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해 부산의 열흘이 관객과 영화인의 활기로 가득할 수 있었던 근간에는 프로그래머들의 열정과 헌신이 분명히 자리한다. 세계의 기쁨과 아픔에 다가가고, 강단 있는 패기로 무장하고, 일상 또는 시대에 필요한 사유를 전하는 작품들을 폭넓게 살피며 영화의 본질에 대해 부단히 고민해온 사람들. 올해도 풍성한 라인업을 준비한 7인의 프로그래머가 개인적인 애정을 담아 추천작 5편을 전해왔다. 서른 번째 영화 축제의 스크린 너머로, 저마다의 감상이 극장을 다채롭게 채워주기를 기대하며.

Asian Cinema

박성호 프로그래머

올해의 경향 아시아 단편 경쟁은 매해 300:1이 넘는 치열한 경쟁을 거쳐 10편의 수작을 선정해왔다. 올해 소개하는 작품은 저마다 강한 개성과 놀라운 연출력을 선보이며 아시아 영화의 미래가 더욱 밝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무엇보다 영화라는 매체가 현대 예술 중 가장 대중적인 위치에 있는 만큼, 이번 선정작들이 영화의 본질을 묻는 질문에 가장 근접한 답을 제시한다고 본다.

프로그래머의 일과 삶 미국, 유럽, 한국, 대만, 일본, 서아시아,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탄생한 수많은 영화를 보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크게 확장되었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로 일하면서 성공한 덕후가 되는 대신 워라밸이 무너진 삶을 살고 있지만, 영화를 통해 내 삶의 절반을 배운 것 같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고 선보이는 모든 영화인에게 늘 진심으로 감사한다.

영화를 통한 만남 우리는 지금 홍수처럼 넘쳐나는 영상 매체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지난 한 세기 동안 가장 대중적인 예술이자 때로는 격렬한 저항의 매체로서 변화와 혁신을 꾸준히 이어왔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관객과 호흡하는 극장 경험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을 것이다. 시대가 던지는 화두의 최전방에 선 영화들이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라 믿고, 그 사실이 관객의 한 사람인 내게 큰 행복을 준다.

자파르 파나히, 모즈타바 미르타마스브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

다시 봐도 엄청난 힘이 느껴지는 영화. 촬영 금지와 가택 연금 상황에서도 식지 않는 창작 열정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감독의 일상에 초대받아 환대받는 듯한 감각을 느끼게 한다.

우밍진 <여우왕>

두 형제의 우애를 그린 영화. 텔레파시가 통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지만, 학교에서는 따돌림을 당하는 인물의 모습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방관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새기게 하는 작품이다.

에아카싯 타이랏 <할라발라>

출세욕에 사로잡혀 뒤틀려버린 주인공을 마냥 응원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던 공포영화. 의식을 흔드는 전개와 함께 ‘보디 호러’의 고통을 느끼게 한다.

리언 레 <사이공의 연인>

천천히 고조되는 두 남녀 사이의 긴장감과 평행선처럼 이어지는 주변 인물들의 관심이 현실적이면서도 씁쓸하게 느껴지는 작품. 로맨스와 사회적 맥락이 절묘하게 교차한다.

랏차품 분반차촉 <쓸모 있는 귀신>

올해 최고의 장르 파괴작. 귀신이 등장하는데도 웃음을 자아내고, 이내 귀신보다 무서운 건 태국 사회의 집단 불안과 트라우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