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마리끌레르 영화제는 한국과 이란, 일본과 이탈리아 등 세계 곳곳의 동시대성을 담은 영화 17편을 상영한다.
4명의 영화계 인사가 이 중 함께 보고 싶은 아홉 편의 작품에 대한 글을 보내왔다.
스크린을 아름답게 수놓을 장면과 이야기들을 다 함께 극장에서 마주할 날을 기다리며.

writer
이윤영 시네마토그래프 대표
<신성한 나무의 씨앗>
감독 모함마드 라술로프
출연 미사그 자레, 소헤일라 고레스타니, 세타라 말레키, 마사 로스타미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이란 사회를 향한 감독의 호소이자,
영화가 단순한 형식 너머의 진실을 품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선언이다.
수천 년 동안 이어져온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의 권리와 자유를 체계적으로 억압해왔다.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은 권위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 돼왔으며, 그 오랜 역사의 구시대적 망령은 오늘날까지도 잔재해 있다. 특히 이란을 비롯한 이슬람권 국가에서는 이러한 폭력이 법과 제도, 문화 속에 깊게 뿌리 내려 극단적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의 영화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이러한 억압의 구조를 그 뿌리부터 씨앗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추적하며 그 안에 숨어 있는 폭력의 얼굴을 응시한다.
주인공 이만(미사그 자레)은 두 딸을 둔 중년의 판사다. 가족은 승진을 눈앞에 둔 그가 출세해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게 되리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그러나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한 여성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이에 항의하는 반정부 시위가 거세지면서 이만과 두 딸 사이에 균열이 생긴다. 그러던 중에 이만이 소지하고 있던 권총이 사라지자, 그는 가족을 의심하고 몰아세우다 끝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만다. 테헤란을 중심으로 거대한 정치적 논의를 펼치는 듯하던 영화는 점점 한 가족의 이야기로 시선을 좁혀 들어가고, 종국에는 테헤란을 벗어나 이외의 인물을 배제한 채 이만의 가족만을 스크린에 남긴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정치적 논의를 확장한다. 가족은 사회의 축소판처럼 기능하기에, 영화에서 벌어지는 가정 폭력은 이란 사회 전반의 권위적 구조를 은유하면서 동시에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가정 폭력의 실상을 정면으로 마주한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이처럼 형식과 내러티브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무너뜨리며 관객을 혼란 속으로 밀어넣는다. 다만 그 혼란은 종착지 없는 방황이 아니라, 이란 사회가 처한 모순과 불합리를 있는 그대로 체험하게 하기 위한 전략이다. 영화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이라 여겨지는 틀조차 과감히 내던지며 장르의 함정에 빠지는 듯 보이지만, 오히려 그 함정을 역이용해 고발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또렷하게 드러낸다.
정치와 사회, 가족과 역사라는 복잡한 담론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에 관한 모함마드 라술로프 감독의 치열한 고민은 거대한 구조를 비판하기보다는 미세한 심리 묘사의 방향으로 돌아선다. 그리고 영화는 이러한 전략을 통해 전 세계 어느 곳의 관객에게나 가닿을 수 있는 보편성을 획득한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이란 사회를 향한 감독의 호소이자, 영화가 단순한 형식 너머의 진실을 품을 수 있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선언이다. 이 영화는 현재 이란이 처한 상황에 대한 절절한 기록인 동시에, 앞으로 이란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감독은 억압받는 이들의 목소리가 얼마나 쉽게 침묵을 강요당할 수 있는지 일깨우고, 표현의 자유가 위협받는 시대에 예술이 가리켜야 할 방향을 또렷하게 제시한다. <신성한 나무의 씨앗>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반드시 목격해야 할 영화이자, 하나의 사건이다.
<해피엔드>
감독 네오 소라
출연 쿠리하라 하야토, 히다카 유키토, 하야시 유타, 시나 펭, 아라지

가끔 청춘이라는 개념을 정의해보려 애쓰곤 한다. 하지 만 청춘을 지나온 이도, 지금 지나고 있는 이도 이 모호한 단어 앞에서 말문이 막히거나 난색을 보이기 일쑤다. ‘청춘’하면 단번에 떠오르는 이미지야 있지만, 그마저도 고정관념에 묶여 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한편 청춘은 ‘어리니까 모르는 것들’과 ‘어리니까 아는 것들’이 미묘하게 혼재된 상태이기에, 여러 매체에서 불안한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불안은 단지 성장기에 겪는 감정적 동요가 아니라 사회구조에서 발현되는 감각이기도 하다. 어떤 사회나 체제하에서 청춘은 기득권이 짜둔 프레임에 순응해야 하는 존재로 손쉽게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필연적 고통이 영화 <해피엔드>의 발단이 된다.
영화는 인상적인 음악과 이미지로 시작한다. 침묵과 진동을 한데 끌어안은 음악과 붉은빛을 시작으로 서서히 드러나는 야경의 이미지가 관객을 순식간에 영화 속으로 끌어당긴다. 네오 소라 감독의 <해피엔드>는 근미래의 도쿄를 배경으로 부조리한 AI 감시 체제가 도입된 학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얼핏 보기엔 SF의 장르적 장치로 보이는 이 기묘한 설정은 기득권이 낳은 사회적 부조리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장치로, 나아가 청춘에게 지워진 불안이라는 감각을 은유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교복, 교실, 규칙, CCTV 등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이 AI의 낯선 리듬 속에서 기묘하게 일그러지고, 그 안에서 학생들은 스스로를 ‘감시되고 분류되어야 하는 존재’로 자각한다.
<해피엔드>의 이토록 다양한 군상들 사이에서,
청춘은 무조건적 희망을 보여주는 존재가 아니라
복잡한 감정과 선택이 모여 이뤄진 총체로 그려진다.
그렇게 학교 안팎에서 부조리를 목격한 <해피엔드> 속 일부 학생들은 기득권 세력에 거세게 저항한다. 그런 반면 자신 안에 내재한 불안에서 비롯된 두려움에 승복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어떤 이는 싸우기보다 침묵을 선택하고, 또 어떤 이는 체념과 타협을 생존의 방식으로 삼는다. <해피엔드>의 이토록 다양한 군상 사이에서, 청춘은 무조건적 희망을 보여주는 존재가 아니라 복잡한 감정과 선택이 모여 이뤄진 총체로 그려진다. 그러나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이 영화가 희망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분명하다. 체념의 기조가 사회를 뒤덮는 와중에도 청춘이 지닌 저항의 활력으로 거세게 반등하려 시도한다는 점이다. 그 반등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인물의 행위가 스크린 위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이런 흔들림 속에서 영화는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감정적인 맥락을 굳게 갖춘다.
결국 부조리를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회귀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이에 대한 대답은 ‘학생들’이라는 공통분모를 향하고 있다. <해피엔드>는 마지막까지 이러한 청춘의 감각을 포기하지 않고, 성급히 결론지으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청춘의 가장 솔직한 증언처럼 다가온다. 청춘은 그렇게 지나가는 짧은 순간들을 기억하는 힘이다. <해피엔드>는 그 순간을 향한 굳은 믿음을 보이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