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회를 맞이하며 새로운 시작을 알린 부산국제영화제. 그 변화를 상징하는 첫 ‘부산 어워드’ 트로피를 태국의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이 완성했다. 부산의 광활한 바다에서 길어 올린 영화제의 가치, 흐르는 물과 빛에 대한 찬미를 담아 빚어낸 또 하나의 작품.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영화를 위한 경쟁 부문을 신설하며 새로운 출발을 알린다. 폐막식 무대에서 첫선을 보일 ‘부산 어워드’ 수상자에게는 태국의 거장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이 제작한 트로피를 수여한다. 그는 2002년 장편 데뷔작 <친애하는 당신>으로 처음 부산을 찾은 뒤, 칸영화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열대병>과 황금종려상 수상작인 <엉클 분미>의 단편 버전인 <분미 아저씨께 보내는 편지>를 상영하며 영화제와 깊은 인연을 이어왔다. 수많은 아시아 영화인의 품에 안길 트로피를 구상하기에 앞서 그는 해운대 바닷가에 대한 기억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현실과 꿈의 경계를 배회하며 기억과 역사, 시간과 순환을 탐구해온 감독의 고유한 시선은 이제 스크린을 넘어 물성을 갖춘 조각으로 확장되고 있다. 햇빛 아래 부서지는 파도처럼 끊임없이 변화하며 주변을 비추는 영화제의 본질을 형상화해 하나의 트로피로 완성해간 기나긴 과정에 대해 감독과 서면으로 이야기를 나눴다.
스크린을 넘어 밤새 이어지는 대화, 사랑하는 영화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호사,
‘아무것도 아님(NOTHINGNESS)’을 기쁘게 누리는 시간이 곧 영화제가 품은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의 첫 경쟁 부문을 상징할 트로피 제작에 함께했습니다. 영화제가 제시한 ‘부산, 국제, 영화, 축제’라는 네 가지 키워드를 토대로 작업의 출발점에서 가장 먼저 떠올린 이미지는 무엇이었나요?
처음에는 부산의 상징인 동백꽃을 떠올리며 ‘고요하게 피는 꽃’이라는 주제를 탐구했습니다. 하지만 영화제의 다른 시상 부문인 ‘까멜리아상’의 모티프가 동백꽃이라는 소식을 접했고, 해운대 바닷가에 얽힌 기억을 되새기며 방향을 잡아나갔어요. 제게 부산국제영화제는 숱한 파도가 모이는 자리입니다. 스케치 단계에서는 고요하게 숨을 쉬는 듯한 오브제를 먼저 그렸습니다. 밀물과 썰물이 반복되며 빛을 머금고 다시 흘려보내는 조수(潮水)처럼 빛이 응축된 형태를 상상하면서요.
부산국제영화제는 감독님을 “30회의 상징성과 새로운 경쟁 부문의 시작을 동시에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 소개했습니다. 영화제의 철학과 경쟁 부문의 의미를 어떻게 바라보고, 이를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무엇에 가장 중점을 두었나요?
무엇보다 이 트로피가 그 자체로 생명과 시간을 담은 존재이길 바랐습니다. 이를 위해 고대의 비너스상이나 안데스 신상(神像)에서 영감을 받았어요. 고대의 신상은 대개 용기(容器) 형태로 만들어져 제의에서 물이나 피를 담아 생명의 본질을 기리는 데 사용됐습니다. 땅의 비옥함과 지구의 순환, 다산과 풍요를 축하하는 매개체였죠. 창작자와 그들이 만든 이야기가 모여 넘쳐흐르는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이와 비슷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트로피의 형태와 재질을 결정하며 고심한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초기의 구상은 물과 빛의 존재감을 담아낼 수 있는 유리관 형태로 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입으로 불어 만든 유리가 유기적인 곡선 형태를 띠고, 구체적으로는 돌이나 심장 혹은 머리를 연상시키길 바랐죠. 한쪽 면에는 기포들이 별처럼 터져 나오게 하고, 다른 면은 투명하게 남겨두어 거센 파도의 소란과 깊은 바다의 고요가 공존하는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유리와 기포, 물을 활용한 디자인은 공예가와 협업해야 하는 전문적인 작업이었습니다. 감사하게도 제작 과정을 함께한 디자인업체가 유리를 대체할 금속 재질을 제안해주었어요. 그 덕분에 애초에 구현하고자 한, 물처럼 흐르고 변화하는 느낌을 최대한 유지하며 형태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트로피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영화가 지닌 종합예술로서의 성격, 영화인 공동체를 하나로 이어주는 힘에 주목했다고 들었습니다. 이러한 사유가 최종 디자인에는 어떻게 구현되었나요?
