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국제영화제의 30회를 목전에 두고 임명된 정한석 집행위원장과 박가언 수석 프로그래머.
그들에게 5개월이라는 시간은 시스템을 다시 짜고, 시선을 재정렬하고, 축제의 뼈대를 세우며 밀도 높은 혁신을 이뤄내고자 고군분투하는 여정이었다.
개막을 한 달 앞두고 두 사람을 만났다.
눅진한 피로가 묻어나는 고단한 얼굴을 하다가도 올해의 영화제를 소개할 때만큼은 눈이 형형히 빛을 냈다.

정한석 집행위원장

재킷, 니트 톱, 슈즈 모두 Ferragamo, 팬츠 Tod’s.

지난 3월 20일 신임 집행위원장으로 위촉되셨지요. 그로부터 정확히 5개월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지난 5개월을 어떻게 기억하시는지요?

그보다 꽤 긴 시간을 보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어떻게 지나갔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영화제의 주요 준비는 거의 마친 상태입니다. 5개월 동안 이 정도로 압축적으로 일하며 세월을 잊고 지낸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임한 첫해가 하필 부산국제영화제 30회라는 사실이 가혹하다고 느끼지는 않으셨습니까?(웃음)

네, 농담처럼 그런 말을 하곤 했습니다. 제가 한국 영화 프로그래머로 처음 부산국제영화제에 합류했던 해가 2019년이었는데, 그해가 한국 영화 100주년이었거든요. ‘그런데 집행위원장 첫해는 왜 하필 30회인가’ 했습니다. 하긴 제가 원래 일복이 있는 편입니다. 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지금까지 발표된 자료들에 따르면 30회를 맞은 부산국제영화제는 스스로를 엄격히 정비하며 내실을 다진 인상을 줍니다. 먼저 특별기획 프로그램부터 이야기하겠습니다. 예년과 비교해 특별기획 프로그램이 증설되었고, 그 면면이 이례적으로 화려합니다.

특별기획 프로그램은 보통 한 해에 3개 정도만 진행해도 많다고 하는데, 올해는 5개를 준비했습니다. 전체 편수를 살펴보니 특별기획 프로그램 내 작품 수를 조금씩 줄이되 총 편수는 유지하면 특별기획 프로그램의 수와 폭을 넓힐 수 있겠더라고요. 이렇게 되면 다룰 수 있는 주제가 다양해지고, 모실 수 있는 게스트도 많아져 영화제가 훨씬 다채로워질 거라 판단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까르뜨 블랑슈(Carte Blanche)’라는 프로그램입니다. 말 그대로 특정 인물에게 전권을 부여해 그가 원하는 작품을 자유롭게 선택하면 우리가 상영하고, 이어 대화의 시간을 갖는 형식이죠. 이렇게 되면 전권을 부여
하는 인물 자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올해는 영화감독 봉준호, 매기 강, 언론인 손석희, 소설가 은희경, 배우 강동원 씨와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의외의 인물은 손석희 님입니다. 제가 아는 한, 언론인의 역할 외에는 이런 자리에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까르뜨 블랑슈 기획에는 두 가지 계기가 있었습니다. 먼저 배우 강동원 씨가 사석에서 “올해 부국제에 상영작은 없지만 영화제와 함께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강동원 배우 역시 많은 자리에서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이가 아니기 때문에 이번 프로그램에 함께하게 된 것이 더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또 다른 계기는 봉준호 감독님인데요. 영화 <기생충>이 또 다른 특별기획 프로그램인 ‘아시아영화의 결정적 순간들’에서 최상위권에 올랐는데, 감독님 본인은 이미 그 영화에 대 해 수없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다른 작품을 이야기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고른 작품이 아오야마 신지 감독의 <유레카>입니다. 다른 분들이 모두 자신의 작품을 이야기하는 데 비해 봉 감독님은 다른 길을 택한 셈이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까르뜨 블랑슈’를 만들어 다르게 풀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이번 특별전은 강동원 배우와 봉준호 감독님이 아이디어를 보태주신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방금 언급하신 특별기획 프로그램 ‘아시아영화의 결정적 순간들’에 함께하는 감독과 배우의 면면도 놀랍습니다. 자파르 파나히, 마르지예 메쉬키니, 지아장커, 차이밍량·이강생, 왕빙, 두기봉, 이창동, 박찬욱, 야기라 유야까지 아시아 영화사를 빛낸 기념비적인 감독과 배우들이 단 일주일 동안 동시에 모두 부산에 모이게 되었습니다.

