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지나온 발자취를 기념하며 어느 때보다 성대한 축제의 막을 올린다.
아시아 전역에서 도착한 다채로운 신작과 세계적인 거장들의 수작, 한국 영화의 확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여 스크린을 수놓는다. 올해 부산은 다시 한번 영화의 힘으로 도시를 환히 밝힌다.
아시아의 시선으로, 경쟁의 서막
WRITER 정지혜(영화평론가)
제30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의미 있는 변화를 꾀한다. 아시아 최고 영화제로서 명성을 강화하며, 아시아 영화의 연대와 미래를 새롭게 도모하기 위한 첫 걸음을 내딛는다. 그중에서도 주목할 변화는 아시아 영화를 대상으로 한 경쟁 부문의 신설이다. 아시아의 시선으로 아시아 영화를 다시 바라보겠다는 선언이자, 영화제가 앞으로 지향할 방향성을 힘차게 드러내는 순간이다.
변화를 맞은 첫해인 만큼, 초청된 아시아 영화 14편의 면면이 벌써부터 관객의 궁금증을 자아낸다. 선정작 목록에서 단연 눈에 띄는 특징이라면, 이미 국제 무대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며 자신만의 고유한 작가 세계를 구축해온 기성 감독들의 신작부터 첫 장편으로 도전장을 내민 신예 감독들의 작품까지 고르게 포진해 있다는 점이다. 작품의 완성도와 예술적 가치를 두고 펼쳐질 경합은 아시아 영화의 오늘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는 무대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먼저 세계 유수의 영화제가 주목해온 중견 감독들의 신작이 눈길을 끈다. 아시아의 거장이자 영화제와도 깊은 인연을 이어온 장률 감독의 <루오무의 황혼>은 감독이 한동안 한국을 거점으로 활동을 이어가다 중국으로 귀환해 완성한 세 번째 영화로, 방랑과 우연이 불러온 기묘한 만남을 그린다. 올해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비간 감독의 <광야시대> 역시 기대작이다. SF, 스릴러, 누아르,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를 뒤섞고 변주하는 가운데 영화와 극장을 향한 애정을 담아 낸 작품이다. 동시대 일본 영화계를 대표하는 미야케 쇼 감독은 배우 심은경이 주연을 맡은 <여행과 나날> 을 들고 부산을 찾는다. 인물의 내밀한 서사를 섬세하게 그려낸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새벽의 모든>을 잇는 또 하나의 수작을 완성했다는 평이다. 이와이 슌지 감독의 조감독 출신이자 일본의 신예로 떠오른 나가타 고토 감독의 <어리석은 자는 누구인가>는 3일간 벌어지는 도망극을 세 인물의 시점으로 그려내는 독특한 미스터리 서스펜스물로,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의 배우 기타무라 다쿠미가 주연을 맡아 긴장감을 더한다. 스리랑카 영화를 대표하는 비묵티 자야순다라 감독의 <스파이 스타>는 근 미래를 배경으로 신비한 초혼 의식을 소재로 삼아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여정을 그린다.

한편,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밀레니엄 맘보> <쓰리 타 임즈> <자객 섭은낭> 등에 출연해 세계적인 배우로 거듭난 서기의 감독 데뷔작 <소녀>도 이목을 끈다. 션 베이커 감독과 <테이크 아웃>을 공동 연출하고, <스타 렛> <탠저린> <플로리다 프로젝트> <레드 로켓> 등 감독의 주요 연출작에 프로듀서로 참여하며 오랜 인연을 이어온 쩌우스칭 감독의 첫 단독 연출작으로 올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서 큰 수확을 거둔 <왼손잡이 소녀>도 부산에서 선보인다.
2021년 단편 <창문>으로 부산국제영화제 와이드 앵글 섹션에 초청됐던 시가야 다이스케 감독은 첫 장편 연출작 <고양이를 놓아줘>로 오랜만에 부산을 찾는다. 하마구치 류스케, 미야케 쇼의 뒤를 이어 미묘한 감정선을 탁월하게 그려낸다는 평을 받는 감독이다. 이저벨 칼란다 감독의 데뷔작 <또 다른 탄생>은 타지키스 탄 산골 마을에 사는 어린 소녀의 시선으로 삶의 비밀을 찾아가는 여정을 아름답게 펼쳐 보인다. 이란 태생으로 영국으로 이주한 하산 나제르 감독의 <허락되지 않은>은 저항과 자유의 방편이자 통로로서의 영화, 영화라는 세계에 대한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경쟁 부문에서 소개되는 한국 영화들도 주목할 만하다. 유독 시선을 끄는 작품은 <69세>로 부산국제영화제 뉴 커런츠 섹션 KNN관객상을 수상하고 <세기말의 사랑>으로 한국영화의 오늘 :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된 임선애 감독의 세 번째 장편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 시 조찬모임>이다. 수지, 이진욱, 유지태, 금새록 배우의 호연과 사려 깊은 시선으로 관계의 균열과 회복의 가능성을 그려내는 감독의 연출이 돋보인다. <소피의 세계> <환희의 얼굴>로 한국영화의 오늘 : 비전 섹션에 2회 연속으로 초청된 이제한 감독은 신작 <다른 이름으로>로 다시 한번 부산을 찾는다. 담백한 구조와 형식만으로도 불가해한 삶의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놀라운 작품이다. 영화에 차례로 등장하는 3개의 타이틀처럼 충(衝)동, 충(衝)돌, 충(衝) 격으로 가득 찬 한창록 감독의 도발적인 데뷔작 <충충충>, 시의성 있는 주제와 세태를 드라마의 문법으로 능숙하게 풀어낸 유재인 감독의 첫 연출작 <지우러 가는 길>도 기대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