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중심을 지키고, 동지들과 뜻을 모으는 것.
우민호 감독이 영화 <하얼빈>의 여정 끝에 발견한 ‘결국 해내는’ 정신.

불안과 두려움을 이겨내는 강인한 면모. 거듭되는 실패 끝에 이뤄내는 성공. 영화 <하얼빈>은 ‘영웅’이라는 수식 아래 가려진 ‘인간’ 안중근을 조명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홀로 또는 함께 분투하는 안중근의 모습은 영화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우민호 감독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묵직한 수묵화’처럼 웅장하면서도 절제된 분위기를 고수하고, 동료들과 치열하게 마음을 모으는 시간. 그 여정의 끝에 당도한 감독에게 남은 건 포기하지 않는 태도의 가치와 결국 해내는 정신이다. 그는 이제부터 더욱 용기 있게, 보다 즐겁게 자신의 영화적 세계를 확장해갈 생각이다.
4년 만의 신작 <하얼빈>이 지난겨울에 개봉한 이후 늦여름에 이르렀다. 두 계절과 8개월의 시간이 흐른 오늘, 이 영화가 어떤 기억으로 남아 있나?
개봉 이후 바쁘게 지내느라 <하얼빈>을 복기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 문득 떠오르는 건 이 작품을 통해 올해 4월 마리끌레르 영화제에서 상을 받았다는 사실.(웃음) 보고 싶었던 감독님들, (<마약왕>에서 함께한) 배두나를 비롯한 배우들을 오랜만에 만날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하얼빈>을 함께 만든 홍경표 촬영감독과 같이 간 자리라 더욱 좋았다.
<하얼빈>은 1909년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하얼빈으로 향한 대한의군 참모총장 ‘안중근’(현빈)과 독립군, 이들을 쫓는 일본군 사이의 추적과 의심을 그린다. 돌이켜보면 안중근 의사의 어떤 점에 이끌려 그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다루게 된 것 같나?
우리는 대체로 안중근을 영웅으로만 여기지 않나. 그런데 안중근의 자서전을 읽어보니, 그는 사실 약점을 지닌 사람이었다. 끝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지만, 거사에 성공하기 전 독립운동을 하며 수차례 실패를 거듭했다. 포로를 풀어줬다는 이유로 주변 동지들의 지탄을 받았고, 하얼빈으로 향하면서도 심리적으로 계속 흔들렸다. 그가 느꼈을 고뇌와 불안, 외로움, 두려움 등이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동안 안중근을 다룬 작품들이 조명하지 않았던, 우리가 미처 몰랐던 그의 인간적인 모습에 중점을 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역사는 흔히 승리의 기록이라고 하는데, 그 이면에 주목한 점이 인상 깊다. 이러한 기조는 안중근이라는 캐릭터뿐만 아니라 영화 전반에서 느껴진다.
시대극을 만들 때 역사가 전하는 결과보다 그 과정을 생각하려고 한다. 기록에 남아 있는 인물일지라도 널리 알려지지 않거나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면을 지닐 수 있고, 어떤 사건에 상당한 공헌을 했지만 주목받지 못한 존재도 있을 거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해가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편이다. <하얼빈>에서는 실존 인물인 ‘우덕순’(박정민) 등과 더불어 안중근에게 믿음을 보이는 ‘김상현’(조우진), 여성 독립운동가 ‘공부인’(전여빈)을 비롯한 가상 인물을 등장시켰다.
<하얼빈>의 배우들에게 ‘들리지 않지만 보이는 톤’의 연기를 부탁했다고 들었다.
나라를 잃은 이들의 비애와 통곡이 스크린을 통해 전해지기를 바랐다. 이를테면 안중근과 독립군 ‘이창섭’(이동욱)이 목숨에 대해 이야기 나누며 술잔을 기울일 때 어느 순간 정적이 감돈다. 주절주절 떠드는 게 아니라, 한마디씩 툭툭 던지는 두 인물의 모습에서 언제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독립군의 소용돌이치는 내면이 느껴졌다. 그 장면의 분위기가 독립운동을 하던 시대의 공기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더라.
독립운동은 나라의 국권과 직결되는 만큼,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소재다. 이를 진정성 있게 담아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 같다.
가족을 뒤로한 채 광활한 타지에 와서 땅 한 평 없는 고국을 위해 분투하는 독립군의 심정을 어떻게 오롯이 알 수 있을까? 그 복잡다단한 마음을 정의할 수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지레짐작하기보다 그분들의 마음을 직접 찾아가보려고 했다. 영화를 함께 만드는 사람들과 산으로, 사막으로, 호수로 향해 그 마음이 어땠을지 몸소 느껴보는 거다. 물론 독립군의 행적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험난한 여정이었다. 한국, 라트비아, 몽골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이동한 거리가 무려 지구 두 바퀴 반이나 된다.


