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게 빛나는 예술은 한 사람의 마음속 어둠을, 삶의 그늘을 밝혀주는 힘이 있다.
캔버스에 스며든 광채, 음악의 반짝이는 선율, 영화와 책에 담긴 눈부신 서사까지.
마리끌레르 피처 에디터 4인이 각자의 일상에서 그러모은 빛의 아름다운 면면.
루카 구아다니노 <아이 엠 러브>

결국 다시 루카 구아다니노다. 게다가 <아이 엠 러브>라니. 하지만 빛을 하나의 조형 언어로 충실히, 섬세히, 무엇보다 아름답게 사용하는 이를 말할 때 루카 구아다니노를 빼고 이야기하기란 어렵다. 거대한 저택에 갇혀 사회적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온 ‘엠마’가 마침내 자기 존재를 찾아 나서는 탈주하는 순간 쏟아지던 황금빛 빛살, 햇살은 풀잎을 통해 반사되고, 살결 위로 반짝이는 빛 무늬, 마침내 생명을 얻은 살, 땀, 바람… 사랑을 경유해 자기 해방을 이룬 이가 내가 나로 살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뻗어 나오는 광채. 어쩌면 나는 이탈리아 산레모의 빛보다 엠마가 용기로 만들어낸 그의 찬란한 빛을 더 사랑한 것 같다. 엔딩 크레디트에 다다르며 루카 구아다니노는 질문한다. 그의 삶은 언제 빛났고, 언제 그 빛을 외면했고, 다시 정면으로 마주했는지를. 유선애 피처 디렉터
미야케 쇼 <와일드 투어>

지역의 식물들을 채집하고 관찰하는 워크숍에 참여하는 대학생 인턴 ‘우메’, 그리고 그를 따르는 중학생 ‘타케’와 ‘슌’. 세 사람은 산으로, 들로 다니며 식물을 발견하고 수집하고 탐구하며 서로를,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발견한다. 식물 채집도,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것도 서툴고 어색하지만, 그래서 모든 발견의 순간이 더 귀하고 사랑스럽게 빛을 발한다. 미야케 쇼 감독은 탐구와 발견의 순간을 담고 싶다는 마음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말과 함께 이렇게 덧붙였다. “누군가와 함께 탐구의 시간을 거친다는 것은 나와 그 사람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기도 해요. 내가 놓친 것을 친구가 발견하고 알려주는 것 같은 거죠. 그건 그 친구와 새롭게 다시 만나게 되는 경험이기도 해요. ‘너에게는 이런 감성이 있었구나’ 하는 놀람과 존경의 마음, 그리고 거기서 사랑을 느끼기도 하죠.” 강예솔 피처 수석 에디터
션 베이커 <아노라>

작년 겨울의 끝자락, <아노라>를 보고 눈가와 코끝이 퉁퉁 부은 채로 상영관을 걸어 나오던 날들이 잔상처럼 남아 있다. 누군가를 쉽게 믿는 마음 때문에 번번이 깨지고 아파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도 지겨워 그저 축축하고 어두운 곳으로 은신하고 싶었던 날들. 그렇게 숨어든 극장에서 <아노라>를 봤다. 뉴욕의 한 스트립 클럽에서 일하는 스트리퍼 ‘아노라’와 사랑이 뭔지도 모르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철부지 남자애의 만남과 이별을 그린 이야기라고, 어리둥절한 채로 시작했다 끝나는 사랑 이야기라고 거칠게 요약할 수도 있지만, 나는 <아노라>가 자기만의 빛을 따라가는 사람에 대해 말하는 영화라 느꼈다. 둘의 결혼을 무효화하기 위해 집으로 찾아온 건장한 남성 3명과 대치하며 아노라가 온몸으로 저항하는 장면에서, 스크린을 뚫고 나오던 그의 맹렬함과 기세에서 빛을 보았다. 자신을 구원해줄 존재 같은 건 세상에 없고, 끝내 지독한 현실에 발 디딘 채 살아가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고 아이처럼 우는 아노라를 보며 생각했다. 빛, 밝음, 고귀함. 아노라라는 이름이 말하듯, 자신을 지키는 선택을 하는 사람에게서는 그 자체로 빛이 난다고. 안유진 피처 에디터
빔 벤더스 <퍼펙트 데이즈>

지난해 이맘때쯤 국내에 개봉한 영화 <퍼펙트 데이즈>를 최근에 다시 봤다. 도쿄의 화장실 청소부 ‘히라야마’(야쿠쇼 고지)의 반복적인 일상을 담담히 따라가는 영화. 일을 시작하기 전에 캔 커피를 뽑아 마시고, 출근길에 카세트테이프로 올드 팝을 듣고, 밤이 오면 책을 읽다가 잠드는 정돈된 삶 속에서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불쑥 벌어진다. 한결같아 보이지만 조금씩 다른 그의 하루하루가 내 일상과 닮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루, 한 달, 1년을 주기로 많은 것이 되풀이되지만 크고 작은 새로움들이 분명 있었을 텐데, 그 의미를 ‘권태’라는 단어로 지워버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앞으로는 내 삶의 촉수를 좀 더 곤두세우고, 사소하게 여겨지는 순간도 온전히 감각해야겠다는 마음이 솟았다. 그렇게 나의 ‘지금’을 성실히 살아가다 보면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매일 아침 집을 나설 때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소 짓고,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볕을 가만히 바라보고, 태양의 붉은 빛을 마주하자 웃음과 울음이 뒤섞인 표정을 짓던 히라야마의 마음을. 삶의 빛나는 찰나들을 발견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김선희 피처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