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지나온 발자취를 기념하며 어느 때보다 성대한 축제의 막을 올린다.
아시아 전역에서 도착한 다채로운 신작과 세계적인 거장들의 수작, 한국 영화의 확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여 스크린을 수놓는다. 올해 부산은 다시 한번 영화의 힘으로 도시를 환히 밝힌다.

필연의 개막, 변화의 폐막

WRITER 정지혜(영화평론가)

<어쩔수가없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영화제의 문을 여는 첫 번째 작품으로 박찬욱 감독의 <어쩔수가없다>를 선정했다. 개막작은 영화적 완성도와 대중적 화제성을 두루 갖춘 작품에 주어지는 자리인 만큼, 올해는 그 자리를 한국 영화의 살아 있는 역사이자 여전히 역사를 새로 써가고 있는 박찬욱 감독의 신작이 채운다는 점에서 더욱 특별하다. <어쩔수가없다>는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1997년 소설 <액스>를 영화화하기 위해 감독이 오랜 기간 부단히 지속해온 끈질긴 분투의 결과다. 마침내 커다란 성취로 우리 앞에 도착한 영화는 감독 특유의 섬세한 연출과 정교한 만듦새로 빛난다.

주인공 만수(이병헌)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게 없어 보인다. 사랑스러운 아내 미리(손예진)와 아이들이 함께하는 평화로운 가정, 무탈한 나날은 그럴듯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예고 없이 찾아온 정리 해고 통보 앞에서 만수의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삶의 질서는 뒤죽박죽 흔들리기 시작한다. 새 길을 찾기 위해 재취업을 시도하려는 만수의 눈에 만만찮은 경쟁자들이 들어온다. 어떻게든 수를 써서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 만수는 엉뚱한 방식을 취하고, 이내 해괴한 길로 접어든다. <어쩔수가없다>는 상실의 복원과 트라우마 탈피를 향한 애처로운 꿈, 교활한 계략과 끔찍한 살인, 전 지구적 경제 위기와 그에 맞물린 가정불화, 한 사람의 실존 적 고뇌와 이에 따른 환상이 뒤섞인 블랙코미디다.

그야말로 연기 선수들이 한데 모였다.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차승원 등 실력파 배우들의 출중한 연기는 믿음직하다. 무엇보다 배우 이병헌은 딱하고, 허술하고, 애처로운 만수의 처지를 능란하고 유려하게 그려낸다. 여기에 김우형의 촬영, 조상경의 의상, 조영욱의 음악, 류성희의 미술 등 일명 ‘박찬욱 월드’를 이루는 실력파 스태프들이 한 땀 한 땀 세공한 미장센의 향연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영화 제목처럼 어쩔 수 없는 세태와 상황 앞에서 어쩔 도리 없이 허둥대고 날
뛰는 가련한 자들의 기묘한 앙상블이다. 개막작 상영은 개막식이 열리는 부산 영화의전당 야외 상영관에서 5천여 명의 관객과 함께한다.

한편, 영화제의 대대적인 개편에 따라 폐막작에도 변화가 생겼다. 예년처럼 사전에 폐막작을 선정해 공개하는 방식이 아니라 영화제가 야심 차게 신설한 경쟁 부문의 대상 수상작을 폐막작으로 상영한다. 경쟁 부문에 대한 주목도를 높이고, 아시아 최고 영화제로서 위상을 다지며 영화제의 열기를 마지막 날까지 이어가겠다는 의지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