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에게 삶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겨우 버티는 것이기도 하다.
1957년, 시인 김수영은 격변의 시대 속에서 떠밀려오는 불행에 저항하고자 시를 썼고, 작가 권여선의 소설 속 주인공은 그의 시를 읊조리며 생의 고단함 앞에 의연해지고자 한다.
그 모습은 감독 강미자의 마음에 고여있던 아픔을 건드리며 영화 <봄밤>이 되고, 그렇게 또 위로를 건넨다.

산다는 게 참 끔찍하다. 그렇지 않니? 권여선의 소설 <봄밤>을 여는 첫 문장이다. 삶의 이름을 한 어두컴컴한 터널을 하염없이 걷고 있는 주인공은 알코올 중독자 영경과 류머티즘으로 온몸이 굳어가고 있는 수환이다. 두 사람은 한 줄기 희망도 없는 고통에 익숙한 서로의 삶을 단번에 알아챈다. 그리고 사랑을 한다. 서로의 짐을 나눠 메고, 함께 절망 속을 헤엄치고, 죽음의 그림자까지 끌어 안으며.

벼랑 끝에서도 애절하게 사랑하는 영경과 수환의 모습은 감독 강미자가 그 아픔을 영화로 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했다. 그렇게 영화 <봄밤>은 만들어졌다. 영화는 소설을 충실하게 재현하기보단, 두 사람의 감정의 밀도를 묘사하는 데 집중했다. 원작에 등장했던 영경의 언니들과 수환의 가족 등 다른 등장인물들이 생략되고, 두 사람이 함께 보낸 12년이라는 시간이 그저 겨울이 지나고 목련이 꽃망울을 맺는 모습으로 모호하게 표현된 이유다.

영경(한예리)은 이혼 후 남편한테 아이까지 뺏기면서 술에 의지하며 살았고, 이로 인해 20년을 이어오던 국어 교사라는 직업도 잃었다. 쇳일을 해서 일군 사업이 한순간에 부도를 맞자 아내에게도 버림받은 수환(김설진)은 그 길로 신용 불량자가 되었다. 건강보험도 없어 병을 치료하지 못하고 그저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두 사람은 술잔을 기울이고, 채우고, 비우기를 반복하며 담담하게 서로의 비극을 공유한다. 가진 것이 없는 만큼 잃을 것도 없을 줄 알았던 영경과 수환이지만 각자가 가진 전부를 서로에게 아낌없이 준다. 술에 취한 영경에게 수환은 등을 내어주고, 수환에게 영경은 보금자리가 되어준다. 그렇게 둘은 서로에게 기대어 생에 겨우 발을 붙이고 살아간다.
‘영경은 술을 마시면서 자꾸 가까이 앉은 수환의 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조용히 등을 내밀어 그녀를 업었을 때 그녀는 취한 와중에도 자신에게 돌아올 행운의 몫이 아직 남아있었다는 사실에 놀라고 의아해했다.’ 권여선, <봄밤> 중

하지만 나날이 수환의 관절은 더 굳어가고, 영경의 중독은 심해진다. 두 사람은 결국 집을 청산하고, 요양병원에서 살아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병실에 들어선 영경은 침대에 누워있는 수환의 까슬한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이 얼굴을 내가 사랑하네.” 사랑이 한 아름 담긴 눈으로 서로를 지긋이 바라보고 끌어안는 두 사람을 보면 그곳은 병실이 아닌, 영락없는 신혼집이다. 절망에 가까워지는 순간에도 둘은 잠시나마 낙관으로 응한다.

작가 권여선은 언젠가 술을 간이역에 빗대었다. 산다기보다 견디는 사람에게, 술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는 장치라고, 인생을 더 망가뜨리는 역설이 내재돼 있지만, 그럼에도 완충지대이자 도피처라고. 영경에게 술은 그런 존재였다. 의사의 만류에도 영경은 외출증을 끊고 나가 술을 마시고, 이틀 후 돌아오겠다는 약속도 힘을 잃어간다. 수환은 그런 영경이 마음 편히 외출할 수 있도록 한다. 누구보다 고단할 마음을 알기에, 더 이상 자신은 등을 내어줄 수 없기에, 기꺼이 보낸다. 그리고 돌아올 그녀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처절한 몸부림으로 그녀에게 가닿는다. 진흙투성이가 될 지 언정 함께 무너지기로 한 영경과 수환의 굳건한 사랑은 슬프기에 앞서 숭고하다.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 오오 봄이여”
영화 내내 영경이 읊조리는 것은 김수영의 시 <봄밤>이다. 술에 잔뜩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해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중얼대고, 때론 소리치며 반복한다. 전쟁과 혁명의 시대에서 가파른 봄을 보낸 김수영의 문장이 영경의 가슴에 자리 잡고 흐르다, 이내 멈춘다. 험준한 절벽 위의 두 남녀는 영원한 이별 앞에 속절없이 추락한다. 눈 앞에 나타난 조숙한 소년 같기도 하고 쫓기는 짐승같기도 한, 놀란 듯 하면서도 긴장된 눈동자를 마주한 영경은 이제야 꺼이꺼이 목 놓아 운다. 그리고 감독은 그가 더 이상 읊지 않는 시에 마지막 연을 덧붙인다. 마침내 슬픔이 우리를 건질 것이니 눈물이여 흐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