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영화에서 다뤄온 인물들이 ‘주변화된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한테는 그들이 중심에 자리하기 때문이죠.”
알리스 디오프(Alice Diop) 감독은 영화를 통해 소외된 존재에 대한 사회의 시선을 바로잡고 새롭게 한다. 미우미우 우먼스 테일의 서른 번째 작품 <Fragments for Veunus>를 완성한 그와 화상으로 나눈 이야기.

“저는 제가 속해 있는 사람들을 담기 위해 소외된 자리를 기록하는 영화를 정치적 의도로 만들어왔습니다. 그게 곧 제 영역이자 제 역사입니다.” 프랑스 출신 감독 알리스 디오프(Alice Diop)의 말이다. 감독은 소외된 공동체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다수 제작하고, 실제 영아 살해 재판을 기반으로 만든 첫 장편영화 <생토메르(Saint Omer)>를 베니스 국제영화제와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이는 등 ‘소수자’로 여겨지는 대상의 이야기를 진중하게 다뤄왔다. 그리고 올해 8월 말, 여성 감독이 이끄는 단편영화를 꾸준히 지원하며 그들의 독창적인 세계를 통해 21세기 여성성을 탐구해온 ‘미우미우 우먼스 테일’ 프로젝트의 서른 번째 작품 <Fragments for Veunus>를 완성해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최초로 상영했다. 베니스 방문을 앞두고 화상으로 만난 감독이 미우미우와 함께 한 작업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왔다.
알리스 디오프 감독과 미우미우의 인연은 2년 전에 시작되었다. “<생토메르>를 베니스에서 상영한 이듬해인 2023년, 미우미우 우먼스 테일 위원회의 베르데 비스콘티(Verde Visconti)에게 연락을 받았어요. 명예로운 제안이었죠. 루크레시아 마르텔(Lucrecia Martel), 알리체 로르와커(Alice Rohrwacher), 아녜스 바르다(Agnès Varda) 등 흥미로운 감독들이 참여한 프로젝트에 이름을 올릴 수 있다니 영광이었습니다. 협업이 성사된 이후, 제가 관심을 가져온 주제이기도 한 ‘여성성’을 어떻게 표현할지 오래 고민했어요. 저와 같은 ‘흑인 여성’의 관점에서 여성성에 접근하며 이번 단편 영화를 구상해갔습니다.”
<Fragments for Veunus>는 두 개의 시퀀스로 이루어져 있다. 전반부는 가상의 미술관을, 후반부는 뉴욕 브루클린의 베드스타이(Bed-Stuy) 지역을 배경으로 전개되며 각각 한 명의 흑인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이들은 미우미우의 최신 컬렉션을 입고 있다. “평소 미우미우의 팬이라 브랜드의 의상을 활용하는 게 어렵지 않았어요. 첫 번째 시퀀스에서 배우 카이 제 카가메(Kayije Kagame)의 의상은 배경과의 일관성을 고려해 선택했어요. 인물이 미술관이라는 공간과 작품들 사이에 자연스레 스며들기를 바랐기 때문에, 간결하면서도 우아한 소재와 차분한 색감의 룩을 택했습니다. 뉴욕 거리에서 두 번째 시퀀스를 촬영할 땐 배우 세포라 폰디(Séphora Pondi)가 연기하는 인물이 도시의 여성들과 잘 어우러지면서도 돋보일 수 있도록, 자유롭고 생동감이 느껴지는 룩을 골랐어요.”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Fragments for Veunus>는 “이미지, 장면, 상황으로 구성한 콜라주이자 일종의 카탈로그”다. 그는 다큐멘터리와 허구의 경계에서 이번 작품을 만들며 회화와 조각, 영화, 책의 일부를 인용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건 로빈 코스트 루이스(Robin Coste Lewis) 의 시 ‘비너스의 항해(Voyage of the Sable Venus)’. “이 시와의 만남이 이번 단편영화에 담긴 아이디어의 출발점이었어요. ‘비너스의 항해’는 고대 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장르의 미술 작품에 등장한 흑인 여성들을 조명합 니다. 흑인 여성이 작품 제목이나 전시 설명 등에 언급되었던 사례를 나열 한 실험적인 시로, 방대한 자료 수집을 거쳐 서구 미술 속 흑인 여성은 늘 종속적인 위치에서 재현되어왔다는 사실을 드러내죠. 그 시가 제게 강렬 한 인상을 남겼고, 이번 작업의 토대가 되어주었습니다. 시에서 발췌한 구 절들을 영화의 내레이션으로 담아내기도 했어요.” 내레이션은 흑인 여성의 신체가 미술을 통해 어떻게 관찰되고 묘사되어왔는지를 명확하게 전한다. 이는 첫 번째 시퀀스의 주인공이 미술관에서 마주한, 비너스와 같은 여성의 형상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예술 안에서 흑인 여성이 표현되는 방식은 그들이 실제 사회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알린다. “흑인 여성의 존재는 늘 타인의 시선에 갇힌 채 축소되고 경시되어왔어요. 사람들이 흑인 여성들을 기존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고민이 생겼습니다.” 감독의 고민은 영화의 두 번째 시퀀스에서도 엿볼 수 있다. 뉴욕을 찾아온 젊은 흑인 여성 시인의 주관을 따라 펼쳐지는 장면들은 그가 거리에서 발견한 흑인 여성들의 일상을 비춘다. 