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력하지 않다. 우리가 생각보다 강한 힘을 지녔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한다.”
세상의 흐름 속에서 나 자신을 잃지 않고, 서로를 굳게 믿는 것.
남궁선 감독이 영화 <힘을 낼 시간>을 완성하며 건져 올린 위로.
평균 나이 26세, 전 재산은 98만원. 영화 <힘을 낼 시간>의 주인공은 은퇴한 아이돌 멤버들이다.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해 무대를 벗어나야 했던 ‘러브앤리즈’의 수민(최성은)과 사랑(하서윤), ‘파이브 갓 차일드’의 태희(현우석)는 뒤늦게 학창 시절에 못 간 수학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어디로 향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른 채 발걸음을 옮기며 그들은 비로소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 살핀다. K-pop 아티스트를 꿈꾸며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혹독한 경쟁을 이어온 세 친구의 현재를 묵묵히 지켜보는 이 작품은 남궁선 감독이 선보이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열다섯 번째 인권영화다. ‘문화 예술 산업에 종사하는 청년의 인권’을 다루지만 모두의 삶과 맞닿아 있는 이야기를 스크린에 펼쳐내며, 감독은 다정한 위로를 건넨다. 치열하게 나아가다 잃어버린 나 자신을 되찾기를 바라고, 내 곁의 사람들을 좀 더 믿어도 괜찮다고. 지금이 우리가 힘을 낼 시간이라고.
두 번째 장편 <힘을 낼 시간>이 지난 12월 18 일에 개봉했다. 극장 상영을 기다리는 마음이 어땠나?
2년 전 이맘때쯤 <힘을 낼 시간>을 열심히 촬영한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와 같은 계절에, 특히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에 개봉하게 되어 기뻤다. 앞서 전주국제영화제의 한국경쟁 부문 대상 등을 수상하며 큰 사랑을 받았고, 많은 관객이 공감해준 덕분에 긴장을 덜 수 있었던 것 같다. 영화를 만들며 했던 여러 걱정은 내려놓고, 극장을 찾아와줄 사람들에 대한 믿음과 설렘을 품은 채 개봉일을 맞이했다. 행복한 기다림이었다.(웃음)
과거 아이돌로 활동했던 세 친구가 뒤늦은 수학여행을 떠난다는 설정이 흥미롭다. 이들의 목적지가 제주인 이유가 있나?
제주는 영화 제작 당시의 여러 조건이 맞아떨어져 선택한 행선지다. ‘친한 동료들과 함께 영화를 한 편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었는데, 그때 동료 한 명이 제주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럼 이곳을 배경으로 무슨 이야기를 해볼까 고민하던 중, 국가 인권위원회로부터 인권영화 프로젝트에 함께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일단 수락하고, 제주를 배경으로 한 인권영화를 구상하다 보니 ‘제주로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돌 출신 청년들’이 떠올랐다.
아이돌 출신 청년들을 인권영화의 주인공으로 선정한 계기는 무엇인가?
아이돌 시스템이 우리나라 청년들의 사회적 현실을 많이 반영한다고 느꼈다. 상품 가치를 좇는 현대 자본주의 노동시장에서 고군분투하는 젊은이들이 겪는 고충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아이돌이라는 소재가 그 지점을 잘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이돌이 주인공이지만 더 넓은 범위의 인간, 우리 모두의 인권을 다룬다는 생각으로 시나리오를 써나갔다.
독립영화인 만큼 적은 수의 인원과 협업했을 것 같다. “능력치 높은 소수 정예의 동료들로 독립영화의 자유 안에서 시너지를 내보려고 했다”라고 밝힌 적도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시너지를 기대했나?
20명 정도의 적은 규모로 팀을 구성하면, 동료들과 더 긴밀히 호흡하며 여러 상황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다. 감독의 구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동료들이 각자 자유롭게 임할 수 있도록 가능성을 열어두기로 작정하고 시작한 영화이기도 하다. 여기에서는 무엇을 찍겠다는 정도의 이야기만 나누며 ‘무계획을 계획’한 거다.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로 촬영에 돌입하니, 엄청난 에너지가 집중되는 순간을 자주 경험했다. 한번은 배우들이 바다를 멀리서 바라보는 장면을 찍다가 갑자기 난간을 넘어 해변으로 달려갔다. 카메라도 얼떨결에 배우들을 쫓아갔고, 나도 “어휴” 하면서 뛰어갔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웃음) 배우를 포함한 참여자 모두가 현장에서 최대의 능력치를 발휘했다는 느낌이 들 때 정말 짜릿했다. 힘들면서도 뿌듯한 작업이었다.
현장에 표출되는 배우의 연기를 볼 때 무엇이 가장 인상 깊었나?
