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지나온 발자취를 기념하며 어느 때보다 성대한 축제의 막을 올린다.
아시아 전역에서 도착한 다채로운 신작과 세계적인 거장들의 수작, 한국 영화의 확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여 스크린을 수놓는다. 올해 부산은 다시 한번 영화의 힘으로 도시를 환히 밝힌다.
아시아 영화가 걸어온 궤적
WRITER 이윤영(시네마토그래프 대표)
부산국제영화제는 특별기획 프로그램 ‘아시아영화의 결정적 순간들’을 통해 지난 30년간 아시아 영화의 결정적 순간을 되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한다. 선정된 10 편의 영화 사이에서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 작품은 왕빙 감독의 데뷔작 <철서구>다. 러닝타임 5백58분에 달하는 이 다큐멘터리는 쇠락해가는 공업지구에서 근로하며 살아가는 노동자의 삶을 생생히 기록한다. 디지털카메라 한 대를 들고 공업지구를 찾아가 감독 자신의 육신으로 써나간 이 놀라운 작품은 공개와 동시에 다큐멘터리 역사 자체를 강타했다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영화사에서 중요한 입지를 차지한다. 21세기 디지털카메라 시대에 다큐멘터리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답변을 들을 수 있는 귀중한 기회가 바로 이번 <철서구>의 상영일 것이다.

중화권의 또 다른 걸작 두 편도 주목할 만하다. 차이밍량 감독의 <안녕, 용문객잔>과 지아장커 감독의 <스틸 라이프>는 약 3년 간격으로 각각 대만과 중국에서 발표되었는데, 흥미롭게도 두 작품 모두 해체와 상실을 주제로 삼는다. 이러한 정서적 공통분모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90년대를 지나 2000년대에 들어서며, 중국과 대만에서는 대규모 재개발사업으로 과거의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그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두 영화는 사라져가는 과거를 붙잡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과 무력감에서 출발해, 이를 견뎌내는 서로 다른 방향을 제시한다.
한편, 비슷한 시기 홍콩에서는 두기봉 감독이 <흑사회>를 내놓았다. 당시 ‘홍콩 누아르’ 하면 괄목할 성공 을 이루어 장르의 정전으로 자리 잡은 <영웅본색>의 후광에서 자유롭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두기봉 감독은 그런 토양 위에서 장르를 새롭게 정의하고자 했다. 그는 특유의 낭만적 정서를 벗겨내고 냉혹한 현실을 앞 세웠다. 프로그램 노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흑사회> 는 ‘수정주의 웨스턴’에 빗대어 ‘수정주의 홍콩 누아르’ 라 부를 만한 작품이 아닐까.

이번 프로그램에서는 일본 영화의 흐름 역시 선명히 포착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정수가 담긴 초기작 <아무도 모른다>와 매 작품에서 자신의 고점을 경신해온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가장 성숙한 성취로 평가받는 작품 <드라이브 마이 카>를 통해 우리와 밀접한 위치에 있는 일본 영화가 세대를 거쳐 어떤 궤적을 그려왔는지 감지할 수 있다.
최근 다시 주목받는 이란의 작품들도 빼놓을 수 없다. 정치적 압박과 정부의 검열로 영화를 제작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훌륭한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증거로서의 영화, 자파르 파나히 감독과 모즈타바 미르타 마스브 감독이 공동 연출한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는 영화제작을 금지당하고 가택연금형을 받은 감독의 손에서 탄생한 메타적이고도 독창적인 작품이다. 여기에 가부장제의 억압이 심한 이란에서 만들어졌기에 더욱 기념비적인 여성영화 <내가 여자가 된 날>까지 함께 상영되어, 이란 영화가 보여주는 저항의 미학을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두 편의 한국 영화가 있다.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와 이창동 감독의 <버닝>. 두 작품 사이에 놓인 15년은 한국 영화, 나아가 한국 사회의 흐름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올드보이> 에서 격전을 벌이며 능동적으로 맞서 싸우는 주인공 오대수의 이미지는 <버닝>에서 소극적으로 미스터리를 파헤치지만 끝내 답에 다다르지 못하는 무력한 주인공 이종수의 이미지로 변모한다. 두 영화를 나란히 마주하는 경험은, 한국 영화가 그려온 풍경을 나란히 비교해볼 수 있는 소중한 순간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