그들이 도시 곳곳을 차지하며 스스로를 온전히 드러내는 모습은,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이 신체의 존재에 미치는 영향을 귀띔한다. 감독은 이 시퀀스가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었으며, 그 시간이 본인을 성찰하고 재정 의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감독에게 <Fragments for Veunus>는 ‘현실 세계 어딘가에 존재하는 여성들을 위한 송가’와 같다. 여기에 깃든 감독의 마음은 영화의 끝자락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선명해진다. 두 번째 시퀀스 이후, 현대 흑인 여성 예술가들의 작품이 하나씩 스크린을 채운다. “흑인 여성 예술가들은 이제 막 미술관의 문턱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 제니퍼 패커(Jennifer Packer)가 휘트니 비엔날레에서 작품을 전시했고, 시몬 리(Simone Leigh)는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을 대표했죠. 이 외에도 미칼렌 토머스(Mickalene Thomas) 등 예술계에서 주목할 만한 흑인 여성이 많아요. 오늘날 흑인 여성에 대한 시선을 바 꾸기 위해 힘쓰는 그들에게 축하와 찬사를 전하고 싶었습니다.” 억압적인 재현에서 벗어난 흑인 여성의 모습이 담긴 회화, 사진, 조각을 보여주던 영화는 이내 퍼포먼스 시인 스타케얀 친(Staceyann Chin)의 낭송을 들려준다. 그의 목소리는 오드리 로드(Audre Lorde)가 쓴 시 구절을 거듭 읽는다. ‘우리는 결코 살아남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We were never meant to survive.)’

“이유 없는 영화만큼은 절대 만들지 않을 거예요.
제 내면을 뒤흔들어 움직이게 하는 사유를 담아내고,
현실의 쟁점과 맞닿아 있는 질문을 던지는 일을
계속 해나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알리스 디오프 감독 역시 한 명의 흑인 여성으로서 아픔의 순간을 겪은 적이 있다. 경험자이자 창작자로서, 그는 <Fragments for Veunus>가 ‘치유’ 의 기능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 영화는 흑인 여성을 위한 작업이지만, 이를 만들어가면서 저 또한 큰 위안을 얻었어요. 저를 비롯한 흑인 여성, 나아가 모든 여성이 부당하고 잘못된 시선 때문에 받은 상처를 회복했으면 합니다. 우리 여성들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장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요.” 시선을 바로잡는 일은 감독이 꾸준히 품어온 사명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는 예술, 특히 사진과 영화가 사회에 내재된 시선을 어떻게 수정하 고 새롭게 형성해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다. “제가 영화에서 다뤄온 인물 들이 ‘주변화된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한테는 그들이 중심에 자리하기 때문이죠. 충분히 조명되고 재현되지 않았을 뿐, 그들은 언제나 분명히 존재해왔습니다. 이런 존재들을 제 작업의 중점에 두면서 다시 표현해내고자 합니다. 인간에게 마땅한 자리를 주고, 다양하고 복잡한 존재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만드는 것.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작품들을 선보이고 싶어요.”
그렇다면 앞으로 관객은 알리스 디오프의 영화 속에서 어떤 인물들을 만날 수 있을까? 감독은 자신의 작품에 담아낼 대상을 성별로 한정 짓지 않는다. “흑인 여성의 이야기만을 의식적으로 다루려는 건 아니에요. 어쩌면 제 차기작의 주인공이 남성일 수도, 백인일 수도 있겠죠. 전 그저 제 삶에서 마주한 존재나 상황에서 시작된 영화를 만들어갈 뿐입니다. 미래의 제 작업이 어떻게 될지 저조차도 알 수 없지만, ‘이유 없는 영화’만큼은 절대 만들지 않을 거예요. 제 내면을 뒤흔들어 움직이게 하는 사유를 담아내고, 현실의 쟁점과 맞닿아 있는 질문을 던지는 일을 계속 해나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영화에 그대로 녹아 있고, 그렇기에 부가적인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영화는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봅니다. 작품을 공개할 때마다 제가 할 수 있는 말을 다 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제 영화들이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가고, 무엇을 새롭게 만들어낼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제 예상보다 흥미로운 생각들을 이끌어낼 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