각 배우가 캐릭터에 동화된 듯한 순간들이 진한 인상을 남겼다. 이번 영화는 전반적으로 대사가 많지 않고, 말보다는 표정과 몸짓을 비롯한 배우의 표현을 통해 느낄 수 있는 것이 많다. ‘수민’을 연기한 최성은 배우와는 첫 장편 <십개월의 미래>에 이어 또 한번 함께했는데, 가만히 서 있는 그의 얼굴만으로 전달되는 감정이 있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태희’의 순수한 면을 닮은 현우석 배우가 역할에 완전히 몰입하며 불안한 음정으로 달콤하게 노래하는 모습이 너무 웃겨 NG가 난 일도 생각난다.(웃음)
K-pop 아티스트들이 주인공이기 때문에 음악을 특별히 신경 쓰기도 했나?
K-pop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들여오진 않았다. 세 사람이 아이돌 출신이라는 특성에 주목하기보다 이들을 자연인으로 바라보려고 했다. 10여 년간 꾸준히 협업해온 ‘모임 별’이 음악을 담당했는데, 그들의 기존 곡이 지닌 쓸쓸한 정서가 작중 인물들과 어울린다고 느꼈다. 그래서 영화에 대한 모임 별의 해석을 따르려고 했다. 다만 러브앤리즈의 인기곡 ‘시크릿 러버’는 주인공들이 좋아하지 않는 곡으로 설정했기 때문에 내가 만드는 게 낫겠다 싶더라.(웃음) 귀에 착착 감기지만 가사를 곱씹으면 살짝 불쾌할 수 있는 음악을 생각하며 직접 작사, 작곡을 했다.
<힘을 낼 시간>을 함께 만들어가는 경험이 내게는 소중한 여정이었다. 이 여정을 계기로 나 자신이 많이 바뀌었다고 느낀다. 삶에서 중요한 것, 우리를 진정으로 강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알 것 같다.
이번 영화를 만들기 위해 실제 K-pop 아티스트로 활동한 사람들을 취재했다고 들었다. 그들과의 만남이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취재 초반엔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혹독한 경쟁을 치르는 삶을 알아가는 데 초점을 뒀다.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무력감을 비롯한 심리적 트라우마가 더욱 와닿았다. 마음이 무거워지더라. 당사자들의 경험을 직설적이거나 자극적으로 다루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좀 더 보편적인 일화들을 영화에 담아내려 했다. 특정한 사건이 벌어지기보다는 인물들의 현재를 그저 지켜보는 단순한 구조를 기반으로 시나리오를 써나갔다.
이야기 구조가 단순한 데도 인물들이 겪어온 어려움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러브앤리즈의 리더 ‘수민’은 본인만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동료를 성심껏 챙긴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고, 노력으로 난관을 돌파해내려 하는 수민이 현대의 청년들과 비슷하다고 본다. 그가 자신을 돌볼 새도 없이 타인부터 챙기며 모든 책임을 지는 모습은 오늘날 리더들의 가혹한 상황을 보여주기도 한다. 수민처럼 일에 매몰된 삶을 이어가다 보면, 일 이외의 것에는 서툴 수 있겠다 싶었다. 친구들과 여행을 왔지만 막상 놀려고 하니 뭘 해야 할지 모르고, 마음도 괜히 불편해지는 거다.
놀거리를 찾던 주인공들이 발성 연습을 하고, 음악에 맞춰 춤추던 모습이 떠오른다. 세 사람 중에서도 ‘사랑’이 유독 반짝이던 장면인 것 같다.
사랑이는 퍼포먼스를 하는 순간을 무엇보다 즐거워하는 아이다. 그래서 무대에 오르지 못하게 되었을 때 마치 고향을 잃은 듯한 상실감을 느꼈을 거다. 사랑이처럼, 많은 K-pop 아티스트가 무대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일을 아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무대에 설 기회를 얻는 K-pop 아티스트는 일부에 불과한 듯하다. 아이돌로 데뷔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맞다. 아이돌이라는 꿈을 스스로 결정하더라도, 이를 이뤄가는 과정에서 겪는 일들까지 직접 선택한 게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높은 수준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 자신을 채찍질하며 완벽을 기하고, 불안감이나 부당함을 느끼더라도 굳이 알리지 않고 감내할 때도 있을 거다. 어쩌면 그 모든 시간을 지나오고,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본인이 어떤 일들을 겪어왔는지 돌아볼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업계 내외의 여러 상황이 복잡하게 맞물려 있는 딜레마 같은 구조이기 때문에 아이돌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가 충분히 다뤄지기 어려웠을 것 같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그 딜레마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동의한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중요하다. 일종의 터부로 여기며 감추기보다는 드러내고 보여주는 거다. 그게 내가 딜레마 속에서 찾을 수 있는 실마리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번 영화 또한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겠다. 이야기의 소재가 밝진 않지만,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갈 때 마음이 참 좋더라. ‘우리가 여기에 있다’라는 예고편 속 문장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말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지금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며 살아가야 하는데, 사회에서 요구하는 일들을 해내며 바쁘게 지내다 보면 나 자신을 잃어버리기 쉬운 것 같다. 그러니 스스로를 덜 인색하게, 더 관대하게 대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야 나라는 사람이 지워지지 않고, 나로서 살아가는 날들을 더 많이 만들어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게 그 어떤 성취나 성공보다 귀중하다고 생각한다.
