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지나온 발자취를 기념하며 어느 때보다 성대한 축제의 막을 올린다.
아시아 전역에서 도착한 다채로운 신작과 세계적인 거장들의 수작, 한국 영화의 확장을 보여주는 작품들이 한자리에 모여 스크린을 수놓는다. 올해 부산은 다시 한번 영화의 힘으로 도시를 환히 밝힌다.
소녀들의 어제는 미래가 되어
WRITER 임유청(영화 도서 전문 편집자)
지금, 한국 영화의 현재진행형 역사를 써나가고 있는 신예 여성 감독 5인이 자신의 영화 세계에 선명하게 각인된 선배들의 작품을 호명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특별기획 프로그램 ‘우리들의 작은 역사, 미래를 부탁해!’는 김세인, 김초희, 윤가은, 윤단비, 임오정 감독이 각자 자신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 한국 영화를 선정하고, 해당 작품의 감독들과 대화를 나누는 자리다. 작고 예쁜 것, 연약한 것, 그래서 가볍고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던 소녀들의 세상은 이 영화들을 먹고 자라 거대한 미래가 되었다. 어리던 여성들의 작은 역사가 우리 곁에 도달한 지금을, 그리고 다시 미래로 뻗어가는 순간을 올해 부산에서 목격할 수 있다.

‘남들이 수학여행 갈 때 우린 지옥으로 간다.’ 학교 폭력 가해자를 찾아 뚜벅뚜벅 걸어가는 두 소녀의 짧은 여정과 대담한 성장담을 그려낸 <지옥만세>의 임오정 감독은 <고양이를 부탁해>를 다시 스크린에 초대한다. 한국 여성영화사의 걸작으로 여전히 독보적인 빛을 발하는 정재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인천에서 여자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분투하며 세상으로 나아가는 스무 살 다섯 친구가 주인공이다. 여성 감독도, 여성 서사도 드물던 시절, 많은 이들이 이 영화의 시작을 말릴 때 정재은 감독은 ‘왜 소녀들이 영화의 주인공이면 안 된다는 건가’라는 질문을 품고 배두나, 이요원, 옥지영 등 당시 신예 배우들과 함께 영화를 완성했다.

태어날 때부터 서로에게 얽힐 수밖에 없는 두 여자. 모녀라는 지독한 애증의 관계에 주목하며 모성애에 확고한 입체성을 부여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의 김세인 감독은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를 선택했다. 여고생 민아는 어느 날 우연히 동급생 효신과 시은의 교환 일기를 줍고, 일기장 속 둘의 특별한 관계에 사로잡히게 된다. 시은은 자신을 사랑하는 효신에게 깊은 연결감을 느끼지만 주변의 시선이 두렵다. 이내 둘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은 후, 학교에 이상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공포물이지만 청소년 퀴어의 억눌린 사랑, 여고라는 억압의 공간을 떠도는 불안과 집착을 서정적이고 감각적인 색채로 그려내며 수많은 팬을 양산한 작품이다. 당시 잡지 모델로도 사랑받던 배우 김규리, 박예진, 이영진, 공효진의 말간 모습이 반갑다. <원더랜드>의 김태용 감독과 <파과>의 민규동 감독의 공동 연출작이자 두 사람의 장편 데뷔작으로, 이후 한국 장르영화의 새로운 방향을 연 작품으로 높이 평가 받는다.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영화감독이 술자리에서 돌연사하는 바람에 갑자기 실직한 프로듀서의 영화 이후의 삶을 유머와 위트로 풀어내 사랑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이 실직, 경력 단절로 인해 겪지 않아도 될 내적 갈등과 성장의 상황에 놓인 여성 영화인의 이야기라면, 김초희 감독이 선정한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너무 빨리 끝나버린 청춘을 부여잡으려다 끝내 쓸쓸하고 고단한 현실을 깨닫는 존재들의 삶의 편린이다. 한때 잘나갔지만 지금은 야간 업소 밤무대 를 전전하는 밴드 ‘와이키키 브라더스’.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고향 수안보에 패배자의 마음으로 돌아온 리더 성우는 오래전 함께 음악을 하던 친구들과 첫사랑 인희를 만나고, 변했거나 변하지 않은 그들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삶을 반추한다. <리틀 포레스트>와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을 연출한 임순례 감독 작품으로, 신인 시절의 황정민, 박해일, 박원상, 류승범 배우의 앳된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윤단비 감독은 관객으로 하여금 기억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저마다의 유년기를 길어 올리게 하는 수작 <남매의 여름밤>으로 평단의 극찬을 받으며 등장했다. 등장인물 한 사람 한 사람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섬세하게 포착하며 공감의 층위를 쌓아 올리는 그의 선정작은 <질투는 나의 힘>. 대학원생 원상은 사진기자 성연을 두고 40대 유부남이자 문학잡지 편집장 윤식과 삼각관계에 놓인다. 윤식은 원상의 전 여자친구를 빼앗은 전력도 있지만, 원상은 윤식에 대항하는 대신 투항하듯 그의 집으로 들어간다. 개인의 사랑과 목표보다는 자신보다 우월한 남성과의 친밀함을 택하는 원상의 모습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 연대가 어떤 방식으로 유지되고 재생산되는지를 보여준다.

치밀한 일상성을 바탕으로 성장의 순간을 탁월하게 직조해온 윤가은 감독. <우리들> <우리집>에 이어 신작 <세계의 주인>으로 영화 팬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그는 <오늘> <집으로…>를 연출한 이정향 감독의 장편 데뷔작 <미술관 옆 동물원>과 함께한다. 영화는 시나리오작가 춘희의 집에 말년 휴가를 나온 철수가 찾아 오며 시작된다. 철수는 전 연인 다혜가 이사 간 사실을 모르고, 밀린 월세가 급한 춘희는 애인을 기다리는 철수와 이 집에서 열흘간 동거하기로 한다. 서로 정반대인 두 남녀 사이에 피어난 로맨스는 영화가 포착한 평범하고 일상적인 순간들에서 결정적 생기와 설득력을 얻는다. 당대 최고의 스타 배우 심은하는 소탈하고 순수한 춘희 캐릭터를 편안한 연기로 소화하며, 같은 해 개봉한 <8월의 크리스마스>의 다솔 역과 함께 한국 멜로영의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얼굴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