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이 문을 닫고 관객과 영화의 접점은 느슨해져 간다. 그럼에도 어디선가 좋은 영화는 쉼 없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 방증이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비전’ 섹션에 있다. 매년 새로운 관점으로 독창적 세계를 펼쳐 보인 한국 영화를 소개해온 이 섹션은 올해도 풍성한 라인업으로 관객을 맞이한다. 끊임없이 마음을, 사람을, 나아가 세상을 탐구하며 나의 영화를 완성한 11인의 감독에게 우리 영화의 미래에 대해 물었다.

이란희, <3학년 2학기>

재킷 AVAMOLLI, 팬츠 ZARA.

직업계 고등학교 3학년 2학기, 담임은 대학 입학과 병역 특례까지 가능한 중소기업을 권하고 창우는 그곳에서 현장 실습을 시작한다. 고된 노동으로 얻은 첫 실습비로 가족들과 맛있는 치킨도 사 먹고 동생에게 선물도 하며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병역 특례 기회는 창우에게 주어지지 않고, 현장에서 무심히 지나친 순간들은 예상하지 못한 일들로 이어진다. CAST 유이하, 김성국, 양지운

영화의 시작 1990년대 후반, 극단에서 활동할 때 동료들 이 청소년 노동자들의 산업재해 이야기를 연극으로 만들자고 이야기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이후 첫 장편영화 <휴가> 시나리오를 쓸 때 현장 실습생들의 산업재해 관련 뉴스를 많이 보게 되었다. 어떤 식으로든 이들을 영화에 등장시키고 싶어 영화 말미에 고등학생이 현장 실습을 오는 장면을 넣었다. <휴가>가 개봉한 뒤 직업계 고등학교 현장 실습생 산업재해 피해자 부모님들과 GV를 하게 되었다. GV를 마치고 그분들 뒤를 따라 걷다가 ‘다음 영화는 현장 실습생 이야기를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만들어야겠다는 그림은 없었다. 단지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정적 장면 결정적 장면은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말할 수 없다. 그 대신 연출 면에서 좋아하는 장면을 말하자면, 현장 실습 중 어려운 일을 겪은 창우가 1호선 지하철에서 관광 계열 직업계 고등학교 여학생들을 보는 장면이다. 주인공 창우가 공업계 고등학교 학생이라는 설정 때문에 예비 노동자로서 직군을 협소하게 보여주는 게 걱정이었다. 이 장면을 통해 영화가 다루는 세계를 넓히고 싶었다. 완성에 이르기까지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인터뷰를 통해 취재하는 부분이었다. 직업계 고등학교 재학생과 졸업생, 교사, 교육청 직원, 특성화 고등학교 노동 조합,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 용접사, 노무사 등을 만나면서 새로운 세계를 알 수 있었다. 인터뷰를 하며 알게 된 사실 중 무엇을 영화로 보여줄지 숨길지 생각하면서 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걸 고민할 수 있었다.

영화 속 나의 모습 <3학년 2학기>는 직업계 고등학교 3학년 창우가 현장 실습을 통해 성장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창우는 처음 발을 내딛은 노동 현장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느려서 잔소리를 듣는다. “왜 이렇게 느려?”하고 다그치는 상사에게 창우는 “하나씩 확인하면서 하다 보니까”라고 대답한다. 나 역시 그렇다. 편집과 후반 작업을 하면서 창우의 이런 면이 꼭 나 같다고 느꼈다. 뭘 배울 때 시간이 한참 걸린다. 보통 그렇게 오래 할 일이 아니라고 말하는 일도 오랫동안 붙잡고 있을 때가 많다.

보여주고 싶은 사람 직업계 고등학교 학생들. <3학년 2학기>를 처음 기획할 때부터 완성한 지금까지 간절히 원하는 것은 직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이 모여서 이 영화를 보는 것이다. 미디어에서 다루는 고등학생은 대부분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인문계 고등학교 학생들이다. 직업계 고등학교 학생들이 <3학년 2학기>를 통해 친구들과 자신의 경험과 고민을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최고의 선택 시나리오 방향을 현재 버전으로 바꾼 것. <3학년 2학기>는 완성할 때까지 세 가지 버전의 시나리오 가 있었다. 2023년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프로젝트마켓 (APM)에서 잡아준 많은 미팅에서 두 번째 버전 이야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그런데 이야기하면 할수록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APM을 마치고 세 번째 버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버전에는 로맨스도 있고, 대의도 있고, 나름대로 드라마틱한 구조도 있었다. 하지만 세 번째 버전에서는 그 모든 것을 없애거나 숨기고 주인공의 현장 실습을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 나로서는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 이전에 만든 영화를 보면 그 영화를 만들던 시절의 나와 사람들, 공간이 기억난다. 그중 몇 분은 이제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어떤 공간은 불이 나서 사라지고, 어떤 공간은 재개발로 사라졌다. 영화를 만들 때는 존재하던 것들이 세월이 흐른 후 사라지거나 변한다. 영화는 돌아갈 수 없을 한 시절을 담아두기도 한다. 기록하는 것을 좋아해 영화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영화는 만질 수는 없지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어 지나간 시절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한다.

