대성을 생각하며 오늘에 대한 논의를 나누고, 나아가 한발 앞서 미래를 보여주는 자리가 될 겁니다. 콘퍼런스에서는 긍정적 비전을 보여줄 수 있는 전문가를 얼마나 섭외하느냐가 관건인데, 라인업이 훌륭합니다. AI 콘퍼런스에서는 마이크로소프트, 이미지 생성 AI 모델 스테이블 디퓨전(Stable Diffusion), AI 동영상 생성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연 런웨이(Runway) 등이 함께합니다. 단순히 생성형 AI를 소개하는 것을 넘어 현재 영화 산업 안에 AI 기술이 어디까지 도입되었는지, 그리고 이로 인해 산업 전체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실제 워크플로우에서 무엇이 개선되고 진화하고 있는지를 보다 산업적 관점에서 정보를 나누는 것이죠. 직접 시연도 하고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4년의 임기 내에 무엇을 이루고 싶으신지요?
이루고 싶은 것이 많지만, 올해는 아쉬운 대로 콘퍼런스를 통해 ‘이런 거 재미있지 않나요?’ 하고 혁신적 콘텐츠를 맛보기로 보여드리고, 내년에는 실제로 구현하고 있는 업체들이 부스를 만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런 집단적 동의가 형성되면 예산을 늘려 미래 기술과 관련한 콘퍼런스를 추가 확대하고요. 지금 자본이 막 섞이고 있어요. AI 회사가 영화 산업에 투자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A24가 오픈 AI에게서 엄청난 돈을 투자받았어요. 아무래도 산업 형성 초기다 보니 AI 회사와 영화제작사가 거래하는 과정에서 어떤 것에 가치를 둬야 하는지, 어떤 권리를 나눠 가져야 하는지 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처음 시작되는 일에는 여러 산업의 종사자들이 모여 룰 세팅을 할 필요가 있는데, ACFM이 바로 그 논의의 장이 되는 것이죠. 이 과정에서 각자 기회도 찾고요. 이런 혁신 플랫폼이 생기면 콘텐츠에 관심 있는 많은 혁신 기업을 유치해 서로 교류하게 하고, 산업의 위기를 극복할 획기적인 아이디어도 이끌어내는 등 긍정적인 움직임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봅니다. 이를 위한 동기부여와 계기를 마켓에서 찾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지금까지 평생 배운 것을 여기에 다 쏟아붓고 있어요.
오늘 말씀을 듣고 나니 마켓이 단순히 콘텐츠와 콘텐츠 재료를 사고파는 곳이 아니네요.
생태계의 오아시스다.(웃음)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고, 목이 마르고, 정보도 얻고 싶잖아요. 1년에 한 번 부산에 와서 목도 축이고, 사람들과 명함도 주고받고, 낙타도 쓰다듬다가 다시 각자의 길을 떠나는. 그런 오아시스 같은 곳 같아요.
임기 동안 이루고 싶은 개인적인 바람도 있습니까?
마켓 자체의 변화도 있어야겠지만 사람들이 조금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함께 일하는 모든 분들이 ‘내가 이렇게 크고 멋진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도록 제가 더 열심해 일해야겠죠. 이런 다양한 프로젝트를 하면서 마켓만 성장하고 구성원들은 일만 많아지는 게 아니라, 이를 통해 4년 후에는 마켓에서 아주 유능한 전문가가 양성되어 있었으면 합니다. 그저 소모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성장하는 곳이 되었으면 해요. 제게 부산국제영화제가 보다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한 시발점이 되었던 것처럼요. 이곳을 발판 삼아 바깥에 나가 제작도 하고, 해외 진출도 하는 등 자기 성장과 교육의 과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4년 뒤에는 많은 사람이 바뀌어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게 4년 뒤면 정이 들었겠죠. 부천(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도 8년간 일하고 눈물 흘리면서 나왔는데.(웃음)
위원장님은 부산국제영화제의 어떤 점을 사랑하시나요? 위원장님에게 부산국제영화제는 어떤 곳인가요? 나아가 어떤 곳이 되길 바라는지요?
제게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시작되던 초기 모습이 기억에 많이 남아 있어요. 근데 그게 다 옛날 이야기가 되어버려서요.(웃음) 두 가지가 있었던 것 같아요. 첫째는 사람들이 영화를 통해 넓은 세상을 경험하길 원했어요. 둘째는 영화를 만들 때 거침없는 표현이 이뤄지기를 바랐죠. 나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뒤집을 수 있는 영화적 체험을 원하는 많은 사람의 집단적 열망이 부산국제영화제의 성공을 이끌었다고 생각해요. 영화제의 제도가 시스템화되고 수십 년을 지나오면서 그 정신도 늙어간 것 같아요. 그때의 사람들도 다 늙어갔죠. 그렇다면 지금의 사람들에게 영화제는 어떤 의미일까요? 저는 이게 우리의 숙제 같아요. 영화제가 그들에게 무엇이 될 수 있을지, 되는지에 대한 각자의 스토리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영화제는 행복을 주는 곳이어야 해요. 단순한 즐거움 이상의, 인식의 충격을 줄 수도 있는 곳이어야 하고요. 그래서 부산국제영화제의 스태프들도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누군가에게 행복을 주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이 되길 바라요. 일하다 보면 다들 스트레스에 짜부라지는데(웃음) 영화제는 다른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는 일이라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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