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비록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 퇴화해 사라져도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의 그림자를 밝혀주기에 그 순수함만은 간직하게 된다.” _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 중에서

언어의 불완전함과 소통의 불가능성 앞에서.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를 보며 IPA를 마시기.

온갖 불가능성에 대해 생각하는 밤이 있다. 경험을 표현할 언어가 부족하고, 그 언어를 누군가에게 온전히 전달할 수 없으며, 결국 당신과 내가 한 곳을 바라볼 수 없을 거라 단념하게 되는 새벽이 있다. 그럴 땐 잠깐의 어둠을 벗어나기 위해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보여주려는 이들을 찾아 나선다. 책을 펼치고 음악을 틀고 영화의 재생 버튼을 누른다. 도피와 회피의 순간 속에서, 거짓일 수도 있는 믿음을 적립한다. 그 모든 일이 지금의 어둠을 탈피할 찰나의 자위에 불과할 지라도 오늘과 내일의, 먼 훗날의 나에게 희망으로 남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장 뤽 고다르의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가 개봉 60주년을 맞아 오는 6월 4일 극장에서 다시 관객을 만난다. 고다르 영화의 전환점이자 누벨바그의 가장 결정적 순간이라고 불리는, 이 영화가 다시 한국 스크린에 등장한다. <미치광이 피에로>는 따분한 일상과 공허한 사회에 지친 ‘페르디낭’이 ‘마리안’과 함께 도시를 벗어나기로 결심하며 벌어지는, 사랑과 자유를 찾는 여정을 그린다. 물론 그 안에는 혼란과 충돌, 파괴의 순간과 함께하지만 말이다.

영화 <미치광이 피에로>를 분석할 만한 관점은 수없이 많다. 이를 테면 기존의 내러티브를 거부하고 실험적 편집을 넘나들며 던지는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미국의 자본주의와 대중문화에 영향을 받은 당시 프랑스 소비사회에 대한 정치적 저항, 실제 연인이었던 배우 안나 카리나(극 중 ‘마리안’)과 감독 고다르의 관계가 영화에 반영된 방식. 그리고 고다르가 담아낸 예술가로서의 자의식과 자기 폭로적 내러티브 같은 것들 말이다.

카이에 뒤 시네마와 고다르의 인터뷰에서 ‘영화의 주제가 무엇이며 무엇을 의도했냐’는 질문들에 고다르는 한결 같이 답했다. 의도한 바가 없으며 알 수 없다고 말이다. 고다르는 말한다. “어쨌든 저는 이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어렵습니다. 미리 계산해서 만들지 않았어요. 모든 게 한 번에 벌어졌죠. 이 영화에는 ‘대본도 없고, 편집도 없고, 믹싱도 없었다’고 할 수 있어요.”

이처럼 고다르의 영화에는 정답이 없다. 실제로 그는 <필름 소셜리즘>이라는 영화를 “NO COMMENT”라는 자막으로 끝내기도 했다. 그렇기에 <미치광이 피에로>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이 영화를 직접 보는 경험보다 나은 일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이 무용할 수 있다는 사실은 <미치광이 피에로>가 전하는 또다른 질문, 언어와 소통의 불가능성을 수면 위로 건져 올린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표현한다. 페르디낭은 글쓰기와 독서를 통해 이성적으로 내면을 탐구하는 반면, 마리안은 노래와 연기를 통해 감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두 사람의 다름은 오해와 갈등을 불러 일으키고, 이러한 차이는 이들의 소통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극 중 페르디낭은 부둣가에서 노래를 부르던 한 남자를 만나기도 한다. 흘러나오는 노래 위로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눈다. 페르디낭이 묻는다.

“괜찮아요?”

“음악 때문에요. 이게 어떤 의미인지 절대 모를 겁니다. 이 멜로디요. 들려요?”

“아무 것도 안 들리는데.”

“이해를 못 하는군요. 이 음악은 제 인생이에요. 저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죠.”

부둣가의 남자는 이 음악에 담긴 이야기를 격정적으로 쏟아낸 뒤 페르디낭에게 묻는다.

“음악이 들려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요!”

“안 들려요.”

“그럼 그 음악은 세상에 없나요? 평생 들어온 그 부드러운 음악이?”

이 영화는 소통의 실패를 숱하게 보여주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언어의 가능성을 다시 사유하게 만든다. 우리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리 설명해도 전해지지 않는 감정에 절망하지만, 그럼에도 끝내 말하려 하니까. 고다르가 영화 안에서 문학적 독백을 활용하고, 이미지의 파편을 이어 붙여가며 끝내 하나의 영화를 완성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정답이 없는 세계에서 언어는 그 자체로 물음을 던지는 행위이며, 삶을 통과하는 여정이고, 혼란과 충돌 속에서도 또다른 세계를 마주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말은 비록 우리의 매일의 삶에서 퇴화해 사라져도 그것이 가리키는 사물의 그림자를 밝혀주기에 그 순수함만은 간직하게 된다”라는 극중 페르디낭의 대사가 있다. 나와 당신의 말이 서로에게 닿지 않는 상황에도 말이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우리가 여전히 살아 있고,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원하는 순수한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불가능성 속의 가능성을, 침묵 속에서 언어의 진동을 찾아내며 우리가 서로 소통하기를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어는 필연적인 실패 안에서 우리의 삶을 비추고 함께 생각하는 일의 증거가 된다.

<미치광이 피에로>를 다시 스크린에서 만날 그날에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IPA 한 병을 나누고 싶다. 홉의 씁쓸함 뒤로 시트러스, 꽃, 열대과일의 아로마가 입 안을 감싸는데, 처음에는 낯설던 맛이 마실수록 서서히 익숙해져 또다시 찾게 만든다. 언어도 소통도 타인과 만나는 일도 IPA를 마시는 일과 닮았다. 쓰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어도, 끝없이 부딪히는 일에 익숙해지지 않아도, 다시 한 번 말을 건네고 손을 내밀게 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