영화의 미래 많은 사람이 좋아한다는 영화를, 많은 사람 사이에서 보고 싶어서 멀티플렉스에 간다. ‘어떤 영화인가’보다는 ‘함께 영화를 본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안타깝지만 이런 풍경은 언젠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미 상당수 영화는 다른 방식으로 보여지고 있다. 어쩌면 지금은 너무나 무력해 보이는 독립예술영화 상영관 이 ‘영화를 함께 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 될지도 모른다. 미래에는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지극히 마이너 장르의 예술이 될 수도 있다. 나도 지금처럼 어느 구석에선가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이한주 <파동>

브이넥 니트 스웨터 ARKET, 팬츠 KAPTAIN SUNSHINE.

하루하루 무력하게 삶을 버텨내는 철도 기관사 문영. 어느 날 그는 고향 친구 종현의 연락을 받고, 도망치듯 떠나온 고향 남원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를 따라 뒤늦게 남원으로 떠나는 교사 상우. 그 여정에서 두 사람은 예측하지못한 만남과 사건들을 마주하게 된다. CAST 박가영, 안병우, 황상경

영화의 시작 우연히 접한 한 다큐멘터리를 통해 나와 같은 세대 청년들의 고독사에 대해 접하고 안타까움과 무력 감을 많이 느꼈다. 당시 나 역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환멸감과 분노의 감정이 삶을 둘러싸고 있었고, 그 때문에 직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중이었다. “내가 죽으면 사람들이 나를 기억할까?”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문 영의 이 말이 늘 마음속에 맴돌았다. 극단적인 나의 선택으로 인해 누군가 아팠으면 좋겠고, 또 누군가는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 그 비뚤어진 마음을 다잡기 위해 나 자신을 해방시킬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렇게 시작된 이야기가 <파동>이라는 영화의 완성까지 오게 되었다.

결정적 장면 영화의 마지막, 문영이 지하철에 앉아 어딘 가를 향해 가고 있는 장면. 이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어둠에서 빛으로’라는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 영화를 본 누군가는 맨 마지막 지하철 장면을 보며, ‘뜬금없이 왜 이런 장면이 나오지?’ 하고 의아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장면은 영화의 모든 부분을 함축적으로 설명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지하철에 몸을 실어 어두운 터널을 달리 다 빛으로 향하는 순간, 그것은 죽음을 향해 가는 문영일 수도, 혹은 또 다른 세계를 향해 기대하며 나아가는 문영 일 수도 있기에 영화를 본 관객 각자의 마음에 다른 질문이 생기길 바란다.

완성에 이르기까지 가장 고민한 때는 아무래도 글을 쓰는 시간이었다. <파동>은 이야기 구조에 기승전결이 있 거나 표면에 드러난 명확한 사건을 중심으로 인물들이 움직이는 영화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처음 글을 쓸 때 무엇보다 형식 면에서 특별한 부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컸다. 논리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논리적으로 접근하다 보면 말이 안 되는 장면이 워낙 많 았기 때문에 ‘이게 맞아?’ 하는 생각에 썼다 지우기를 수 없이 반복했다. 그때마다 이 영화를 함께 준비하고 제작한 문영 역의 박가영 배우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더 단순하게,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지지해준 말들이 내가 뻔뻔하게 초고를 쓸 수 있는 힘이었다.

영화 속 나의 모습 나에겐 문영의 모습도, 상우의 모습도 조금씩 담겨 있는 것 같다. 문영이 겪는 외로움이나 우울,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절실히 찾으려 하는 상우. 이런 모습이 그 당시 내가 품고 있던 가장 큰 질문이 었던 것 같다.

최고의 선택 영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한 선택. 영화를 만들면서 나에 대해 알게 되었고, 위로가 되었고, 회복할 수 있었고, 그리고 이렇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선보일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렇다고 앞으로 맞는 모든 순간이 마냥 행복하진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만들겠다고 다짐한 나에게 대견하고, 잘 버텼다고 격려해주고 싶다. 더불어 <파동>의 제작자이자 주연배우인 박가영 배우부터 최근오 PD, 황단용 조감독, 강정원 PD. 이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게 최고의 선택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다. 대단한 감독이 되겠다는 다짐이나 거창한 주제 의식을 갖고 영화를 만들진 않지만, 그래도 글을 쓰고, 완성한 글을 몇몇 사람들이 좋아해주고 ‘함께 만들어볼까?’ 하는 의기 투합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여전히 무척 설렌다. 나의 글을 믿고 지지해주는 이들이 모여 종이 몇 장에 쓴 글을 눈에 보이는 무언가로 만든다는 사실이 무척 위로가 되고 든든하다.

영화의 미래 ‘영화는 곧 사라지게 될 거야.’ 이런 극단적인 말을 종종 들을 때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지만, 어느 순간 나도 영화의 지금과 미래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왜 하필 지금?’ 하는 생각에 무척 안타깝고 한편으론 억울하다. 이런 의미에서 갖는 두 가지 바람. 영화가 더 오랫동안 지속되고 사랑받길, 무엇보다 제발 사라지지 않길. 그리고 두 번째는 더 다양한 영화가 나오길. 관객이 더욱 다양한 영화를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길 바란다. 어렵지만 그래도 더 도전적인 영화를 만나고 싶다.

김효은, <새벽의 Tango>

셔츠 MASSIMO DUTTI, 안에 입은 톱 RRACE, 슈즈 DR. MARTENS.

