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 새 없이 몰아치는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장면들 위로 흐르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속 음악을 들여다 봤다.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이 선보인 첫 블록버스터,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의 열기가 한창이다. 2시간 40분이라는 러닝타임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관객을 온전히 몰입하게 만든 데에는 적재적소에 흐르는 음악이 톡톡한 역할을 했다. <데어 윌 비 블러드>부터 <마스터> <인히어런트 바이스> <팬텀스레드> <리코리쉬 피자>까지 앤더슨의 영화에 오랜 시간 음악감독으로 함께해온 조니 그린우드(Jonny Greenwood)의 오리지널 스코어를 비롯해, 절묘한 타이밍에 등장해 장면과 서사에 새로운 의미를 더해준 삽입곡 일부를 들여다 봤다.
조니 그린우드는 누구?

클래식 선율을 아름답게 풀어낸 <스펜서> <팬텀 스레드>의 영화음악으로 조니 그린우드의 이름을 처음 접한 이들에겐 그의 활동 배경이 더욱 흥미롭게 다가올 것이다. 밴드 라디오헤드의 기타리스트로 톰 요크와 함께 라디오헤드의 곡 작업에서 중추를 이루는 핵심 멤버이자, 현악기와 신시사이저, 오르간 등 다양한 악기를 다루는 그는 기존의 록 음악 문법에 얽매이지 않는 실험적인 사운드를 빚어내는 작곡가로도 알려져 있다.
그린우드는 2003년 개봉한 다큐멘터리 <바디송>의 음악을 맡아 기타와 재즈, 클래식을 아우르는 폭넓은 스코어를 선보였고, 이를 눈여겨 본 앤더슨 감독이 <데어 윌 비 블러드>의 음악을 의뢰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영화음악의 세계에 발을 들인다. 제인 캠피언 감독의 <파워 오브 도그>로 아카데미 음악상 후보에 올랐던 2021년, 같은 해에만 <리코리쉬 피자>와 <스펜서>의 음악을 도맡을 정도로 활발한 작업을 이어온 그는 최근 동시대 영화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써나가는 작곡가 중 한 명으로 주목 받고 있다.
조니 그린우드의 오리지널 스코어
그린우드는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에서 드럼과 기타, 피아노, 비올라, 옹드 마르트노 등 다채로운 악기를 동원해 풍부한 스코어를 구성하며 멀티 플레이어로서의 면모를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극중 혁명의 핵심 인물인 퍼피디아의 등장과 함께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트랙 “One Battle After Another”는 일정한 박자로 울려 퍼지는 피아노 선율 위로 풍부한 오케스트라가 더해지며 작중 주요한 상황마다 등장하고, 이후에도 피아노와 퍼커션을 중점적으로 활용해 고유한 리듬감을 구축한 곡들이 차례대로 이어지며 긴장감을 이끌어낸다. 그렇게 쌓아 올린 극적인 긴장감은 영화의 명장면으로 꼽히는, 굽이진 언덕길 위에서 펼쳐지는 추격 신에서 최대치로 터져나온다.(“River of Hills”)
니들 드롭의 향연
영화를 위해 조니 그린우드가 새로 작곡한 음악뿐 아니라, 작중 상황에 따라 절묘하게 흘러나오는 60-70년대 올드팝 역시 영화의 매력을 한층 더해준다. <매그놀리아>의 “Wise Up”, <부기 나이트>의 “Boogie Shoes”, <리코리쉬 피자>의 “Stumblin’ In” 등 기존 작품에서도 앤더슨 감독은 니들 드롭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장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 방식으로 사랑 받아 왔다. 줄곧 20세기를 작품의 배경으로 삼아온 감독에게 올드팝은 시대적 배경을 설명해주는 효과적인 장치이자, 곡의 가사가 작중 상황이나 인물의 감정과 어우러지면서 장면마다 다채로운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장치로 기능한다.
* 니들 드롭(needle drop): 기존에 발표된 대중가요나 클래식 곡을 장면에 그대로 가져와 삽입하는 방식
Steely Dan “Dirty Work”
극중 무장 혁명 단체인 ’프렌치 75’의 전성기를 그린 전반부가 퍼피디아의 배신으로 허무하게 막을 내린 뒤, 영화는 16년이라는 세월을 거뜬히 뛰어 넘어 딸 윌라의 학교 앞에서 학부모 상담에 들어가기 전 있는 힘껏 약을 들이마시는 밥의 모습을 비춘다. 열패감이 그늘처럼 내려앉은 중년 밥의 얼굴 위로 스틸리 댄의 “Dirty Work”(1972)가 흐른다. 한때는 ‘로켓맨’으로 불리며 테러의 피날레를 장식했지만, 뜨거웠던 과거를 뒤로한 채 마약과 술에 찌들어 은둔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주인공의 안쓰러운 처지를 경쾌하고도 달콤한 피아노 선율과 연결하는 앤더슨 감독만의 유머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Tom Petty & The Heartbreakers “American Girl”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서 카메라가 거리로 나서는 윌라의 얼굴을 비추는 순간, 톰 패티의 “American Girl”(1976)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원곡이 지금보다 더 커다란 세상을 꿈꾸는 한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곡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영화는 이 부녀 앞에 다가올 미래를 아주 직관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해주는 듯하다. 부모 세대의 혁명이 실패와 좌절로 점철됐을지라도 자유를 갈망하는 다음 세대의 싸움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며, 윌라의 세대가 주도해나갈 앞으로의 투쟁은 이전 세대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펼쳐질 것이라고. 문을 열고 씩씩하게 걸어나가던 윌라의 해사한 얼굴과 상영관 가득 울려 퍼지던 이 곡의 여운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극장을 다시 찾을 이유는 충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