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그냥 하기를 바란다. 그저 걸어가고, 계속해서 흐르라고 말하고 싶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샤넬이 제정한 ‘까멜리아상’의 첫 수상자, 류성희 미술감독이 여성 영화인에게 실어주는 힘에 대하여.

연출, 제작, 각본, 촬영, 음향, 미술. 영화 한 편의 탄생에는 이토록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다수 함께해야 한다. 그 안에서 동등한 기회를 얻기 위해, 저마다 자신의 자리에서 전통적 규범과 사고에 도전해온 여성들이 있다. 스스로 길을 개척하는 것을 넘어 미래 세대가 보다 자유롭게 활약할 수 있는 장을 확장해온 그들을 기리는 마음으로, 부산국제영화제와 샤넬이 올해 ‘까멜리아상’을 제정했다. 부산의 시화이자 샤넬의 아이콘인 동백꽃(camellia)의 의미를 담아, 영화 산업에서 여성의 위상을 높이고 그들의 문화 예술적 기여를 제고하고자 마련한 이 상의 첫 번째 주인공은 미술감독 류성희. 한국인 최초로 칸영화제 기술 부문 최고상인 벌칸상을 안은 <아가씨>를 비롯해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괴물> <박쥐> <헤어질 결심> 등에 참여하며 자신만의 미감을 펼쳐온 그가 내일의 여성 영화인을 위한 말들을 건넸다. 영화의 세계에서 더 많은 아름다움을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며.

레더 코트 Lemaire

까멜리아상의 첫 수상자가 되었다. 선정 소식을 접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나?

부산국제영화제에 이러한 상이 생긴다는 사실에 박수를 보내고 싶고, 첫 번째 수상자가 되어 진심으로 영광스럽고 감사하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겠지만, 20여 년 전 내가 영화 일을 처음 시작했을 땐 남성과 동등한 기회를 갖기 위해 의식하고 노력해야 했다. 영화계에 자리 잡기 위해 여성에 대한 선입견과 계속 부딪쳐야 했던 거다. 이름조차 좀 더 중성적인 인상을 주고 싶어 성을 ‘유’가 아닌 ‘류’로 표기했고, 활동 초반의 10년은 일이 없어 고통스러울지라도 멜로나 로맨틱코미디가 아닌, 소위 남성 영화라 구분되는 스릴러나 누아르 장르의 작품에 의도적으로 참여했다.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내 일의 장르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부단히 힘썼다. 사람의 능력과 개성이 성 정체성으로 판단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왔는데, 다행히 이제는 누구도 선입관을 가지고 미술감독을 대하지 않는 시대다. 현재 한국 영화계는 각 분야에 탁월한 여성 영화인이 종사하고 있다. 내가 한 일이 조금이라도 성과가 있다면, ‘영화는 이 모든 사람들의 합’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까멜리아상 수상을 위해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을 예정이다. 개막식에서 시상이 진행되고, 10월 5일에는 스페셜 토크도 마련된다고 들었다.

하필 제일 바쁠 때 부산을 찾아가게 됐다. 공항에 가기 직전까지 파주 세트장에 있다가 부랴부랴 비행기에 올라 화장실에서 헤어를 정돈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웃음) 스페셜 토크는 정서경 작가님과 함께한다. 작가님과는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로 인연을 맺었는데, 친한 사이인데도 ‘여성 영화인’을 주제로 진지하게 이야기 나눠 본 적은 없다. 같은 업계에서 다른 선택을 하며 살아온 그의 이야기도 궁금하니 질문들을 미리 준비하려고 한다. 질문지를 작가님에게 공유하진 않을 생각이다.(웃음)

미래의 여성 영화인들에게 뜻깊은 시간이 될 것 같다.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감독님의 SNS를 살펴봤는데, 후배에 대한 애정이 담긴 게시물들이 눈에 띄었다.

애정을 잘 표현하고 싶은데 내가 작가는 아니라서…(웃음) 바쁘게 작업을 이어가다 보면 후배들한테 심쿵 하는 순간이 있어도 멜로영화 같은 분위기를 잡을 수는 없다. 그 감정을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전할 때 마음 한구석이 짠해지곤 한다. 스스로를 내던질 정도로 일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면 응원하고 싶다. 그들의 삶이 저마다 아름다워 보인다.

팀원들과 친밀하게 소통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나?

물론이다. 내 나이가 어느덧 팀원들의 어머니뻘이거나 더 많다. 팀원들의 또래가 관심을 가질 법한 책이나 음악을 살피는 등 소통거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밴드 혁오의 팬인데, 얼마 전 혁오와 선셋 롤러코스터의 콘서트에 초대받아 음악을 좋아하는 디자이너 한 명과 함께 제대로 즐기고 왔다. 내가 더 잘 놀았던 것 같다.(웃음)

수많은 사람과 영화 현장에서 함께해왔다. 그 과정에서 무엇을 얻고 있나?