믿었던 친구의 배신으로 대포 통장 피의자가 된 지원은 모든 관계를 끊고 숙식이 제공되는 공장에 취업한다. 그런 그에게 시도 때도 없이 ‘탱고(tango)’를 추며 다가오는 룸메이트 주희.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공장의 공동 조장 한별. 어느 날 공장에서 일어난 사고에 휘말린 지원, 그리고 주희. 새로운 관계에서 한 걸음 떨어져 있고 싶었지만, 지원은 결국 관계의 한가운데에 서게 된다. CAST 이연, 권소현, 박한솔

영화의 시작 평소 관계와 믿음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내가 느끼는 관계와 믿음은 항상 어렵고 모호했는데, 그 때문인지 언젠가 지나다녔던 독특한 새벽 공원의 이미지가 떠올랐고, 거기에서부터 영화가 출발했다.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한 초저녁에 점점 어두워지는 공원을 지나, 다시 낮과 밤의 경계가 모호한 새벽에 공원을 빠져나오며 점점 선명해지는 인물의 얼굴을 시작으로, 하나둘 살을 붙이며 지금의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다.

결정적 장면 영화 중반부쯤 지원과 주희가 마주 보고 수변 공원을 걷는 장면. 이 장면은 두 사람의 관계와 삶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함께 마주 보고 걷는다는 것, 잘 걷고 잘 멈추는 것. 이것이 내가 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다. 주희는 지원을 위해 뒤로 걷고, 지원은 주희를 위해 걸음을 늦춘다. 주희는 혼자만의 스텝을 즐기다가도 결국 멈춰 지원을 기다려준다. 또 지원은 그런 주희로 인해 멈춰 선다. 이 영화는 크게 보면 지원이 걷다가 멈춰 선 순간들을 그리는 만큼, 여러 의미를 품은 장면이다.

완성에 이르기까지 가장 고민한 순간이 가장 힘들었고, 동시에 가장 즐거웠다. 그 모든 총합이 콘티 단계였는데, 시나리오를 쓰며 혼자 고민한 모든 요소가 바깥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그제야 모든 불안이 사라지며 안심이 되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 속 나의 모습 누군가 얘기해줘서 알게 된 사실인데 영화에 밥 먹는 장면이 없다. 나는 실제로 때가 되면 밥을 챙겨 먹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다 보니 이야기를 만들 때 인물들이 밥 먹는 장면을 우선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 다. 나의 이런 부분까지 이야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보여주고 싶은 사람 누군가를 믿었다가 배신당한 사람들. 억울하지만 사람을 원망하는 일은 나를 죽이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은 모른다. 나만 손해다. 어찌 됐건 그 사람들을 믿은 선택은 나 스스로 한 것이다. 나를 원망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 선택에 책임지는 태도가 바람직하다는 말이다. 내가 선택한 믿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면, 이후 누군가를 믿는 데 더 신중해지고, 그런 신중한 태도가 따르는 믿음으로 맺어진 관계는 그 무엇보다 큰 선물로 다가올 것이다. 내 경험담이다.

최고의 선택 단편영화를 만들 당시 이연 배우에게 프러포즈한 일. 좋은 배우와 작업한다는 것이 감독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특히 단편 작업을 함께 한 이후 이연 배우는 내 모든 이야기의 뮤즈로 활동(?)하고 있다. 이연 배우를 떠올리면 멈췄던 이야기들이 움직이는 느낌을 받는다. 사실 <새벽의 Tango> 역시 이연 배우의 얼굴에서부터 시작된 이야기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 다음을 예측할 수 없다는 것. 다르게 말하면 계획한 대로 잘 흘러가지 않는다는 점이 내가 영화를 붙들고 있는 이유다. 크게 보면 삶을 놓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화는 내 삶을 통틀어 다음이 궁금해지는 유일한 작업이다.

영화의 미래 영화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가 알던 방식과 흐름을 넘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시점인 것 같다. 지금은 많은 사람이 예전보다 훨씬 더 다양한 콘텐츠에 익숙하고, 그만큼 오랫동안 유지해온 방식에 좀처럼 머물려 하지 않는다는 걸 느낀다. 영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가져가면서, 좀 더 새로운 시도와 방식으로 다양한 세계를 구축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박송열, <키게가 홈런을 칠 거야>

재킷과 팬츠 YOUTH, 셔츠 LEMARD

영태는 돈을 벌어오겠다는 쪽지를 남기고 집을 떠난다. 혼자 남겨진 미주 역시 돈을 벌기 위해 베이비시터로 일한다. 하지만 얼마 못 가 일을 그만두게 된다. 게다가 과거의 사채업자가 찾아와 미주를 괴롭힌다. 미주는 사채업자와 돈이란 무엇인가를 두고 심도 있는 논쟁을 벌인다. 일련의 그 모든 괴로운 일에도 미주는 남편 영태의 성과를 기대하며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얼마 후 영태가 집으로 돌아오는데 행색이 거지꼴이다. CAST 원향라, 박송열

영화의 시작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무언가를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 그 원점에 남아 있는 것에 감사하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시나리오 작업이 시작되었다.

