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부산의 열흘이 관객과 영화인의 활기로 가득할 수 있었던 근간에는 프로그래머들의 열정과 헌신이 분명히 자리한다. 세계의 기쁨과 아픔에 다가가고, 강단 있는 패기로 무장하고, 일상 또는 시대에 필요한 사유를 전하는 작품들을 폭넓게 살피며 영화의 본질에 대해 부단히 고민해온 사람들. 올해도 풍성한 라인업을 준비한 7인의 프로그래머가 개인적인 애정을 담아 추천작 5편을 전해왔다. 서른 번째 영화 축제의 스크린 너머로, 저마다의 감상이 극장을 다채롭게 채워주기를 기대하며.

World & Asian Cinema

박가언 수석 프로그래머

올해의 경향 1990년대생 신예 감독의 약진이 두드러진다. 이들은 영화를 넘어 시리즈, 광고, 뮤직비디오, 게임까지 다양한 분야를 오가며 재능을 펼친다.

영화계 화두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과 <8번 출구>를 통해 게임 속 또 다른 세상을 발견했다. 최근 영화계에서는 게임이 원작인 실사영화뿐 아니라, 실제 게임처럼 생생한 이머시브 영화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이러한 작품을 영화제에서 소개할 기회가 늘어날 거라고 기대한다.

프로그래머의 일과 삶 새로운 세계와 무수히 만나며 경험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내 선입견과 사고방식의 변화를 느끼고, 과거의 나를 돌아보거나 미래의 나를 궁금해하기도 한다. 그동안 다양한 권역을 맡아온 만큼, 영화를 통해 배우는 역사, 정치, 문화에 대한 이해도를 더욱 높이고 싶다.

부국제의 30년 부국제에 축적된 자료를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했는데, 초창기 사진에 시선이 갔다. 비프광장을 가득 채운 당시의 20대 관객이 50대가 된 지금은 어떻게 살아 가는지 궁금해진다. 30년간 부국제를 응원해준 분들이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도록, 관객 중심 영화제로 거듭나야 한다는 결심을 되새기고 있다.

영화를 통한 만남 한국 영화의 위기 속에서 많은 제작자가 한국을 넘어 세계시장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남이 보고 싶은 영화’를 생각하기보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집중하는 작품이 많아지면 좋겠다.

안슐 차우한 <타이가>

접점이 전혀 없는 소재와 주제를 다루는데도, 주인공의 열망이 무척 아프게 공감되는 영화. 감독의 능숙한 연출력을 칭찬하고 싶다.

후카다 코지 <연애재판>

‘유사 연애’를 파는 연예 비즈니스를 다루지만, 단순한 사회 고발물은 아니다.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지키려는 한 여성의 투쟁을 따뜻하게 그린 영화다.

하야카와 치에 <르누아르>

신예 여성 감독인 하야카와 치에의 자전적 성장영화. 풍부한 상상력과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소녀의 눈에 비친 어른들의 세계는 과연 이랬던가. 어린 시절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다.

가브리엘 마스카루 <마지막 푸른빛>

근미래 브라질을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적 로드무비. 가난한 여성 노인인 주인공은 사회 취약 계층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지만, 삶에 대한 의지를 놓치지 않고 유쾌한 반란을 꿈꾼다.

짐 자무쉬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화려한 캐스팅을 내세우거나 짐 자무쉬라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아도 충분히 완벽한 작품. 이 영화가 선사하는 그리움과 위안에 공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