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 위의 이야기는 관객의 시선을 거쳐야 비로소 완성된다.
영화를 사랑하는 문화 예술계 인물 10인에게 영화에 관한 10개의 질문을 던졌다.
‘지금 떠오르는 영화의 한 장면’부터 ‘가장 큰 영향을 준 영화’까지.
10명의 관객이 전해온 답변 속에는 영화를 완성한, 그들 각자의 세계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김유림
시인
2016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양방향> <세 개 이상의 모형>, 에세이 <단어 극장> 등을 썼다.

최근 1년간 가장 큰 놀라움을 안긴 영화
빅토르 에리세의 <벌집의 정령>. 강릉독립예술극장 신영에서 세 번째로 관람했다. 10여 년에 걸쳐 세 번 봤는데,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지점들이 다르게 보였고, 그 사실이 놀라웠다. 영화와 내가 함께 자라난 느낌이다.

하루 종일 영화 한 편을 반복 재생한다면
의외로…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 주인공이 한밤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신은 보고 또 봐도 매혹적이다. 영화 자체가 계속 달리고 있다는 감각을 지울 수 없다.

지금 떠오르는 영화의 한 장면
짐 자무시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의 전반부, 피에 취해 있는 뱀파이어 이브(틸다 스윈튼)와 그의 어지럽고 아름다운 방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앵글로 찍은 장면이 있다. 카메라가 뱅글뱅글 돌면서 인물 가까이 다가가는데,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인지 실제로 카메라가 회전했는지 잘 모르겠다.

가장 좋아하는 사운드트랙
최근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를 다시 봤다. 반젤리스 의 음악이 너무 좋아서. 그중 ‘Love Theme’를 특히 아낀다. 막상막하로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에 삽입된 음악 ‘I’m Deranged’도 좋아한다.
외우고 있는 대사
“내가 받았던 그 보이트 캄프 테스트, 당신도 해봤어요?” <블레이드 러너>에서 레이첼(숀 영)이 데커드(해리슨 포드)에게 던지는 대사다. 자신에게 가장 중요하지만 스스로는 절대로 던지지 못하는 질문을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을 때가 있다. 스스로를 시험해보았냐는 질문이 레이첼의 입에서 나왔기에 더 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듯하다. 직후의 장면과 그때 흘러나오는 사운드트랙도 이 대사를 기억하는 데 큰 몫을 했다.

가장 완벽한 포스터
지금 떠오르는 건 오타르 이오셀리아니 감독의 <가을의 정원들>. 할머니가 정장 입은 남자를 거꾸로 들고 탈탈 털고 있다. 그게 아니라면, 할머니가 정장 입은 남자의 물구나무서기를 도와주고 있다. 어느 쪽으로 보든 경쾌하고 귀엽다.
무조건 스크린으로 봐야 하는 영화
아무래도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영화가 아닐까. <인디아 송>과 <밤의 선박>을 스크린으로 봤는데, 보다가 기분 좋게 졸았다. 그 경험까지 뒤라스의 영화와 한 세트라고 주장하고 싶다. 영화를 보다가 졸고, 다시 깨서 눈을 떠 보면 여전히 비슷한 장면이 흘러가고 있는 그 모든 순간이 스크린 경험에 포함된다고 말이다.


‘이 영화 안에서 살고 싶다’고 느낀 작품
이 질문은 좀 오싹하다. 영화 안에서 살고 싶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 영화는 영화라서 좋다. 그나마 괜찮을 듯한 건 역시 에릭 로메르의 영화들. <여름 이야기>나 <가을 이야기> 속에서 한 계절 정도를 살아보면 어떨까 싶다.
만나고 싶은 영화 속 인물
이와이 슌지의 <쏘아올린 불꽃, 밑에서 볼까? 옆에서 볼까?>의 노리미치(야마자키 유타), 유스케(다카유키 소리타), 나즈나(오키나 메구미)를 전부 만나고 싶다. 내가 수영장에 함께 있는 그들의 친구였으면 좋겠다. 수영 시합을 나무 뒤에서 몰래 지켜보는 친구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영화
아키 카우리스마키를 처음 알게 한 <어둠은 걷히고>. 그는 최선을 다해 영화가 무거워지지 않도록 한다. 그의 영화에는 삶에 대한 사랑과 유머가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