결정적 장면 극의 흐름을 좌우하는 결정적 장면이라기보다 빠져서는 안 될 신이라고 생각한 장면이 있다. 집을 떠났던 영태가 오랜만에 돌아와 아내와 함박눈이 내리는 뒷산에 올라 눈싸움을 하는 장면이다. ‘눈은 공짜이니 두 사람은 세상의 공평함을 느끼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두 사람에게도, 중반부에 이르는 이 영화에도 휴식 같은 장면이어서 고요 후 파동을 일으킬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아주 좋은 시퀀스다.

영화 속 나의 모습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극영화다. 영화 속 인물은 창조된 캐릭터일 뿐이다. 그래서 거리를 두려했고, 그랬기 때문에 나의 어떤 면을 발견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캐릭터에 나를 투영했다기보다 카메라 밖 영태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은 것 같다. 의도적으로 극영화의 선을 넘고 싶은 욕망도 있었던 듯하다. 이를테면 영태가 떠난 후 미주가 침대에 바르게 누워 눈시울을 붉힌 채 “잘 자”라고 말하고 불이 꺼지는 숏은 작중 미주의 혼잣말로 보는 것이 객관적이지만, 이때 찍고 있는 카메라 바로 뒤에 영태가 있다는 걸 느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이 영화의 감독이자 영태 역을 연기한 배우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나만 느끼는 부분일 수 있지만.

보여주고 싶은 사람 누구든. 내 영화가 독립영화라는 외형을 띠고 영화제에 오는 관객이나 단발성 상영회에서 소수의 독립영화 고정 관객층에만 머물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많은 관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저 멀리 경상도 어딘가에서 쌀농사를 짓는 김 아무개 씨, 전라도 어딘가에서 비료 공장에 다니는 임 아무개 씨, 섬마을 어딘가에서 해조류 가공업을 하는 최 아무개 씨 등 무작위로 아무나 이 영화를 쉽게 볼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그러니까 영화의 공급에서 보편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산골 오지에도 전기가 닿고 시골 마을에도 기차가 다니는 듯 말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 내 안에 무언가를 새롭게 만들어내고 싶은 창작욕이 분명 존재한다. 그래서 영화를 계속 만들고 싶다. 작업 과정은 물론 고되기도 하지만, 지금 이곳이 가장 행복한 곳이라는 걸 알기에 그것이 작업의 동력이 된다. 영화 작업을 하지 않는 기간에는 영화와 상관없는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한다. 솔직히 그 일이 하기 싫다. ‘내가 지금 왜 이 일을 해야 하나? 영화 찍으러 가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늘 한다. 그러면서 쌓인 갈증은 영화 작업을 할 때 비로소 해소된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 사랑과는 거리가 멀고, 영화를 좋아할 뿐이다. 혹여 영화를 그만둘 만큼 더 만족하는 삶의 길을 만나면 그 길로 갈 것이다. 그래서 영화에 과한 의미를 두고 싶지는 않다. 내게 영화는 현재 진행형일 뿐이고 미래는 모른 채 살고 싶다. 미래를 모르니까 영화를 계속해보는 것이다.

영화의 미래 우리 영화의 미래가 어떤 형상일지는 잘 모르지만 영화제작이 쉬워져 작품 수가 늘고, 보는 방법도 극장 밖으로 넓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영화가 난립할 것이고, 관객이 유의미한 영화를 잘 골라 보는 안 목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황슬기, <홍이>

수트 ZARA COLLECTION.

사채에 시달리는 홍이는 치매에 걸린 엄마를 요양원에서 데리고 온다. 홍이는 엄마의 돈으로 자신의 빚을 갚기도 하고 오픈 채팅으로 만난 상대와 데이트를 즐기기도 한다. 그저 돈이 목적이던 홍이는 엄마와 함께 지내는 동안, 상처를 주고받던 자신들을 마주하며 조금씩 마음을 연다. 하지만 30대 후반, 일과 자기만의 삶을 꾸려가려는 홍이에게 병든 엄마의 존재는 점점 무겁게만 다가온다. CAST 장선, 변중희, 이유경, 기윤

영화의 시작 어머니가 나이 들고 건강이 나빠지면서 내가 어머니의 유일한 보호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됐다. 그와 동시에 나의 삶을 돌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또한 나 자신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외할머니가 알츠하 머를 앓다 돌아가셨는데, 어머니가 막바지까지 돌보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했고, 거기에서 <홍이>가 시작되었다.

결정적 장면 문득 영화 속 여러 장면이 떠오르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으로서는 마지막 장면이라 여긴다. 최선이자 동시에 어쩌면 최악의 선택을 한 순간, 주인공의 복잡하고 미묘한 심정을 배우 장선의 표정과 몸짓, 그리고 단 하나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완성에 이르기까지 딱 1년 전, 한창 촬영 중이던 때가 떠오른다. 매일 고군분투하고 또 치열하게 고민하던 하루하루가 쌓이던 나날이었다. 그 시간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는 1년 전의 나는 혼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여름과 가을, 겨울에 함께한 소중한 동료들이 없었다면 <홍이> 는 결코 완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영화 속 나의 모습 나는 참 잘 웃는다. 심지어 웃지 않아도 되는 순간, 혹은 웃으면 분위기가 어색해질 상황에서도 웃는다. 이따금 ‘아, 그때 내가 왜 웃었을까’ 하고 돌아보기 도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 웃는 얼굴을 좋아한다. ‘웃음’ 의 경계를 다시금 짚어보게 하기 때문에. 이런 의미에서 <홍이> 속 인물들의 면면에서 나의 조각들을 발견했다. 그래서 <홍이>에서는 ‘웃음’이 참 귀하고 또 특별하게 여겨진다. 인물들이 진심으로 웃는 순간이 영화 속에서 무척 반짝이며 존재한다. 그 웃음이 영화 속에서 새로운 빛 깔을 내고, 영화에 색을 더한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더불어 나의 웃는 얼굴도 조금 더 살펴보게 되었고.