‘아시아영화의 결정적 순간들’은 2015년 20회를 맞아 처음 시작한 ‘아시아영화 100’의 세 번째 프로젝트입니다. 아시아 영화의 흐름을 재조명하고, 그 영화사적 가치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온 부산국제영화제의 대표 기획 중 하나입니다. 올해는 30회를 맞이하며 보다 많은 감독들이 부산을 찾고 관객들과 대화를 나눌 예정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목할 특별기획 프로그램은 ‘마르코 벨로키오, 주먹의 영화’입니다. 마르코 벨로키오 감독은 유럽을 대표하는, 현존하는 최고 거장이라 할 수 있는 분입니다. 일반 관객에게는 다소 낯설 수 있지만, 이를테면 이런 일화가 있어요. 봉준호 감독이 어느 자리에서 벨로키오를 봤는데, 교과서에서만 보던 인물을 눈앞에서 보니 말을 붙이지 못하고 수프만 떠먹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거든요. 그만큼 당대의 거장으로 평가받는 감독입니다. 한데 그가 60년 넘게 작품 활동을 하며 단 한 번도 아시아에 오지 않았어요. 이번이 첫 방문입니다. 영화인과 시네필들에게는 눈이 번쩍 뜨일 만한 소식일 겁니다. 여기에 줄리엣 비노쉬도 초청해 특별기획 프로그램 ‘줄리엣 비노쉬, 움직이는 감정’도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몇 가지 특별기획이 이어집니다.

많은 변화 중 가장 먼저 꼽히는 혁신은 경쟁 부문 신설입니다.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고, 어떤 방향으로 운영하려 하십니까?

경쟁 부문은 사실 지난해부터 시작됐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 논의를 거쳤고, 당시에나 지금이나 저는 경쟁 부문 신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입니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 구현할 것인지가 관건이었죠. 경쟁 부문의 필요성을 느낀 이유는 그동안 비경쟁 영화제라는 틀에서 운영해온 ‘지석’과 ‘뉴 커런츠’ 섹션의 효과가 실제로 크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지난 30년의 데이터와 최근 몇 년간의 경험으로 저 또한 느낀 바가 있고요. 저는 현상을 유지하는 것은 곧 조금씩 퇴보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영화제를 주최하는 입장에서 현상 유지를 하는 건 조금씩 나빠지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렇기에 두 섹션을 아우르는 대형 경쟁 플랫폼을 만드는 것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봤습니다. 그래야 그 안에 들어온 감독과 작품들이 보다 큰 주목을 받을 수 있을 테고요. 몇 년 전 이정홍 감독의 <괴인>이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부산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상영돼 ‘뉴 커런츠’ 섹션에서 여러 상을 수상했음에도, 그해 세계 주요 영화제 초청 성적은 다소 부진했습니다. 당시 그 작품은 전 세계 데뷔작 가운데 손꼽힐 만큼 뛰어났기에 아쉬움이 컸습니다. 만약 우리의 ‘뉴 커런츠’ 섹션의 영향력이 더 강력했다면 해외 영화제의 관심도 훨씬 높지 않았을까 싶었죠. 그때의 경험이 제게는 구체적인 계기이자 중요한 동기 가 되었습니다.

첫 경쟁 부문에 오른 14편의 작품에 대한 궁금증도 많습니다. 어떻게 채우고자 했고,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결국 관건은 아시아에서 얼마나 좋은 작품을 모았느냐일 텐데요. 올해는 그 점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냈다고 생각합니다. 경쟁 부문에는 총 14편이 올랐고, 그 안에 뛰어난 아시아 영화가 포함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라인업으로 아시아 영화의 비전을 더 강하고, 더 분명하게 보여줄 수 있게 됐다고 봅니다. 또 하나 주목 할 점은 경쟁 부문이 신설되면서 이전에는 모시기 어려웠던 강력한 게스트들이 호의를 가지고 부산을 찾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표적 인물이 션 베이커입니다. 세계 영화제에서 뜨거운 인물 중 한 명인 그가 감독이나 특별전의 주인공이 아니라 프로듀서 자격으로 부산을 방문합니다. 오랫동안 그와 공동 각본가이자 프로듀서로 협업해온 대만 감독 쩌우스칭의 작품 <왼손잡이 소녀>가 이번 경쟁 부문에 포함됐기 때문입니다. 경쟁 부문이 없었다면 쩌우스칭 감독의 출품도, 션 베이커의 동반 방문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이를 이루는 과정이 힘드셨겠지만, 위원장님이 말씀하시는 모습에서 약간의 즐거움이 전해집니다.

