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革新): 묵은 풍속,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함.’
30주년을 앞둔 변화의 대열 앞, 기수로 호명된 세 사람을 만났다.

박광수 이사장

“부산국제영화제가 갖는 가치와 위상은 더 첨언할 필요가 없을 만큼 수없이 인정받고 드높은 것이었다.” 지난 1월, 5개월 동안 부산국제영화제의 정상화를 위해 조직되었던 혁신위원회가 역할을 다하고 해산하며 남긴 글의 첫 문장이다. 부산국제영화제 내부의 열망으로 시작된 이 혁신의 초석이 부산국제영화제에 대한 자부심과 깊은 사랑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과거를 아프게 반성하고, 오늘을 추슬러 내일로 나아가는 동력 역시 그 자부심과 사랑일 것이다.

지난해 7월 부산국제영화제의 내부 갈등이 극에 달하던 때 부산국제영화제 혁신위원회가 조직됐다. 조직 타이틀대로 ‘혁신’을 위한 인사가 단행되었다. 전원 합의로 박광수 감독을 신임 이사장 단독 후보로 추대했고, 이내 만장일치로 임명했다. 박광수 이사장 임명의 이유에 대해 혁신위는 “영화제의 미래 비전과 방향 제시가 가능하며, 영화제에 대한 혁신 의지, 국제영화제와 국내외 네트워크에 대한 깊은 식견, 영화인들의 두터운 신망, 부산에 대한 애정을 가진 이로서 충분한 자격 요건을 갖췄다”고 밝혔다.

박광수 이사장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에 걸쳐 <칠수와 만수> <그들도 우리처럼> <그 섬에 가고 싶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등을 연출하며 한국 영화 뉴웨이브 열풍을 이끈 주역으로 이창동, 허진호, 김성수, 오승욱 감독 등이 그의 연출부를 거치며 ‘감독의 감독’으로 불리는 이다. 1980년대에 드물게 파리 유학을 다녀왔고, 한국 영화의 해외 영화제 초청 사례가 전무한 때에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받으며 쌓은 그의 식견 덕분에 부산국제영화제 창립의 실질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특히 부산프로모션플랜(현 아시아프로젝트마켓)과 아시아필름마켓(현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을 발족시킨 아시아 영화 산업화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몇 차례의 사양 끝에 그가 다시 부산에 돌아왔다. 지난 5개월은 그에게 어떤 시간이었을까. 다시 돌아온 감회를 물으며 애틋한 대답을 기대했지만 대부분의 사안에 대해 그는 부산국제영화제를 누구보다 엄중하고 엄격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정확한 객관성이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그가 임기 내에 이룩할 혁신의 조각이 언뜻언뜻 빛을 냈다.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직 제안을 사양하다 수락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끝내 수락하신 건가요?

부산국제영화제뿐만 아니라 다른 영화제에서도 제안이 있었지만 다 사양했었죠. 영화사와 계약하고 계속 내 영화를 만들고 있었어요. 그러다 어느 날 혁신위원회에서 몇 사람이 찾아왔는데, 그때 성지혜 감독이라고 제 영화 연출부에도 있던 이가 같이 왔더라고요. 그 친구가 전화해서 만난 거였어요. 이사장직에 대한 내 반응이 호의적이지 않으니까 그 친구가 나선 것 같아요. 상당히 많은 사람이 영화제를 정상화하기 위해 엄청나게 싸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영화제와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이렇게 애쓰고 있는데 감독님의 반응이 이러면 곤란하지 않으냐고. 그간 잘 몰랐던 당시의 내부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좀 받았어요. 부산국제영화제를 처음 만든 사람이자 상당 기간 일했던 사람으로서 마음에 걸렸죠. (이사장직의) 대안이 없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도 별 대안이 없을 것 같은 거죠.(웃음)

지난 5개월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셨는지 궁금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그동안 욕을 많이 먹고 있었더라고요. 언론의 기사를 찾아보니 비판하는 내용이 꽤 있어요. 무엇 때문에, 왜 이렇게 문제가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 다음 단계를 어떻게 해나갈 거 아니에요. 5개월 동안 영화제를 자세히 들여다봤어요. 영화제를 운영하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 객관적 실체를 파악하려고 노력했죠. 2월 부임 당시에는 프로그램 등 주요 내용이나 방향은 설정된 상황이었어요. 영화제를 잘해나가기 위해서는 시간을 좀 가져야겠다 싶어 올해는 지켜보는 쪽으로 방향을 결정했어요.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더라도 그 안에 맞는 게 있을 수 있으니까요.

가장 변화해야 하는 것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영화제와 영화는 같은 궤적에서 움직이죠. 한국 영화는 많이 변화했습니다. 경쟁도 심하고요. 하지만 영화제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아요. 최근 10년 이상 정체돼 있었던 것으로 보여요. 30여년 전, 부산국제영화제를 처음 개최할 때 5명이 시작했는데 그 초창기 5명 중 그만두고 나간 사람은 저밖에 없거든요. 세대교체 시기를 놓친 느낌이 있어요. 그래서 지금이라도 더 큰 변화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특히 인력 구조의 문제점을 보고 있어요. 무엇보다 영화제는 새로운 감각으로 훈련된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가며 선순환이 이뤄져야 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 창립 주역으로 영화제의 실질적 기반을 다지셨습니다. 그 시작을 기억하시나요?

