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바람결에도 구겨지지 않을 기백을 지닌 채, 빼꼼 고개를 내미는 희망을 찾아 한 해를 살아내기 위해.
시작하는 마음을 충만하게 해줄 1월의 영화.

하마구치 류스케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를 자주 찾았다. <해피 아워>부터 <드라이브 마이 카> <우연과 상상>까지 그의 필모그래피를 쭉 훑게 되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면 얼마간 그 세계 안에, 인물들의 삶 속에 깊숙이 들어갔다 나온 듯한 기분으로 지내게 된다는 게 좋았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중에서도 유독 긴 여운을 남긴 작품이다. 영화는 평화로운 도쿄 근교의 작은 산골 마을에 글램핑장을 건설하려는 도시 세력이 등장하면서 벌어지는 갈등을 그린다. 자연의 대척점에서 그를 위협하는 존재인 인간, 선과 악의 경계, 사슴과 어린아이 ‘하나’ 의 생사. 다양한 상징의 의미를 헤아리며 감상하기에도 흥미롭지만, 이 영화를 다시 꺼내 보고 싶은 이유는 풍경 과 음악 때문이다. 영화의 출발점이 된 이시바시 에이코의 깊은 현악기 선율이 층층이 쌓여 흐르는 가운데, 울창한 숲의 모습을 4분 동안 비추는 오프닝 장면을 시작으로 흰눈으로 뒤덮인 나가노현의 자연을 관조하듯 담아낸 장면들이 끝없이 이어진다. 한 해를 여는 날에는 이처럼 모든 것을 압도하는 자연의 존재감을 다시 마주하고 싶은 마음이 들 것만 같다.

팀 밀런츠 <이처럼 사소한 것들>

한 사람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것은 어쩌면 삶에서 만난 작고 사소한 순간들일지 모른다. 짧은 분량의 소설로 삶의 본질에 관한 통찰을 그린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어 올겨울 관객과 만난다. 영화는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주인공 ‘빌 펄롱’(킬리언 머피)이 석탄 배달을 위해 들른 수녀원에서 우연히 불의를 목격한 뒤,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내리는 어떤 선택에 관한 이야기다. 똑같이 흘러가는 일상 속 어딘가 어긋남을 느끼던 펄롱은 선택의 기로에서 지금의 자신을 이루고 있는 ‘사소한 것들’을 떠올린다. 어린 시절 자신을 따뜻하게 보듬어준 사소한 친절, 말이나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아도 느낄 수 있던 다정함을. 끝내 자신 안의 목소리를 외면하지 않기로 선택한 한 사람의 용기를, 그 굳건한 마음을 곱씹으며 새해를 열고 싶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희생>

일출의 잔상 때문인지 새해 첫날에는 활활 타오르는 무언가를 보고 싶다.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상 시인이라 불리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유작 <희생>은 주인공 ‘알렉산더’가 사랑하는 가족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고 기도하며 집에 불을 지르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성냥으로 흰 천에 불을 붙이고, 집이 활활 타오르다 무너지는 모습 을 9분 가까운 롱테이크로 담아내는데, 이때 장 뤽 고다르가 그의 영화에 대해 말한 것처럼 ‘기적으로서의 영화 체험’이 가능해진다. 알렉산더가 자신의 믿음 아래에서 집을 태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생을 생답게 살아가는 것이란 과연 무엇일지 고민하게 된다. 기도하는 마음, 무언가를 믿겠다고 다짐하는 것이야말로(그 믿음이 무엇이든) 우리가 허무와 무의미를 넘어 ‘지금’에 살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아닐지 생각하게 하는, 숭고한 영화다. 최근 4K로 리마스터링해 재개봉했으니, 불의 현현을 선명히 들여다보며 한 해를 맞이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