즐겁습니다. 지난 5개월 동안 우리가 이 모든 일을 해냈다는 사실에 얼마간 자부심을 느낍니다. 동시에 이 모든 결과가 제 능력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도 느낍니다. 집행위원장으로 역할을 옮기고 모든 직원을 직접 대면하면서 그분들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 됐습니다. 실제로 이렇게까지 헌신적으로 일하는구나 하고 깊이 깨닫게 된 것들이 많아요.

2019년부터 부산국제영화제의 한국 영화 프로그래머로 활동하신 만큼 영화제의 내외부 환경에 대한 이해가 깊으실 텐데요. 집행위원장으로서 가장 먼저 어떤 변화를 꿈꾸셨습니까?

조직 차원에서 보니 30년 동안 쌓인, 우리도 모르는 관성이 있더군요. 물론 그 안에는 저도 포함됩니다. 조직의 리더로서 그 관성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컸습니다. 프로그램 운영 측면에서는 한국 영화 프로그래머로 일하며 느낀 갈증이기도 한데요. 아이디어와 기획을 더 넓히고 실제 결과로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이사장님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셨기에 가능해졌습니다. 앞서 언급한 특별기획 프로그램이 구성과 게스트 면에서 내실이 더 풍부해지길 바랐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경쟁 부문 신설과 게스트의 면면은 꽤 만족스럽습니다. 다만 무조건 확장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풍성해지되, 정확해야 합니다. 알차게 풍성해지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물리적으로 양만 늘리는 방법도 있잖아요. 후자는 방법이 아니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히 파악하고, 필요에 따라 확장할 것은 확장하고 다듬을 것은 다듬었습니다. 지난 5개월은 그렇게 보낸 시간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한국 영화 프로그래머로서의 답과 집행위원장으로서의 답이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영화 산업과 극장 문화가 급변했고, 상황이 녹록지 않은 지금, ‘오늘의 영화제’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 보십니까?

영화제는 ‘판’이 되거나 ‘창’이 되어야 합니다. 둘 중 하나입니다. ‘판’은 말 그대로 판을 깔아준다는 의미로, 신인 감독과 새 작품을 발굴해내는 것이고요. ‘창’은 이미 나온 결과물을 관객 앞에 보여줄 수 있는 창구입니다. ‘창’은 사실상 한국 상업영화 산업과 많이 맞닿아 있습니다. 그 관점에서 올해 저희가 선택한 것이 개막작입니다.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 <어쩔수가없다>를 개막작으로 선정했고, 동시에 이 작품에 모일 수 있는 관심과 애정을 개막일에 가급적 많은 분에게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지금 한국 영화가 겪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신호탄, 관심의 도화선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동시에 부산국제영화제도 새롭게 출발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열린 영화 <어쩔수가없다> 제작 보고회에서도 박찬욱 감독님이 여러 매체의 질문에 답하는 도중에 ‘특히’라는 표현을 쓰면서 “지난 30년간 한국 영화의 부흥과 함께해온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돼 매우 기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에 굉장히 많은 것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올해 개막작으로 박 감독님의 영화를 선택함으로써, 영화제가 ‘창’으로서 할 수 있는 역할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한편 ‘판’으로서 해야 할 역할, 즉 발굴 기능은 ‘비전’ 부문의 확장 등 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희가 경쟁 부문을 만든다고 하니까 ‘그렇다면 독립 예술영화는 외면하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요. ‘경쟁’은 아시아의 거장과 신인을 막론하고 아시아적 비전을 지닌 작품들에 더 강력한 비전을 제시하기 위해 만든 부문입니다. 칸영화제에 ‘주목할 만한 시선(Un Certain Regard)’이 있듯, 저희는 아시아 각지의 다양한 독립영화를 ‘비전’ 섹션에서 ‘비전 : 아시아’와 ‘비전 : 한국’으로 확장해 담아내려 합니다. 올해는 한국 12편, 아시아 11편으로 편수도 훨씬 늘었습니다.