당시 한국에서 드물게 해외 영화제에 많이 다니는 감독 중 하나였어요. 여러 영화제를 다니다 보니 외국 평론가들이 제 영화에 대해 글도 쓰고 평가하는데 어느 순간 ‘이 사람이 한국에 대해 알기는 하나?’ 하는 불만이 생기더라고요. 한국 감독이 한국에서 촬영한 영화이니 한국의 역사와 사회 상황 등의 맥락을 이해하고 평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잖아요. 외려 외국에서 부각한 걸 한국에서 다시 가져다 쓰는 모습을 보면서 한국에도 영화제가 있어야겠다 싶었어요. 우리 영화를 우리 스스로 평가하고, 남의 영화도 평가해주는 우리 영화제가요. 그러던 차에 영화제를 만들자는 연락이 온 거예요.

그렇게 1996년 제1회 부산국제영화제 부위원장을 역임하며 부산과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당시는 극장 문화에 대한 시민 의식이 높지 않던 때예요. 영화 상영 도중에도 수시로 문이 열렸죠. 제대로 된 극장도 없었기 때문에 여러 제반 조건을 가늠하면 큰 국제영화제를 개최하기에는 아직 역량이 부족해 보였어요. 그래서 아시아 중심 영화제로 가닥을 잡았고요. 당시 아시아에서 분명한 자기 방향성을 갖고 운영하는 영화제가 드물었어요. 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권위적이고 부패도 심했죠. 민주주의가 성숙하지 못한 나라가 많고, 무엇보다 검열이 있었어요. 검열이 있으면 제대로 된 영화제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당시 부산국제영화제는 김동호 집행위원장이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면서 부산국제영화제 출품작의 검열을 없애는 데 합의를 이끌어냈어요. 그것이 부산국제영화제가 성공한 주요 요인이었다고 봅니다. 이를 기반으로 아시아 중심의 비경쟁 영화제, 나아가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인재를 지원하는 파이낸셜 마켓을 가진 영화제로 방향을 잡았죠.

당시 이사장님이 소망하던 영화제의 비전과 지금의 모습이 얼마나 가까워졌는지요?

글쎄요. 그보다는 절대적으로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고 봐요. 데드라인 앞에 있는 것 같습니다.

아쉬움도 있으시겠지만, 그래도 그사이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 최대 규모의 영화제로 성장하지 않았습니까.

외형적으로는 부지런히 따라간 것 같아요. 영화의 전당 같은 큰 공간을 가진 영화제는 많지 않죠. 누군가는 그런 이야기도 합니다. 외형만으로 보면 칸영화제 다음이 부산국제영화제라고요. 하지만 내실 면에서 보완해야 할 점이 많습니다. 영화제는 영화 시장을 배경으로 안고 있어야 내실이 단단해집니다. 지금의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 영화제를 표방하고, 다수의 아시아 영화를 상영하고 있지만 배급으로 이어지지가 않아요. 이런 요인이 영화제의 비전을 어둡게 만듭니다. 출품된 영화가 시장과 연결돼 추후 보다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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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마켓의 중요성을 인지하셨죠. 아시아프로젝트마켓과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의 전신인 부산프로모션플랜과 아시아필름마켓을 발족시키고, 출범 당시부터 2007년까지 아시아필름마켓 운영위원장을 역임하셨습니다. 어떻게 시작한 일인가요?

당시 홍콩 국제영화제 마켓이 굉장히 큰 규모로 열렸어요. 직접 가서 보니 영화제 파워는 곧 마켓 파워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켓 파워라는 게 뭐냐 하면 그 영화제에서 내 영화가 얼마나 판매되고 배급될 수 있는가예요. 칸이 유럽에서 가장 큰 마켓이기 때문에 모두 칸영화제를 1순위로 지향하는 것이고요. 당시 김동호 위원장님에게 ‘홍콩의 행보를 유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마켓을 운영하시라’고 조언했더니 “박광수 감독이 마켓을 운영하면 내가 하고” 하시더라고요. 안 그러면 안 하시겠다고 하니 그럼 내가 스타트만 하겠다고 하고 시작한 거죠. 조사해보니 문제가 심각하더군요. 세일즈 마켓을 성공시키기에 우리가 지닌 유리한 장점이 하나도 없었어요. 부산국제영화제는 10월에 열리는데, 그 후 한 달 반만 있으면 아메리칸필름마켓(AFM)이 열리거든요. 세일즈 회사들이 한 달 뒤면 아메리카필름마켓에 갈 텐데 굳이 직전에 부산에 올 이유가 없는 거예요. 단순한 세일즈 마켓으로는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해 우리는 합작과 제작을 활성화하는 프로덕션 마켓 형태로 방향을 잡았어요. 아시아 영화계 인력 풀을 다 오픈해 감독과 배우, 제작자, 투자 회사가 누가 있는지를 다 공개하고 공유해 바로 제작이 이뤄질 수 있도록 열린 장이 되는 거죠. 중국, 일본 매니지먼트 회사들 다 찾아다니면서 배우들도 오라고 설득해 꽤 많은 배우가 참여했어요. 감독과 배우를 끌어들인 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어요.