영화 한 편을 만드는 데 최소 1백 명의 사람이 참여한다. 다 함께 나아가는 동시에 각자의 삶 속에서 무언가를 탐구하고 표현한다. 하나 된 힘이 강하게 담긴 작품을 완성해내는 게 참 힘들고, 그 과정에서 개인 생활도 많이 침해당하지만 그만큼 큰 보람을 얻을 수 있는 것 같다.

현재 어떤 작업을 하고 있는지 귀띔해줄 수 있나?

박찬욱 감독님의 신작을 촬영 중이다. 배우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등의 엄청난 연기력이 현장에 표출되고 있다. 박찬욱 감독님과의 협업은 어렵지만 매번 재미있다. 감독이 <헤어질 결심>으로 MZ세대의 마음을 훔쳤다면, 이번 영화로는 K-아저씨들을 사로잡지 않을까 싶다.(웃음) 많은 중년 남성이 영화관 조조 상영 시간대 에 이 작품을 보면서 엄청 울 것 같다. 내기를 할 수도 있다.

신작의 시나리오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 무척 설렐 것 같다.

영화를 매개로 이뤄지는 무수한 만남 중 시나리오와의 만남을 제일 중시한다. 설레는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받으면, 긴장감을 유지한 채 읽어가면서 느껴지는 것들을 기록해둔다. 두세 번까지는 낯선 시각으로 읽을 수 있지만, 그다음부터는 미술 작업을 위한 분석이 진행돼 초반의 느낌을 잊어버리기 쉽기 때문이다. 내가 첫 번째 관객으로서 시나리오를 접할 때의 날것 같은 감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이를 시각화하는 작업이 영화미술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미술에 대해 “감독의 직관 안에 있는 요소들 사이에서 질서를 찾아내는 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시나리오에 대한 존중이 느껴지는 말이다.

삶이 논리만을 따라 직진하지 않는 것처럼, 시나리오도 논리가 부족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논리가 명확한 시나리오가 무조건 좋다고 볼 수도 없다. 뜬금없이 실수하고, 엉뚱한 곳에 가보기도 하는 등 모든 일을 아우르는 것이 영화의 세계이지 않나. 그 무질서 속에서 영화미술을 통해 시각적 톤 앤 매너를 만들어 질서를 잡아가는 편이다. 이는 무질서를 정돈하는 것과는 맥락이 다르다. 무질서한 상태에서 많은 것이 자연스럽게 흩어져 있는 정도의 질서를 부여하는 거다.

레더 코트와 롱스커트 모두 Lemaire, 부츠는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영화미술은 작품을 함께 만드는 이들과의 합의를 필요로 하는 작업일 것 같다. 그럼에도 미술감독으로서 고수하는 것이 있나?

이왕이면 안 본 것, 낯선 것. 각 작품의 고유하고 독창적인 세계를 보여주고 싶다. 물론 언제나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영화에는 거대한 자본이 투자되고, 남의 돈으로 나만의 순수예술을 할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익숙함을 어느 정도 가지고 가되, 약간 다른 표현을 하려고 한다. 그게 내 영화미술의 가장 큰 꿈이기도 하다. 하나를 보더라도 모두가 똑같은 아름다움을 느끼는 건 아닐 테니, 이런저런 것들을 조금씩 시도해보는 거다.

그 시도를 잘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벽지다. 류성희 미술감독 하면 벽지 디자인을 가장 먼저 떠올리는 이가 많다.

박찬욱 감독님에게 이번엔 벽지를 쓰지 않겠다고 했더니 왜 안 하냐고 하시더라.(웃음) 내게 벽지는 표현의 일부다. 영화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할 때, 벽지의 가성비가 좋아 자주 활용해왔다. 작품마다 그 용도가 다른데, <아가씨>(2016)에서는 복선이 되고 <올드보이>(2003)에서는 캐릭터의 감정 상태를 드러내는 식이었다.

문득 묻고 싶다. 류성희 미술감독 작업실의 벽지는 어떤 건가?(웃음)

새하얗다.(웃음) 그게 작업하기엔 제일 좋다. 30대가 지나기 전인 <올드보이>를 하던 무렵에는 어두침침한 데서 일했고, 패턴이 있는 벽지도 많이 출력해놓았다. 나이대가 바뀌면 상상력이 발동하는 환경에도 변화가 생기는 건가 싶다.

나이대에 따라 그 사람의 분위기도 달라지지 않나. 50대 중반인 현재의 류성희 미술감독에게서는 온화함이 느껴지는 것 같다. 오늘 스튜디오에 들어서자마자 이곳의 분위기가 따스해진 듯한 기분도 들었다.

성격이 많이 변했다.(웃음) 원래 (MBTI 상) 극 I였는데 사회적 E가 되었다. 예전엔 늘 작업에 몰두하며 긴장한 상태로 지냈는데, 나이 들수록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고 느낀다.

마음이 가벼워진 만큼 일할 때 즐거움이 커졌을 것 같은데 어떤가?

맞다. 하지만 잘하고 싶으니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을 수는 없다. 매번 어렵다며 툴툴대지만, 새로운 과제와의 만남을 즐기는 덕분에 이 일을 지속할 수 있는 것 같다.