<힘을 낼 시간>의 수민, 태희, 사랑도 여행의 시간을 통해 그 점을 깨닫지 않았을까 싶다.
제주 여행이 그들에게는 삶의 다음 단계를 찾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과정이었을 거다. 세 사람은 여행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며 내가 누구인지 살폈고, 사회가 원하는 모습만을 보여주기 위해 애쓰지 않고 유약한 면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내 아픔을 알아보며 “힘들었겠구나”라는 공감의 말을 건네는 친구들이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다정한 발화가 가진 힘이 있고, 서로의 마음을 헤아릴 때 쌓이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굳게 다져진 그들의 관계가 영화 이후의 삶을 지켜주는 안전망이 되지 않을까 싶다.
세 사람의 단단한 관계를 떠올리니, 이 영화가 인간에 대한 신뢰를 심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번에 취재하면서 그 신뢰가 많이 깨졌다.(웃음) 인류애를 잃는 듯한 느낌을 자주 받았는데, 그럼에도 작중 인물들의 여행기를 통해 인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싶었다. 사람은 여전히 ‘사람다울’ 수 있고, 그렇기에 우리는 서로에게 어느 정도 의지할 수 있다는 걸 일깨워주는 작품이 되기를 바란다.
인간에 대한 신뢰를 기반으로 다시 살아갈 힘을 전하는 영화의 제목이 직관적이라 마음이 더욱 따스해진다. 이 작품을 만든 남궁선 감독에게 ‘힘을 낼 시간’은 언제인지 묻고 싶다.
내가 책임지는 게 있다고 느낄 때. <힘을 낼 시간>이란 제목은 내가 메모장에 적어둔 문장에서 비롯되었다. 우리만의 독립영화를 만들자며 시작한 작업이 인간의 존엄성을 찾는 일로 이어지며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당시 내가 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 ‘이젠 내가 힘을 낼 시간이야.’ 스스로에게 건네는 얄팍한 위로가 아니라, 나의 온 힘을 짜내 영화에 쏟아야겠다는 다짐으로 쓴 말이다.
영화는 감독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지 않나. 동료들이 영화에 더해준 힘도 있었을 것 같다.
그렇다. 동료들의 역량을 믿었고, 우리가 언제든 서로를 든든히 지탱해줄 수 있을 거란 느낌이 들 때 힘이 많이 났다. <힘을 낼 시간>을 함께 만들어가는 경험이 내게는 소중한 여정이었다. 이 여정을 계기로 나 자신이 많이 바뀌었다고 느낀다. 삶에서 중요한 것, 우리를 진정으로 강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 알 것 같다. 우리 자신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토록 소중한 작품을 세상에 선보인 지금, 남궁선 감독이 믿는 영화의 힘은 무엇인가?
물론 영화는 어떠한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현실을 고발하는 단초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내게 영화란 ‘경험’ 그 자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인물의 삶 속으로 들어 가 그 모든 감각을 느낄 수 있지 않나. 백 번의 설명보다 한 번의 체험이 나와 다른 삶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다른 매체가 대체할 수 없는 영화만의 힘이다.
3년 전 마리끌레르와의 인터뷰에서 ‘영화를 만들며 놓치고 싶지 않은 것’으로 ‘삶의 진실’을 꼽았다. 만약 지금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어떻게 답하고 싶나?
돌이켜보니 참 거창한 대답이었구나 싶지만(웃음), 여전히 삶의 진실이다. 그중에서도 삶의 어떤 순간이 자아내는 감각. 영화는 기본적으로 픽션, 한 편의 거짓말이지만 그 안에 생생한 감각이 분명히 담겨 있다. 일상에서 놓치기 쉬운 감각들이 영화를 통해 포착되어 관객의 마음속에 되살아날 수 있다면 좋겠다.
차기작에는 어떠한 삶의 감각이 담길지 궁금해진다.
요즘 부산에서 차기작 촬영이 한창 진행 중이다. <고백의 역사>라는 제목의 상업영화로, 장르는 ‘청춘 로맨스’ 다. 예전엔 이런 장르는 내가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힘을 낼 시간>을 완성하고 나니 왠지 가능할 것 같았다. 마음을 열고 또 다른 장르에 도전하면서 큰 희열을 느끼고 있다. 2025년에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되니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웃음)
남궁선표 영화의 새로운 매력을 마주할 날을 기다리겠다.(웃음)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인터뷰를 읽는 이들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우리는 무력하지 않다. 우리가 생각보다 강한 힘을 지녔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그 힘이 각자의 삶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발현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