보여주고 싶은 사람 마음 내키면 언제든 극장에 갈 수 없는 사람들. 공중파 방송도, 케이블 방송도, 극장도, OTT 서비스와도 가깝지 않은 사람들. 그들에게 <홍이>를 보 여주고 싶다. 이 영화가 마냥 가볍게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보고 나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목소리, 들리지 않는 얼굴들이 만날 수 있는 자리에서 이 영화를 나누고 싶다.

최고의 선택 시나리오를 거듭 고치고 또 고민하던 중에 과연 내가 이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싶어 포기하려던 찰나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이 이 일을 하면서 가장 위태롭지 않았나 싶다. 그때 용기를 내서 가장 친하고 또 한 마음 깊이 존경하는 감독님에게 SOS를 요청했다. 감독님이 “네 양심이 가는 대로 선택하고 행동하라”고 말씀 해주셨는데, 그 순간이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말을 들은 덕분에 <홍이>를 찍을 수 있지 않았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때 나의 양심은 영화를 찍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감독님에게 SOS 신호를 보내기로 결심한 선택이 무척 중요한 순간이었다. 잊지 못할 대답을 들었 다는 점에서.

영화의 미래 ‘영화 하기 힘들다’, ‘영화 시장이 어렵다’, 심지어 ‘영화는 끝났다’라는 말이 꽤 오래전부터 들려오고, 마치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때다. 영화를 둘러싼 상황이 고단하지만 영화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럴수록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들은 그 기다림에 응답하기 위해 저마다의 매무새를 가다듬을 테고. 칠흑 같은 어둠 속 길을 한참 걷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터널이었다는 말이 요즘 상황에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더 다양한 목소리와 맵시를 가진 영화들이 이 터널을 거쳐 우리에게 당도할 것이라고 여기고 또 믿고 있다.

이재한, <환희의 얼굴>

니트 스웨터 COS.

4개의 이야기가 있고, 거기에 환희가 있다. 환희는 제주의 작은 오름에서 여정을 시작해 결국 아주 좁고 어두운 장소에 도착한다. 마침내 도착해 환희의 이야기가 끝날 때,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작고 여린 손이 이야기의 끝을 어루만진다. 그 안에서 무언가를 찾아내려 애쓴다. CAST 정이주, 김시은, 황미영

영화의 시작 제주에 아는 사람이 둘 있어 몇 년 동안 아내 와 함께 자주 찾았다. 그 둘이 제주도를 떠난다고 했고, 그 사실이 조금 이상했다. 영화를 찍고 싶어서 억지로 뭐라도 썼다. 그러다 보니 단편들이 모여 장편을 구성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완성했다. 그 둘이 많은 영향과 도움을 주었다. 그 둘은 이제 제주를 떠났다.

결정적 장면 주인공 환희가 가만히 혼자 짓는 표정들이 있다. 곁에 사람이 없을 때 보이는 얼굴들. 그 얼굴이 좋고, 종종 생각난다. 배우에게 내가 어떤 요청을 한 적이 없는데 지은 표정들이다. 그가 그 표정을 지을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완성에 이르기까지 연출을 잘 못해서 힘들었다. 도중에 큰 혼란도 있었고. 내 능력이 부족한 탓이었고, 그래서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그리고 나의 아내에게. 흔한 말이지만, 함께 만든다는 느낌을 받았고, 신세를 졌다고 생각했다. 동료가 생긴 것 같아 기쁘다.

영화 속 나의 모습 영화에 나오는 인물 중 주인공 환희만은 나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머지는 나와 다 비슷하고. 그런데 최근에 영화를 다시 보니 오히려 환희가 나와 가장 닮은 것 같았다. 특히 그 인물의 어두운 부분이. 그래서 재밌었다. 환희와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보여주고 싶은 사람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보여드릴 수 있으면 재미있을 것 같다. 이유는 모르지만, 대학 원서를 쓰기 직전에 아버지가 영화과를 가라고 권하셨다. 당신이 영화를 무척 좋아하셨고, 젊을 때 영화 일을 꿈꾸셨던 것도 같다. 물론 아버지가 좋아한 영화는 내가 찍은 것과는 거리가 멀다. <벤허>를 좋아하셨다.

최고의 선택 예상하고 선택해서 잘된 일은 기억나지 않고, 오히려 선택할 당시에는 기대도 예상도 하지 못한 경우가 오래 남는 듯하다. 이번 영화에선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그랬다. 그들을 만나서 영화를 무사히 마쳤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 영화 만드는 건 힘들다. 잘 만들고 싶은데, 잘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속된 마음이 내가 영화를 만드는 원동력인데, 아마 영원히 잘 만들지는 못할 테니 또 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같다. 영화의 미래 우리 영화가 오래 남아서 다른 사람들 눈에도 띄었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긴 시간 동안 남을 가치가 부여되면 더 좋을 것 같다. 다만, 큰 기대는 하지 않는다. 좋은 영화는 아주 많기 때문이다.

