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마리끌레르 영화제는 한국과 이란, 일본과 이탈리아 등 세계 곳곳의 동시대성을 담은 영화 17편을 상영한다.
4명의 영화계 인사가 이 중 함께 보고 싶은 아홉 편의 작품에 대한 글을 보내왔다.
스크린을 아름답게 수놓을 장면과 이야기들을 다 함께 극장에서 마주할 날을 기다리며.

writer
진명현 무브먼트 대표

<글로리아!>

감독 마르게리타 비카리오
출연 갈라테아 벨루지, 카를로타 감바, 베로니카 루체시

<글로리아!>는 아름다운 화음으로 가득한 음악영화이자,
낡은 제도와 억압 사이에서도 굳건하게 피어나는
여성의 연대를 뭉클하게 그려낸 여성영화다.

1800년대 초, 베네치아 근교의 산티냐시오 수녀원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 <글로리아!>는 아름다운 화음으로 가득한 음악영화이자, 낡은 제도와 억압 사이에서도 굳건하게 피어나는 여성의 연대를 뭉클하게 그려낸 여성영화다. 시대극 특유의 감성을 간직하면서도 리드미컬한 편집과 개성이 뚜렷한 캐릭터들의 앙상블이 어우러져 다채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완벽한 해피엔드를 향해 경쾌하게 내달리는, 요즘 보기 드문 영화이기도 하다.

수녀원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예배장의 지휘자인 사제 페를리나(파올로 로시)에게 학대당하는 주인공 테레사(갈라테아 벨루지)는 스스로 침묵을 택한 인물이다. 어둡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테레사는 사실 아이들과 함께 일상의 도구로 음악을 만들어내는 기쁨을 이미 알고 있는 존재다. 이 작은 수녀원에는 테레사 외에도 놀 라운 재능을 품은 수녀들이 있다. 가부장제의 억압과 가톨릭 제도의 경직된 틀 안에서도, 그들의 음악을 향한 꿈과 열정은 멈출 줄 모른다.

어느 날 새롭게 선출된 교황이 수녀원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수도원은 그를 맞기 위한 음악회를 준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페를리나는 도무지 새로운 곡을 쓸 수 없는 고갈 상태에 놓여 있다. 재능 있는 성가대 소녀들을 눈앞에 두고도 그는 잘못된 선택을 거듭하고, 상황은 점점 최악으로 치닫는다. 그때, 이미 예술가로 거듭날 준비를 마친 테레사와 성가대 소녀들이 서로에게 다가서기 시작한다. 그렇게 페를리나가 상상조차 하지 못한 그들만의 하모니가 조용히 시작된다.

‘영광’을 뜻하는 라틴어 ‘글로리아’에 느낌표가 붙은 제목 ‘글로리아!’는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노래’라는 뜻 또한 품고 있다. 이탈리아의 싱어송라이터이자 작곡가, 배우 겸 감독인 마르게리타 비카리오의 연출 데뷔작인 이 영화는 초반부에 “명심하렴. 어색한 음끼리 잘 어울리는 법이란다”라는 대사를 통해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를 넌지시 암시한다. 영화는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안고 같은 공간에 머물던 이들이 마침내 하나의 방향으로 향하며 숨겨둔 용기를 꺼내 결집하는 이야기이자, 권력과 편견이라는 견고한 벽을 함께 돌파해가는 이들이 경험하는 감정적 융화의 기록이다. 영화의 백미라 할 만한 후반부의 음악회 장면은 서로에게 다가서리라고 상상하지 못했던 테레사와 수녀들이 하나의 목소리로 만들어내는 감동적인 하모니로 스크린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마르게리타 비카리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왜 우리가 이름을 기억하는 여성 클래식 작곡가가 존재하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고 말한 바 있다. 그 질문에서 출발한 긴 여정이 <글로리아!>로 완성되었고, 그 덕분에 우리는 역사가 세심하게 기록하지 않은 여성 예술가들의 생생한 활력을 스크린 너머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대도시의 사랑법> (드라마)

감독 홍지영
출연 남윤수, 진호은

우리는 인생에서 얼마큼의 용기로, 어디까지 향할 수 있을까? 우리의 용기가 생겨나는 곳은 마음과 몸속 어디에 숨어 있을까. 여기, ‘사랑이 평생의 소원’이라는 소박하면서도 위대한 꿈을 꾸는 한 남자를 스치고, 만지고, 할퀴고 간 흔적이 있다. 그 모든 흉터가, 상처가, 딱지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질 사랑의 패턴임을 온힘을 다해 말하는 드라마가 <대도시의 사랑법>이다. 알싸한 우럭 한 점을 삼키고 나면 뭉클한 사랑의 맛이 느껴지는, 이 이상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불판에서 우리는 기어코 자신의 소원과 마주하는 고영(남윤수)을 본다. 영화는 자신의 마음과 몸을 온통 헤집어 그 용기를 찾아낸 이의 인생이 어떤 빛깔로 물드는지 마주하게 한다.

한국에서 10만 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이자 부커상과 더블린 문학상 후보에 오른 동명의 연작소설을 시리즈로 각색한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은 손태겸, 허 진호, 홍지영, 김세인 4명의 감독이 연출을 맡았고 원작자인 박상영 작가가 시리즈의 대본을 썼다. 주인공 고영 역할을 맡은 배우 남윤수를 비롯해 진호은, 나현 우, 권혁, 김원중, 이수경 등 배우들의 신선한 에너지로 채워진 이 시리즈는 국내 퀴어 장르의 스펙트럼을 넓힌 작품으로서 갖는 의미가 크다. 소설과 영화, 드라마 시리즈로 이어지는 <대도시의 사랑법> 릴레이는 서로 다른 플랫폼에서 탄탄한 팬덤을 구축하는 동시에 각 작품의 완성도와 대중성을 확보했고, 이는 향후 한국 퀴어 콘텐츠의 다양성을 넓히기 위한 발판을 마련한 사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대도시에서의 사랑법이
더 많은 이들이 수긍할 만한
법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서기를 바란다.