아마 이사장님 취임 첫해 부산국제영화제의 가장 큰 변화는 마켓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에서는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신지요?

이번에 와서 보니 영화제와 마켓의 관계, 마켓의 독자적 운영 방향과 비전 등 중요한 철학이 정리가 안 돼 있더라고요. 지난 3월부터 합류한 김영덕 아시아콘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이 잘하고 있어요. 영화제와 마켓이 어떤 관계로 양립해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성, 자율성을 갖기 위한 예산, 인적 교류, 행정 시스템 등 실제 산업 관계자들을 지원할 수 있도록 꾸려져야 합니다. 이 부분은 시간이 지나며 정리될 거라고 봅니다.

변화하는 영화 산업과 환경 속 영화제의 역할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오늘의 영화제가 무엇을 지향해야 한다고 보시나요?

영화제란 본래 ‘새로 나오는 영화들을 보러 오는 곳’이거든요. 세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영화들을 영화제가 한발 앞서 소개하는 역할을 하죠. 먼저 소개되는 만큼 평가 영역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새로운 세대, 새로운 영화 언어를 발견하고 이들에게 상도 주고, 점수를 매기면서 해당 작품을 부각시키는 게 영화제가 하는 일이죠. 나아가 영화제는 근본적으로 영화제가 열리는 나라와 그 나라의 민족문화를 대변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현재로서는 보다 독창적인 한국의 영화제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단지 칸이나 베를린 등 유럽의 영화제를 따라가거나, 거기에서 수상했다는 이유만으로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시선으로 보는 독자적 평가 방식이 존재하는 창의적 영화제를 지향해야겠죠. 이 창의성에는 재정적 독자성이 뒷받침되어야 겠죠. 부산국제영화제는 부산시와 정부 예산이 전체 예산의 60%를 차지하는데, 다른 영화제는 적은 편이에요. 자체적으로 벌어들이는 수익이 비교적 큰 영화제입니다. 이런 구조도 영화제가 앞으로 추구할 방향과 관련이 있으리라 봅니다.

내년이면 부산국제영화제가 30주년을 맞이합니다. 특별한 시간을 어떻게 준비할 예정이십니까? ‘30’이라는 숫자가 어떻게 다가오는지 궁금합니다.

긴 시간이죠? 비슷한 시기에 한국 영화계가 영화제와 함께 성장했다고 봅니다. 내년에 한국예술종합학교를 비롯해 대형 영화제작사, 배급사 등 여러 곳도 30주년을 맞이합니다. 막 일해야 할 때 내가 여기 와 있는 바람에….(일동 폭소) 올해 잘 관찰해서 30주년에는 구체적인 방향을 잡아나가려 합니다. 내년 예산을 지난 8월까지 신청해야 해서 얼마 전까지 30주년에 무엇을 할지 대략 방향을 잡았는데 그걸 알려줄 수는 없습니다.(웃음)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청년 시절, 서울영화집단을 만들고 ‘영화 운동’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셨어요. 한국 영화가 문화로서 올바른 가치를 가지도록 하기 위해 애쓰셨고, 좋은 작품으로 이를 보여주셨습니다. 또 최근까지 후학을 양성하며 영화 안에서 살아오셨습니다. 이 여정을 어떻게 기억하십니까?

서울영화집단을 만들 때는 아무도 영화계에 들어오려 하지 않았어요. 영화계 사람들을 마치 악마의 소굴에 있는 것처럼 인식했죠. 더티한, 상종하지 말아야 할 부류의 인간으로 생각한 거죠. 그중 그렇지 않은 사람 두 명이 있다고 봤는데 임권택, 이장호 감독님이었어요. 그 두 사람을 빼고는 다 몹쓸 인간으로 봤으니(웃음) 험악한 시대였죠. 어디 가서 영화 한다고 하면 “왜 그런 일을 하려고 그러냐”라며 질책하던 때였으니까. 이런 일도 있었어요. 영화감독이 돼 미대 동창을 만났는데 그 친구가 내게 그러더군요. “야, 많은 일 중에 하필이면 그런 일을 하냐.” 아주 형편없는 동네라는 의미였죠.

지금의 위상과는 완전히 다른 곳에서 평생을 투신하며 인식을 바꿔오신 거죠. 영화가 무엇이기에 지금까지 그 안에 머물고 계신가요?

영화는… 영화지. 영화를 안 했으면 그냥 그림을 그렸을 거예요. 그림을 그리다 정이 떨어져서 영화 쪽으로 방향을 튼 거니까. 그 이후로는 안 그렸어요. 처음에는 그림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영화 서클에 갔던 건데… 영화는 그저 내가 하는 일이에요. 지금도 주말에는 시나리오 작업 하고 계속 영화 작업을 위한 일을 하고 있어요. 끝난 게 아니고, 계속하고 있는데 여기에 잡혀서….(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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