조희영,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크롭트 재킷과 안에 입은 톱 모두 AMOMENTO, 스커트 COS.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춰버린 정호, 그리고 그와 각기 다른 인연으로 얽히는 수진과 인주, 유정, 세 여자가 있다. 정호의 애인 수진은 정호 모르게 훈성과 비밀스러운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정호를 몰래 짝사랑하는 인주는 시한부 삶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정호에게 품은 마음을 고백하기로 한다. 유정은 옛 애인 정호의 자살 기도에 대한 죄책감으로 현재 애인과의 관계가 위태롭다. CAST 공민정, 정보람, 정회린, 감동환

영화의 시작 크고 작은 사건의 단상을 교차시켜 바라본다면 무엇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서 출발했다.

결정적 장면 인주가 애초에 구상한 것과 다른 모습으로 전시되는 작업이 떠오른다. 그건 그것대로 결국 다른 의미 로 알려지고 말 것이다.

완성에 이르기까지 많은 과정을 지나왔지만, 한창 촬영하던 시기를 가장 오래 기억하고 싶다.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무한한 에너지가 모여 작용하던 순간들이 영화로 기록되어 있다.

영화 속 나의 모습 명확하게 발견한 적은 없지만 이 영화 속 모든 인물에게 공감한다.

보여주고 싶은 사람 영원히 알 수 없는 답을 찾아 여전히 헤매거나 그런 이유로 그것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다른 의미로 알려지고 기억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조금이라도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란다.

최고의 선택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것. 오래도록 작업하고 싶은 마음이 여전하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 움직이는 영상을 통해 발견하고 표현하는 것이 일등으로 재미있다.

영화의 미래 새로운 방식의 시청각적 장치는 계속 변화하고 다양해지겠지만, 영화는 그 자리에서 묵묵히 우리를 기다려줄 것이라 믿는다.

황인원, <그를 마주하는 시간>

재킷 AMOMENTO.

웹에 로맨스 소설을 쓰는 수연. 수연은 문단의 젊은 스타 작가인 교수 신승환에게 성폭력을 당한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자신은 피해자가 아니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어느 날, 선배 정안이 찾아와 학생들에게 성폭력을 저지른 신 교수를 함께 고발하자고 제안한다. 그 일로 사건의 중심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수연의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CAST 석희, 이승연, 김시은

영화의 시작 우리는 무의식중에 피해자에게도 ‘자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순결한 피해자 프레임을 내재화하고 그 틀에서 벗어나면 자격이 없다고 여기지는 않는가? 공기처럼 깔려 있는 이런 관념이 피해 자 본인조차 스스로를 괴롭히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한 영화다.

결정적 장면 아무래도 마지막 장면을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내내 이해받기 어려운 선택과 행동을 이어가는 주인공 수연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는 장면이자, 그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완성에 이르기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단계는 편집 과정이다. 프로덕션이 끝난 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1년 넘는 긴 시간 동안 편집을 하면서 영화제작의 전 과정을 돌아볼 수 있었다. 지금의 영화는 기획 단계, 시나리오 단계, 촬영 단계 각각에서 그린 영화와 많이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편집하면서 마지막까지 어떤 영화가 될지 찾아가는 과정이 영화를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 속 나의 모습 영화 속 수연은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심이 큰 사람이다. 마음에 품은 비밀을 처음부터 정안에게 털어놓았다면 오히려 이해받고 다음 단계로 함께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수연은 자신의 진실을 아무도 받아들여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해 스스로를 더욱 곤경에 처하게 만든다. 나 역시 자신에 대한 의심이 커서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점이 수연과 조금 닮았다고 생각한다.

보여주고 싶은 사람 이 영화를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마음에는 죄가 없다, 마음을 이용하는 것에 죄가 있다’라는 것이다. 혹시 나의 마음이, 또는 나의 무언가가 문제였던 건 아닐까 괴로워하는 분들에게 이 영화가 아주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최고의 선택 장편영화를 제작한 것. 전달 방식, 호흡, 효과적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등 영화 연출에 관한 많은 것을 압축적으로 깊이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후회되는 선택이 많았고, 마음에 드는 선택도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영화와 영화를 만드는 일에 대해 돌아보았고, 계속하고 싶다는 동력이 생기기도 한 소중한 시간이었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 나는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아가는지,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왜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하게 되는지에 관심이 많은데, 그 복잡한 마음과 심리를 생생하게 들여다보고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영화를 좋아한다. 영화에서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나 공감하거나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되거나, 아니면 그 둘 다 아닌 사람을 흥미롭게 지켜보는 시간을 보내면서 현실의 시야가 넓어지고 일상이 풍요로워진다고 생각한다. 이런 경험을 온전히 선사하는 영화를 제작하는 것이 현재의 목표이기 때문에 지속할 방법을 모색하는 중이다.

