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마리끌레르 영화제에서 자신의 영화 세계를 펼칠 2인의 감독이
나의 영화 안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흔들리며 달려가는 모든 존재에게
<나미비아의 사막> 감독 야마나카 요코

텅 빈 눈과 세상에 지친 표정, 예측할 수 없는 자유분방한 움직임과 애인에게 가하는 폭력까지. 스물한 살의 ‘카나’(카와이 유미)는 한 단어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제모 전문 에스테틱 숍에서 일하지만, 그 일이 카나를 행복하게 하진 않는다. 남자친구 ‘혼다’(칸이치로)와의 관계가 주는 안정감에 권태를 느끼고 자유로운 예술가 ‘하야시’(카네코 다이치)에게 끌리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파괴하는 폭력적 관계로 치닫는다. 영화 <나미비아의 사막>은 이리저리 흔들리는 카나가 자신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따라간다. 손쉬운 해결책이나 번지르르한 희망을 제시하지 않은 채, 그와 함께 휘청이고 길을 잃을 뿐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안개처럼 흐릿한 서사는 뿌옇고 어지러운 카나의 마음을 더 깊이 응시하게 만든다. 영화의 끝에 다다를수록 우리는 자연스레 알게 된다. 어딘가 이상하고 특이하다고 느껴지던 카나는 그저 지극히 평범한, 이 시대 청춘의 초상임을 말이다.


영화 <나미비아의 사막>은 어디에서 시작한 이야기인가?
카나 역을 맡은 배우 카와이 유미가 이 영화의 시발점이다. 2018년, 내 데뷔작 <아미코>가 일본에서 개봉했을 때, 고등학교 3학년이던 그가 영화를 보러 와 내게 편지를 건넸다. ‘다음 영화를 찍을 땐 저를 캐스팅 후보에 넣어주세요’라고 적힌.(웃음)
당시 카와이 유미는 배우가 되기 전이었다고 들었다. 이후 카와이 유미에게서 무엇을 발견했기에 그로부터 출발한 영화를 만들었나?
어디에나 존재할 것 같은, ‘평범한 사람’을 연기할 수 있는 드문 배우라고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과 뛰어난 연기력을 가지고 있다. 내가 <나미비아의 사막>을 통해 그리고자 한 카나는 특별한 인물이 아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존재하는, 혼란을 겪는 한 청년일 뿐이다. 그가 느끼는 분노나 불편은 이상하거나 별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감정이다. 카와이 유미라면 이 모든 것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스물한 살의 카나는 다면적인 인물이다. 자유분방하면서도 불안정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고, 불안과 무기력의 면면이 존재한다. 배우와 어떤 의논 과정을 거쳐 카나라는 인물을 함께 만들어갔나?
시나리오를 쓰기 전부터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도쿄에 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 혼혈이라는 그의 배경, 가족에 관한 이야기, 일상의 사소한 주제까지 숨김없이 터놓고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후 그 이야기를 곱씹으며 시나리오를 썼다. 그는 대본을 읽고 난 뒤 카나라는 인물이 온전히 이해되고, 모든 게 흥미롭다고 말하더라. 우리가 나눈 대화 덕분에 이 영화의 방향성을 잘 파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촬영 현장에서는 주로 카나의 걸음걸이나 뛰는 모습 같은 몸짓에 대한 연출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카나가 어딘가를 향해 달리는 장면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동시에 그런 카나를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해 화면에 미세한 흔들림을 더했다.
카나가 향하는 대로, 그 몸의 움직임을 재빠르게 따라가기 위해 영화 전반부에는 주로 핸디 카메라를 사용했다. 그가 어떻게 걷고 뛰는지, 그의 움직임이 어떻게 보이는지 고민하며 촬영을 이어갔다. 이후 카나가 자신을 알기 위해 노력하던 시점부터는 카메라를 고정시켜 촬영해 전반부와 다른 방식으로 구성했다.
카나는 나미비아 사막을 보여주는 실시간 스트리밍 영상을 두 번에 걸쳐 시청한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나미비아의 사막’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 싶었나?
여러 상징적 의미가 있겠지만, 하나만 꼽자면 거리감을 나타내고 싶었다. 사람은 자신과 멀리 떨어져 있다고,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할수록 안심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오히려 쉽게 의지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카나 역시 애인에게는 무례하게 굴지만, 상담사처럼 거리가 있는 사람에게는 솔직하게 마음을 연다. 나미비아의 사막도 카나와 아무 관련이 없지만, 카나는 그 영상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는다. 결국 ‘나미비아의 사막’은 카나와 주변 사람들의 거리감을 상징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영화 후반부에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판다개미라는 생물이 있는데 판다처럼 흑백의 외양을 갖고 개미처럼 작아서 멋대로 그렇게 부르지만, 실제론 벌의 한 종류거든요.” 이처럼 영화는 무언가를 쉽게 규정하는 행위에 대해 질문을 건네기도 한다.
맞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에 이름을 붙여 안심하려는 인간의 성향을 온전히 이해하면서도, 타인을 섣불리 판단하거나 분류하고 명명하는 과정에서 많은 것을 놓치게 된다는 우려를 담고 싶었다. 카나가 자신의 병명을 알고 싶어 하는 장면, 애인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려는 모습, 마지막에 이웃과 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 모두 이와 같은 질문을 다루고 있다.

영화를 만들며 동시대 청춘에 대해 많이 고민했을 듯하다.
일본, 특히 도쿄에 살다 보면 일종의 압도감을 느낄 때가 많다. 셀 수 없이 많은 물건이 도처에 깔려 있고, 도저히 다 파악할 수 없는 무수한 정보가 매분 매초 쏟아진다. 없는 것이 없는 세상이어서 그럴까. 정작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없어지고 있다. 내가 품은 희망이 스스로 원하던 게 맞는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순간도 많다. 이처럼 자신이 나아가야 할 이유와 방향을 모르는 채로 그저 달리기만 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 생각했다. 이건 한국 역시 비슷하지 않을까. 마음대로 결정하고 싶지만, 내 마음 자체가 보이지 않는 방황의 시기는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니까. 그런 막막함을 영화를 통해 표현하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모든 걸 절망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는 말 역시 전하고 싶었다.
관객이 카나라는 인물과 어떻게 마주하길 바라나?
카나와 같은 세대라면 ‘나랑 닮았다’ 고 생각하며 자신을 투영하거나, 친구 또는 친구의 친구 같은 거리감으로 바라봐도 좋 겠다. ‘카나가 싫다’는 의견 역시 괜찮다. 왜 싫다고 느끼는지 스스로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과정이지 않을까. 관객이 이 영화를 보면서 그저 각자 느낀 감정에 집중하길 바 란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고, 활발한 대화를 불러일으키는 영화일 테니까. 실제로 이 영화를 통해 관계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는 커플의 후기도 꽤 들었다.(웃음)
<나미비아의 사막>을 완성할 수 있었던 감독 안의 원동력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나?
나 역시 카나처럼 스스로를 알고 싶었다는 것. 이 영화에는 스무 살 전후로 내가 느낀 혼란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 모든 과정이 내가 이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하나의 원동력이 아닐까.
카나가 ‘모르겠다’는 뜻의 중국어인 ‘팅부동(听不懂)’이라고 되뇌는 장면이 있다. 여러 불확실성 속에서 영화를 만들며 잘 모르겠음에도 애써 믿으려 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누군가에게는 이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질 거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영화를 통해 카나라는 한 존재를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이 큰 의미가 있으리라는 것. 여성은 이래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가능한 한 부수고 싶다는 것. 그 두 마음을 품은 채 이 영화를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