영화미술의 전 과정 중 여전히 제일 긴장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미술팀은 프리프로덕션 기간 동안 오로지 영화의 이야기만을, 또는 캐릭터만을 생각하며 디자인 작업을 한다. 세트를 만든 뒤 그곳에 감독과 배우, 스태프들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에 엄청 떨린다. 배우들이 세트에서 처음 느끼는 감정은 카메라에 그대로 담기기도 한다. 우리의 세트가 배우들이 연기할 때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 지켜보는 게 재미있고, 동시에 무섭기도 하다.(웃음)

배우의 연기가 펼쳐질 세트를 지을 때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나?

그릇의 진정한 용도는 겉면이 아니라 내부에 무언가를 담아내는 것이듯, 세트도 외부 장식보다 공간을 채우는 분위기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 청각과 촉각을 비롯한 모든 감각을 동원한다. 세트에 들어선 배우, 나아가 그 장면을 보는 관객에게도 세트의 느낌을 전달하는 게 목표다.

오감을 자극하는 세트를 탄생시키기 위한 영감은 어디에서 얻는지 궁금하다. “영감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부에서 차오르는 것”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어떤 과정을 거쳐 그 생각에 다다랐나?

예전엔 영감이 어딘가에서 내게 확 다가오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영감은 두 눈을 부릅뜨고 낚아챌 준비를 한다고 오는 게 아니더라. 그렇다면 바깥이 아닌 내면에서 찾아야 하는 것일 텐데, 이를 위해서는 내 모든 감각을 차분히 살펴야겠구나 싶었다. 지금을 예로 들면, 우리의 대화뿐 아니라 저 스피커에서 들리는 음악, 포토 어시스턴트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 등을 다 느끼는 거다. 나 자신을 감각의 매개체로 삼고, 영감을 얻는 데 관심을 두고 있으면 내면이 자연스레 채워져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것 같다.

영감을 얻기 위한 고민을 지속해온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닐까 싶다. 영화인을 꿈꾸기 시작한 계기가 데이비드 린치의 <엘리펀트 맨>이고, ‘어떤 것이 아름답고 추한 것인가’라는 질문과 함께 예술이 내게 왔다고 밝혔다. 그 질문의 답을 이제는 알 것 같은가?

‘답이 없을 수밖에 없다’는 게 답인 것 같다. 한때 추하다고 느낀 것들이 어느 때는 아름답게 여겨지기도 하지 않나. ‘미와 추는 고정관념인가?’라는 의문을 품은 채 탐구하는 건 굉장히 어렵고, 그 질문을 다룬다는 점에서 영화미술이 엄청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중이 편하게 접근할 수 있는 매체를 통해 내가 찾아낸 어떤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이에 대한 여러 반응을 살피며 소통하는 직업을 갖고 있음에 감사한다.

최근에 발견한 아름다움이 있다면?

이질적인 것들의 조합, 예기치 못한 것들의 조화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 예상하지 않은 일들이 매일같이 벌어지는 일상도 그중 하나다.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이변을 철저히 차단하는 영화 현장과 달리, 일상에서는 낯설고 어색한 상황을 자주 마주하게 되지 않나. 그래서 오히려 영화보다 일상이 더 영화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현장을 담아내던 카메라를 반대로 돌려 나를 비춘다고 상상해보니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보이더라. 내 삶이, 각자의 인생이 곧 영화가 되는 거다.

이 인터뷰를 읽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영화로운 삶을 아름답게 가꿀 힘을 얻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여성 영화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나?

내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진리가 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는 것. 과거에 잠식되어 변화를 애석해하고 미래에 불안해하며 움츠리고 있으면, 어느새 시간은 흘러가고 있을 거다. 흐르는 물처럼 말이다. 그 흐름에 나를 맡기고, 아주 조금씩이라도 내가 낼 수 있는 속도로 두려움 없이 걸어간다면 좋겠다. 본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것에 대한 믿음과 존중을 지닌 채 꾸준히 나아간다면, 분명히 어떤 방향성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무엇이든 그냥 하기를 바란다. 그저 걸어가고, 계속해서 흐르라고 말하고 싶다. 어려움 속에서 변화를 기꺼이 맞이하고, 대처하고, 호흡하다 보면 그동안 보지 못한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인생의 어떤 것은 모순이고, 어떤 것은 실패고, 어떤 것은 행복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이 삶이다.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든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선택하며 살아가고 있다. 내 안에 있는 천 개의 지역을 탐사하면서 똑같은 삶, 똑같은 순간은 단 하나도 없다. 깨어 있는 한 우리는 자꾸만 새로운 나를 발견하게 된다. 당신의 시선을 내부로 향하게 하라. 그러면 당신의 마음속에 아직 발견되지 않은 천 개의 지역을 발견할 것이니, 그 지역을 여행하라. 그렇게 당신 마음속 우주 지형의 전문가가 되어라.” – 류성희 미술감독이 인터뷰를 마친 뒤 전해온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