영화의 미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취향이 점점 더 다양해지고, 여러 플랫폼에서 내가 보고 싶은 콘텐츠를 선택해 볼 수 있는 환경이기 때문에 관객의 취향을 넓은 범위에서 통합해 영화를 제작하려는 방식은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특정 부분에서 날카로움을 가진 영화가 소수의 취향을 만족시키고, 대중을 만족시키는 미래가 오지 않을까 싶다.

이승재, <허밍>

데님 셔츠와 팬츠 모두 POTTERY.

성현은 일을 그만두려는 차에 1년 전 함께 작업한 감독에게 믹싱을 제안받는다. 감독은 주연배우 미정의 대사가 들리지 않는데 애드리브를 많이 해서 어떤 대사인지 잊었다고 말한다. 미정은 이미 죽은 지 오래이기에, 무명배우 민영이 대역으로 후시녹음을 맡게 된다. 녹음 당일, 감독은 오지 않고 성현과 민영 단둘이 남게 된다. 성현은 1년 전에 찍은 영화 현장을 기억하고 민영은 영화 속 미정이 맡은 캐릭터를 그려나간다. CAST 김철윤, 박서윤, 김예지

영화의 시작 2022년 여름, 우리 집 근방 성대시장이 심각한 침수 사태를 겪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피해를 입었고 사망자도 생겼다. 누군가를 원망할 수도 없고, 재해는 내년에 다시 닥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상인들은 다시 가게를 열었다. 누군가 다시 찾아올 거라는 어떠한 기대 같았다. 거대한 구조 속에 본인이 무력하게 느낄지라도 어떠한 순수함이 삶의 활력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 순수함을 영화로 표현하고 싶었고, 그렇게 <허밍>이 나 왔다.

결정적 장면 트레일러에 나오는 성현이 미정의 허밍을 듣는 장면이다. 앰비언스 소음을 따는 와중에 미정이 허밍을 하는데, 성현의 원래 성격대로라면 이를 제지하겠지만 그날은 왠지 모르게 미정의 허밍을 끝까지 들어준다. 영화 제목처럼 허밍을 하는 부분이기도 하고, 성현이 미정을 기억하는 가장 인상적인 순간이라 뽑았다.

영화 속 나의 모습 <허밍>은 나의 경험, 나의 공간에서 시작됐다. 그러다 보니 내 모습이 캐릭터로 투영됐고, 로케이션도 모두 우리 집 근처에서 이뤄졌다. 4년간 보아온 공간들이다 보니 여러 관점에서 해당 공간을 바라볼 수 있었고, 나의 시선이 콘티에 반영됐다. 한편 영화를 찍으면서, 배우와 이야기하면서 발견한 나의 모습도 있다. 말이 참 많다는 것.

보여주고 싶은 사람 과 동기 아름이 누나에게 보여주고 싶다. 영화를 많이 사랑한 사람인데 비극적 선택을 했다. 이 영화가 왠지 누나에게 힘과 위로를 줄 수 있을 것 같다. 누나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이 영화 <허밍>에도 녹아들어 있다. 누나라면 그 부분을 읽어낼 것 같다.

최고의 선택 2021년에 준비하던 영화를 엎을 뻔했다. 폭우가 쏟아져 도저히 시나리오대로 못 찍을 상황이었다. 결국 상황에 맞춰 시나리오를 다시 구성해 크랭크업 했는데, 아쉬움이 남지만 꽤 만족스러운 작업이었다. 그때 포기했으면 나는 진짜를 보지 않고 시나리오와 모니터에 나를 가뒀을 것이다. 모니터 밖 진짜를 볼 수 있던 순간이자 선택이었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 영화는 내 기저에 있는 잔여물을 털어놓는 창구 같다. 그러다 보니 영화 한 편을 찍을 때마 다 사유하며 환기되는 순간을 경험한다. 그래서 나는 영화 찍는 과정이 그리 힘들지 않다. 오히려 도파민이 돌고 행복하다. 영화의 미래 형태가 어떻든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러닝타임과 플랫폼이 다를지라도 관객이 느끼는 정서와 감정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고, 창작자는 이를 위해 꾸준히 사유하고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꾸준함을 모토로 계속 창작할 것이다. 기대해도 좋다.

이종수, < 인서트>

블루종 ANDZ, 카디건과 팬츠 모두 AMI.

주석은 스승 형표의 촬영장에서 인서트 감독으로 일하고 있다. 어느 날, 인서트를 따려는 주석의 화면 안으로 뛰어든 추현. 그 사건을 계기로 추현은 촬영 팀에 합류한다. 급속도로 가까워진 주석과 추현. 그러나 주석이 게임을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추현은 불같이 화를 내며 이별을 고한다. 며칠이 지난 후 회식 자리. 추현과 주연 남자 배우의 관계가 심상찮아 보인다. 주석은 부둣가의 흔들리는 배들을 보며 하염없이 슬퍼한다. CAST 남경우, 문혜인

영화의 시작 팬데믹 시기이던 2020년에 준비하던 단편 영화 촬영이 어려워지면서 전북 장수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러 갔었다. 그곳은 저수지가 많은 동네였는데, 저수지 근처에서 인서트를 찍던 도중 수면에 비친 산세를 보면서 ‘이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어떨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 아이디어를 트리트먼트의 형태로 가지고 있다가 지난해 부산에 갔을 당시 영화 비전공자인 내가 영화인들의 축제에 끼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고, 당시 느낀 기분에 첫 장편영화를 찍을 때 든 기분을 더해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결정적 장면 처음 마추현이 진주석의 카메라 화면 속으로 들어오는 장면. 사실 특정 장면 하나가 결정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머지는 스포일러 방지 차원에서 이야기하지 않겠다.