성소수자인 고영은 사랑을 통해 세상을 만난다. 그리고 그 사랑은 타인들로부터 주어진다. 우연히 만난 이가 그저 우연으로 끝나기도 하고, 어떤 우연은 질긴 인연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이별은 안쓰럽고, 어떤 이별은 고통스럽다. 사랑이 하는 일이 이토록 복잡한데도, 고영은 비록 지칠지언정 포기하지 않는다. 사랑이 그에게 주는 것들이 그 모든 것을 앞서기 때문이다. “사랑밖에 난 몰라”를 외치던 고영 또한 계절을 지나며 천천히 알아간다. 타인을 사랑하려면 자신을, 내 안의 나를 사랑하는 일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가지각색으로 반짝이는 사랑의 빛깔로 매혹하는 작품인 동시에, 누군가가 꺼내 보인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동경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고영의 두 번째 사랑, 노영수(나현우)의 “좋아해요, 당신이라는 우주를요”라는 고백은 절대로 풀지 못할 미스터리에 기꺼이 풍덩 뛰어들겠다는 맹세처럼 들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 곳곳의 결혼식장에서는 사랑의 서약이 축복 속에 진행되고 있지만, 그 풍경은 어쩐지 불공평한 아름다움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삶의 모서리에서 여전히 세차게 울려 퍼지고 있는, 사회에서 인정 받지 못한 이들의 맹세에 더욱 귀 기울여야 한다. 드라마 <대도시의 사랑법>에서처럼 축가를 불러줄 이들이, 드라마를 보고 ‘차별금지법’의 의미를 검색해보는 이들이, 함께 어깨동무하고 퀴어 퍼레이드를 누빌 비퀴어인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대도시에서의 사랑법이 더 많은 이들이 수긍할 만한 법의 테두리 안으로 들어서기를 바란다. 이제는 우리 안에 깊숙이 자리한 각자의 용기를 꺼낼 때다. 늦지 않았다.

<9월이 지나면>

감독 고형동
출연 조현철, 임지연

“너는 나카야마 미호한테 고마워해야 해.” 정말이다. 누군가 고개를 뒤로 젖히는 단 몇 초의 순간으로도 가능 해지는 감정이 있다는 걸, 승조(조현철)는 미처 몰랐을 것이다. 고형동 감독의 단편 <9월이 지나면>은 한국 단편영화계의 클래식으로 불릴 만한 작품 중 하나다. 2013년에 공개된 이 영화는 제11회 아시아나국제단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 제9회 제주영화제 최우수 작품상, 제12회 미쟝센 단편영화제 I love short! 관객상을 수상하며 단편영화를 즐겨 보는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 대학교 건축학과를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건축설계 공모전을 앞두고 선영(윤희진)의 설계도가 사라지는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늦은 밤까지 설계실에 남아 있던 지연(임지연)은 선영의 설계도를 훔친 인물로 의심받는다. 학과 설계실 한쪽에 모기장을 쳐두고, 무리에 섞이지 못한 채 홀로 지내던 지연에게 승조는 자신의 집에서 모형 작업을 함께 하자고 제안한다. 늦은 밤, 승조의 집에서 기타를 본 지연이 연주를 청하고 머뭇거리던 승조는 결국 기타를 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
작한다.

<9월이 지나면>은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걸 감지하지만
그 변화가 나와 우리에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쉽게 설명하지 못하던 이들에게 건네는 조용한 편지 같다.

승조가 지연에게 불러주는 그 노래, 록 밴드 그린 데이의 ‘Wake Me Up When September Ends’를 변주한 영화의 제목 ‘9월이 지나면’은 여름과 가을 사이, 계절과 계절 사이에 놓인 두 사람의 미묘한 감정선을 천천히 따라가는 영화다. 지연이 느끼는 외로움과 호기심, 두려움과 후회를 굳이 긴 대사로 설명하지 않아도, 배우 임지연은 그 복잡한 감정들을 표정 변화만으로 설득력 있게 건넨다. <9월이 지나면>은 드라마 시리즈 <더 글로리>와 영화 <리볼버>, 드라마 <옥씨부인전> 을 통해 다채로운 색깔을 보여준 배우 임지연의 필모 그래피 중 가장 잔잔하고 서정적인 작품이자, 배우의 또 다른 얼굴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여기에 배우 조 현철이 특유의 뉘앙스로 따뜻한 온기를 더한다. 삭발 에 가까운 짧은 머리, 무심한 듯하지만 깊은 배려가 밴 몸짓, 속내를 쉽게 읽을 수 없는 얼굴. 그런 승조가 영화 <러브레터>의 포스터를 따라 하는 지연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하는 순간은 이미 수많은 관객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명장면이다.

<9월이 지나면>은 계절이 바뀌고 있다는 걸 감지하지만, 그 변화가 나와 우리에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쉽게 설명하지 못하던 이들에게 건네는 조용한 편지 같다. ‘잃어버린 것은 잊지 못한다’라는 그린 데이의 노래 가사처럼 영화는 잊히지 않는 어떤 순간들을 간직한 이들을, 털어놓을 수 없던 시간을 품은 이들을 위로한
다. 한밤중 지연을 위해 달리는 승조, 그런 승조의 뒤를 쫓던 지연의 얼굴. 둘은 서로를 보지 못한 채 달리지만, 마음만은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계절을 함께 겪은 이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사사로운 기척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기척을 느끼는 순간에 이름을 붙인다면, ‘사랑의 초입’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