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돼지를 통째로 흙 속에 거름으로 묻고 키운 사과나무에서는 어떤 열매가 열릴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듯한 박찬욱 감독의 블랙코미디 영화, <어쩔수가없다>.


“다 이루었다”, 혹은 “다 잃었다”

모호필름

25년간 몸담은 제지회사 ‘태양’에서 하루아침에 해고, 일명 ‘모가지’를 당한 만수(이병헌). 오직 한 회사에서만 수십 년이라는 시간을 쏟아 부은 개인에게 갑작스러운 해고는 받아들이기 힘든 비극이지만, 매출과 이익을 우선 목표로 삼는 회사의 입장에서 누군가를 해고하는 행위는 ‘어쩔 수 없는’ 선택입니다. 3개월 안에 재취업에 성공해 자신을 온 마음으로 응원하고 지지하는 가족에게 원래의 삶을 되돌려주겠다는 만수의 목표는 만수뿐만이 아니라 실업자 모두의 목표를 대변하기도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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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사로운 햇볕이 내리쬐는 오프닝 장면에서 만수가 사랑하는 가족을 부둥켜안으며 “다 이루었다”라고 나지막이 내뱉는 대사는 극이 절정에 다다를수록 마치 “다 잃었다”라고 메아리로 돌아오는 듯하죠. 이처럼 <어쩔수가없다>는 개인(가장)의 목적성이 단체(가족)의 방향으로 확장될 때 벌어지는 참담한 비극의 결과를 풍자하는 작품입니다.


NO OTHER CHO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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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 감축으로 인한 해고 이후 생계유지를 위해 선택한 일용직 알바, 간절한 재취업을 위해 내려놓는 자존심, 만수와 함께 가족을 위해 테니스와 댄스 학원을 끊고 치위생사의 일을 시작한 아내 미리(손예진). <어쩔수가없다>의 영어 제목이 ‘NO OTHER CHOICE’인 것처럼 어쩔 수가 없는 상황들이 만수를 따라오지만, 그가 선택하는 결정들은 역설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은 아니었죠.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지면서 영화는 관객들에게 ‘이 선택이 과연 불가피했을까’라는 해소되지 않는 의문을 남깁니다.


개인의 욕심이 가족에게 확장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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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잇밥만 25년 동안 먹었기 때문에 다시 제지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는 다른 실직자 범모(이성민)라는 인물은 만수가 스스로를 범모에게 투영하며 자신의 목표가 피할 수 없다고 합리화를 하는 계기가 됩니다. 범모는 카페를 차려주겠다는 아내 아라의 합리적인 제안에도 불구하고, 오직 제지 전문가로 살아가야만 한다며 마치 관성처럼 끌리는 듯한 소명을 온몸으로 드러내는데요. 이는 제지회사로 돌아가고 싶은 만수 역시 마찬가지였죠. 자신의 힘으로 일궈낸 커리어와 집, 그리고 힘겹게 영위한 중산층의 삶을 포기할 수 없었던 만수는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오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발버둥칩니다. 그 누구도 펄프맨이 되라고 한 적도, 혼자서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가장의 의무를 부여한 적도 없지만, 개인의 욕심에서 비롯된 선택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정당화하죠. 결국 이성적인 판단이 흐려진 결정을 내리는 동시에 이는 ‘어쩔 수가 없다’고 되뇌이며 만수는 스스로가 초래한 전쟁을 맞이합니다.


박찬욱의 블랙코미디

@neonrated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복수는 나의 것>, <아가씨>, <헤어질 결심> 등을 선보이며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거장이 된 박찬욱 감독의 열두 번째 장편 영화 <어쩔수가없다>는 전작들에 비해 난해함과 모호함을 덜어낸 작품입니다. 미스터리한 플롯보다는 직설적인 내용 전개로 대중들의 이해도를 높이고 관객들의 집입 장벽을 낮춘 작품으로,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어렵다’라는 고정관념을 깨는 작품으로 기억될 테죠.

블랙코미디 장르의 성격을 띤 <어쩔수가없다>는 박찬욱 감독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유머러스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특히, 다수의 씬에서 박찬욱 감독 특유의 유머 코드는 이병헌의 능청스러운 연기를 통해 빛을 발하며 관객석의 폭소를 자아냈죠. 또한, <공동경비구역 JSA> 중 김광석의 ‘이등병의 편지’, <헤어질 결심> 중 정훈희의 ‘안개’ 등 7080 세대의 한국 가요를 활용해 극의 분위기를 더욱 짙게 만들었던 박찬욱 감독답게 이번 작품의 선곡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깃거리를 더했습니다. 3인의 육탄전을 담은 시퀀스에서 조용필의 ‘고추잠자리’로 목숨을 건 치열한 긴장감을 단숨에 ‘톰과 제리’ 같은 우스꽝스럽고 유쾌한 콩트 연기로 변모시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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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으로서 내리는 선택이 한 가정을 위한 선택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개인의 욕심으로 비극, 그리고 한 가정의 붕괴. 그리고 이가 불러오는 비극을 꿰뚫는 박찬욱 감독의 풍자적인 시선이 담긴 <어쩔수가없다>. 해당 작품이 궁금하다면 이번 주말 영화관에서 관람해 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