‘창’의 역할과 ‘판’의 역할, 두 축의 균형을 어떻게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올해는 경쟁 부문을 신설한 만큼 준비를 철저히 했습니다. ‘최대’, ‘역대’ 같은 표현을 자주 보게 될 텐데, 과장이 아니라 실제 수치와 기록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세계적인 거장 감독의 최신작을 상영하는 ‘아이콘’ 섹션은 지난해 17편에서 올해 33편으로 확대했습니다. 두 배 가까이 증가한 것인데, 관객 입장에서는 보고 싶은 영화를 만날 기회가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죠. 이런 규모와 구성은 부산국제영화제가 아니면 해내기 어려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랑스럽기도 하고요. 또 곧 열릴 개막 기자회견에서 ‘이런 분들이 참석하고, 그들의 영화가 온다’고 밝힐 텐데, 한 사람 한 사람만 놓고 봐도 그들이 세계 영화계에서 지닌 무게감이나 개인의 역사와 성취를 따지고 본다면 저로서는 ‘사건’이라고 표현하고 싶거든요. 그런 사건이 올해 여러 개 있습니다. 션 베이커 감독은 그중 하나일 뿐이고, 또 다른 이름들이 있습니다. 지금 드는 생각은 ‘이 모든 흐름을 올해로 끝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부려서라도 이 기조를 더 공고하게 만드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재킷, 니트 톱 Ferragamo, 팬츠 Tod’s.

그렇다면 내년에는 올해 세운 기록을 스스로 또 깨야 할 텐데요.(웃음)

한국 영화 프로그래머로 일할 때도 그런 말을 종종 들었습니다만, 제가 드릴 수 있는 대답은 단순합니다. 내년에도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준비하는 것이 맞다고 봐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위원장님의 동력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영화 전문 기자 및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며 영화 산업 전반을 아우르다 한국 영화 프로그래머로 영화제에 합류 했습니다. 누구보다 부산국제영화제라는 역할의 무게를 체감하실 듯합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한국 영화의 운명과 맞닿아 있으니까요. 이를 책임감이라 한다면, 그 책임감 안에는 어떤 마음이 담겨 있다고 보십니까?

제가 아주 강한 공적 책임감을 앞세우는 사람은 아니어서 정확한 대답은 아닐 수도 있지만, 제가 프로그래머를 막 시작했을 때는 한국 영화가 지금처럼 어렵지 않아서 즐겁게 일했습니다. 그러다 우연찮게 집행위원장을 맡은 이 시기에 한국 영화가 침체기에 있죠. 한국 영화 프로그래머 출신이어서가 아니라, 영화제가 본래 할 수 있는 일들을 충실히 해낸다면 자연스럽게 한국 영화 쪽으로 이 열기와 흥이 전달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2019년에 제가 프로그래머를 시작했을 때의 딜레마 중 하나가 개봉을 앞둔 한국 영화들이 부산에 오기를 주저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부산에서의 프로모션 효과나 그 가치를 믿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예전 같은 상황이었다면 <어쩔수가없다> 같은 화제작을 개막작으로 모시기 어려웠을 겁니다. 이렇게 바뀔 수 있었던 것은 영화제가 얼마간 자기 자리를 잘 잡았기 때문이고, 잘 잡은 자리를 이제는 다시 한국 영화, 영화인들과 나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개막작 선택의 주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한국 독립영화에도 주목하는 한편 ‘스페셜 프리미어’ 같은 상업영화 쪽에도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영화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좁혀 말하면 세 가지입니다. 좋은 작품을 상영하는 것, 관객이 만나고 싶어 하는 게스트를 모시는 것, 그리고 이를 위한 좋은 행사를 마련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기본에 중점을 두고 충실히 운영 하고자 했습니다.

변화와 혁신 가운데 부산국제영화제가 지켜야 하는 것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초심을 잃지 않되, 변화를 향한 의지를 갖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봅니다. 영화제는 축제이자 예술 행정이고, 동시에 문화 서비스업입니다. 현상 유지, 혹은 지난 30년의 영광만을 보듬고 있으면 다음부터는 나빠질 뿐입니다. 앞서 잠시 이야기했지만 저는 현상 유지 자체가 곧 쇠퇴라고 봅니다. 그래서 각 부문을 세밀하게 조금씩, 그리고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켜야 할 무엇이 따로 있다기보다, 변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지켜내는 태도. 그것이 곧 부산국제영화제가 지켜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마지막 질문을 드릴게요. 이제 한 달 뒤인 9월 20일이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부산 곳곳을 뛰어다니실 텐데요. ‘영화제가 잘 마무리됐다’는 말을 어떻게 정의하시겠습니까?

결과가 보여주겠죠. 제가 말을 덧붙이기보다는 이번에 오시는 관객과 매체, 게스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더 추구해야 할 지점과 수정해야 할 부분을 차분히 짚어보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내년에도 올해만큼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지요. 저한테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면, 내년에는 제게 5개월이 아니라 12개월이 주어진다는 것. 이 점이 아주 기쁩니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