제게 영화는 ‘공감하는 기계(empathic machine)’와 같습니다. 영화가 타인의 감정과 경험을 비추듯, 트로피 역시 거울 같은 표면과 유려한 곡선을 통해 이를 거머쥔 수상자뿐만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람들과 주변 풍경까지 고스란히 비추죠.
그간 영화뿐만 아니라 비디오 설치 작업을 중심으로 현대미술을 아우르는 작업을 선보여왔지만, 트로피 제작은 또 다른 창작의 영역이었을 듯합니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며 마주한 과제는 무엇이었나요?
기존의 작업과 형태는 다르지만 결국 빛, 형태, 시간에 대한 사유와 반응을 담아내는 일이기에 본질적으로 같은 선상에 놓여 있다고 느꼈습니다. 영화를 통해 탐구해온 기억과 역사, 시간, 순환 같은 모티프는 이 트로피 디자인에서도 핵심을 이룹니다. 트로피의 몸체 안에는 매년 새롭게 경신되는 영화인들의 정신이 차곡차곡 쌓이겠죠.

부산국제영화제와 오랜 인연을 이어온 만큼, 트로피를 제작하며 영화제에 얽힌 각별한 추억을 떠올렸을 것 같습니다.
언젠가 영화제에 참석해 친구들과 술을 진탕 마신 기억이 납니다. 제게 부산, 특히 영화제는 스스로를 온전히 풀어놓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사실 할 수만 있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트로피를 만들고 싶었어요. 오직 나무 받침대만 남겨두고, 수상자를 해운대 해변 한가운데로 데려가 한국에서 가장 독한 술을 마시게 하는 거죠. 영화인이 바다와 함께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아주 소중한, 이곳과는 다른 세계의 형상을 비로소 목격하게 될 겁니다.
앞으로 트로피를 품에 안을 수많은 아시아 영화인이 어떤 감정을 느끼길 바라나요?
이번 작업을 통해 동료 영화인들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는지 궁금합니다. 영화인들이 트로피를 창가에 두고 그 곁에서 흘러가는 삶을 비춰보길 바랍니다. 비록 여러 기술적 제약으로 처음 구상한 유리관 형태를 구현하지 못해 아쉬움이 남지만, 그럼에도 트로피는 빛을 반사해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담아낼 겁니다. 아침에서 저녁으로, 한 계절에서 다른 계절로 변화하는 모습을 말이죠. 이 조각이 시간을 조용히 환기하는 장치가 되길 바랍니다.
이번 작업을 계기로 영화제가 지닌 의미를 새롭게 바라보기도 했나요?
부산국제영화제가 얼마나 진지하면서도 동시에 유희가 교차하는 공간인지 새삼 느꼈습니다. 예술과 삶이 사랑을 나누는 두 마리 뱀처럼 뒤엉키는 순간 말입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기 위한 무대가 아닙니다. 스크린을 넘어 밤새 이어지는 대화, 사랑하는 영화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호사, ‘아무것도 아님(nothingness)’을 기쁘게 누리는 시간이 곧 영화제가 품은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