완성에 이르기까지 우선 잠도 잘 못 자고 고생한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제작 지원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고생하는만큼 챙겨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순간들이 있었고, 그런 부분에서 스스로 무력감을 많이 느꼈다. 이렇게까지 영화를 계속 해나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영화 속 나의 모습 나의 면면이 <인서트>의 모든 인물에 담긴 것 같다. 글을 쓰고 촬영하고 편집하다 보면 애써 감 추는 나의 변덕스럽고 비굴한 모습들이 모든 인물에 녹아 있는 것이 느껴진다.

보여주고 싶은 사람 영화를 만드는 영화인들에게 보여주 고 싶다. 왜냐하면 요즘엔 독립영화 관객보다 독립영화를 만드는 영화인의 수가 더 많은 것 같아서, 흥행 차원에서…(웃음) 농담이고, 영화를 만드는 분들에게 소소하게 공감할 요소가 있고, 생각할 만한 작은 여지를 <인서트> 가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 영화를 만들고 나면 자리에 앉아 어떤 현상에 대해 불평만 늘어놓는 사람에서 직접 행동하는 사람으로 바뀌게 된다. 그게 무언가를 만들게 되는 이유인 것 같다. 또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사랑하는 대상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것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이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임한다. 집착하고 조종하려 들지 않고 그 대상이 원하는 방향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찰 때가 있고 그 지점에서 사랑을 느낀다.

영화의 미래 얼마 전 집 앞에 있는 대한극장이 문을 닫았다. 이미 대한극장의 특정관은 e-스포츠 경기장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주말마다 e-스포츠를 사랑하는 팬들이 대한극장 앞에 줄을 서서 프로 게이머들에게 사인을 받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며 지나치면서 매번 나는 어느새 변화의 흐름 한가운데 서 있는 세대가 아니라 변화를 바라보고 판단해야 하는 세대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김성윤, <파편>

니트 KNITTED, 셔츠 AMOMENTO, 팬츠 POKERFACE.

일을 마치고 귀가하던 기수의 부모는 강도를 만나 살해당한다. 한편, 편부 가정에서 생활하던 범인의 두 자녀 준강과 준희는 이 사건으로 단둘이 남게 된다. 어느 날, 준강의 친구 도진으로부터 살인범 가족이 아직 동네에 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고, 아버지의 범죄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애써 모른 척하는 준강과 달리 도진은 친구들을 모아 사건 현장인 기수의 집을 찾는다. CAST 오자훈, 문성현, 김규나, 장재호

영화의 시작 <파편>은 깨진 창에서 출발한 영화다. 우리는 깨진 창을 보면 어떤 모양으로 깨져 있는지, 무엇이 그 창을 어떻게 깼는지를 궁금해하며 바라보게 된다. 그러다 문득 깨진 창에서 시선을 돌려보니, 깨진 창보다 더 광 범위하고 세밀하고 예리하게 흩어진 파편들이 눈에 보였다. 이전에는 한 번도 이 파편들을 유심히 지켜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시나리오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파편>은 살인이라는 충격적 사건에서 떨어져 나와 흩어진 파편들의 이야기다.

결정적 장면 주인공 준강과 기수, 그리고 준희까지 한자리에 모여 있던 눈 오는 골목길 장면은 내가 영화를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깨진 창이 아닌 파편들의 모습이다. 셋 중 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고 어떤 책임도 없지만, 그 구보다도 고통받는 파편들을 지켜보고 발견하게 되는 장면이라 생각한다. 완성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제목을 따라간다’는 속설이 있다. <파편> 역시 제목처럼 매 순간, 수많은 이들의 마음 과 노력이 모여 완성할 수 있었다. 완성에 이르기까지 어떠한 한순간이나 과정이 떠오르기보다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제작 결정을 내린 제작사 대표님부터 추운 겨울날 촬영하느라 고생한다며 커피를 타서 나눠주신 촬영지 주민까지, 뜻밖의 지지와 응원이 함께한 <파편>의 모든 순간이 떠오른다.

영화 속 나의 모습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저 마다 맞닥뜨린 상황에서 선택해나갈 뿐, 악의가 있거나 특별한 의도(연령대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를 갖고 있지 않다. 동시에 이들은 모두 타인을 조금이나마 신경 쓰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변 인물 사이에서 주인공들은 또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이러한 시나리오 속 인물들을 통해 내가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노력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고의 선택 어떻게든 <파편>을 찍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컷이 모여 신이 되고, 신이 모여 시퀀스가, 시퀀스가 모여 영화가 된다. <파편>을 찍겠다는 결정이 부산국제영화제라는 신이 되었고, 이제 이후 다가올 신과 그 시퀀스가 모여 만들어질 영화가 어떻게 펼쳐질지 무척 궁금하고 설렌다.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 누군가 나의 이야기를 좋아한다는 사실과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를 해주는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 이것만으로도 영화를 사랑할 이유는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