지난한 여정이지만, 그만큼 기쁨이 큰 현장이지 않았을까 싶다. 몽골 홉스골 호수의 얼어붙은 수면에서 촬영하던 날의 비하인드 영상을 봤는데, 들뜬 목소리로 오케이를 연달아 외치더라.
‘야, 됐다. 드디어 끝났구나!’ 하는 마음이었다. 진짜 추웠거든.(웃음) 몽골 최북단 지역이라 기온이 영하 40℃에 달했는데, 절경이 담긴 찰나를 포착하기 위해 새벽부터 몇십 대의 차량을 끌고 한 시간 가까이 달려갔다. 처음에는 좀 무서웠다. 호수가 워낙 투명해 수면 아래가 훤히 보였고, 깊은 곳에서 얼음끼리 충돌하는 듯한 소리도 들렸다. 그 위를 혼자 계속 걸어야 했던 현빈 배우가 제일 고생했을 거다. 안중근이라는 위대한 인물을 연기한다는 게 잘해봐야 본전이지 않나. 무척 어려운 역할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감독으로서도 어려움이 컸을 것 같다. 수많은 사람을 이끌어야 하고, 아무리 철저히 계산하더라도 변수를 감수해야 하는 부담과 우려가 있었을 테니 말이다.
맞다. 그런데 그 여정을 함께한 배우와 스태프들, 나의 ‘동지’들이 오히려 내게 힘을 줬다. 모두가 같은 곳을 바라보며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다는 걸 크게 느낀 현장이었다. 육체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정신은 고양되는 기분이랄까. ‘이 마음만 있으면 되는 거구나’ 싶더라. <하얼빈> 작업을 다 함께 해냈다는 사실 자체가 보람찬 경험이 되어주었다.
여러 사람의 협력 속에서도 감독의 확고한 뚝심을 엿볼 수 있다. 영화가 웅장하면서도 절제된 톤을 내내 유지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연출 의도가 느껴진다.
이번 영화가 ‘묵직한 수묵화’처럼 느껴지기를 바랐다. 여러 컷을 쓰기보다는 한 대의 카메라로 촬영한 롱테이크가 많고, 클로즈업 대신 넓은 앵글로 다수의 인물을 담으려고 했다. 여백의 미를 살리려고 한 거다. 요즘 상업영화에서 자주 활용하는 방식은 아니다. 숏폼이나 2배속 콘텐츠에 익숙한 관객에게는 낯설 수도 있고. 그런데 <하얼빈>은 고전적인 방식으로 찍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사람들의 가슴에 빡 꽂히는 게 아니라, 만주 벌판에 부는 삭풍처럼 스윽 다가가기를 바랐다. 직접적으로 전하기보다는 스스로 느끼도록 하고 싶었던 거다.
완성작에 담기지 않은 독립군의 구체적인 생각과 감정을 다룬 미공개 장면들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더라. 댓글을 살펴보니 감독판을 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럼 더욱 느릿느릿 묵직하게 다가갈 수 있겠다. 관객이 원한다면 만들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와이 낫.(웃음)
<하얼빈>의 묵직함은 이전 인터뷰를 통해 자주 언급한 독립운동의 숭고미를 돋보이게 하는 듯하다. 우민호 감독이 지향하는 ‘숭고함’은 어디에서 비롯되나?
숭고함은 이타심에서 나오는 것 같다. 옳은 일을 하겠다는 선한 의지로, 나 자신을 바쳐 무언가를 지켜내려는 정신 말이다. <하얼빈> 개봉이 얼마 남지 않은 무렵,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광장으로 나서는 시민들을 보면서도 비슷한 기운을 느꼈다. 위기를 극복하려는 시민들의 행동에 독립군의 모습이 겹쳐 보이더라.
<하얼빈>이 과거의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시대를 초월한 의미를 지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란 시간이 흘러도 남는 것이지 않나. 물론 시대에 따라 다르게 와닿겠지만, 3·1절이나 광복절을 맞이할 즈음이면 <하얼빈>이 자연스럽게 언급되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가 역사적 맥락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의미로도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 독립군의 정신과 태도를 접한 관객이 본인의 삶을 반추해볼 수 있었으면 한다. 자기만의 목표를 바라보며 지금 어디까지 와 있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생각해본다면 좋겠다.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가야 한다”는 영화 속 안중근의 말을 되새기면서 말이다. 실패의 경험이 언젠가 성공을 일궈낼 테니,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좌절하지 않았으면 한다.

팬츠, 셔츠, 링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본인이 ‘영화’라는 목적지를 향해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어떤가?
20대 때부터 영화를 찍고 싶었고, 10년이 넘는 시간을 거쳐 영화계에 데뷔했다. 2015년 <내부자들>의 큰 흥행을 발판 삼아 여기까지 왔고. 물론 나도 실패를 여러 번 겪었다. 그런데 어떤 일을 하든 자신의 중심을 잘 잡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면 어려움을 이겨내게 되는 것 같다. 뜻을 모으면 결국 해낼 수 있음을, 더 나은 내일이 다가온다는 것을 이제 안다.
그 깨달음을 품고 꾸준히 나아가며 지키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시네마’, 극장. 한때 극장이 관객으로 붐비던 시절이 있었는데. 한 공간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스크린에 집중하며 웃고 우는 모습을 뒤에서 보면, 말 그대로 ‘들썩들썩’했다.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보고 느끼는 그 경험이 영화의 본질이자 힘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최근 극장이 위기에 처하지 않았나. 누군가와 감정을 공유하고, 타인의 고통과 행복을 존중하며 공감할 기회가 줄어들고 있다. 인간 대 인간의 소통과 연대가 사그라든다는 사실이 서글프기도 하다. 게다가 AI 시대가 도래하고 있으니 이런 의문도 든다. ‘미래에도 극장이 있을까? 영화는, 영화 현장은 앞으로 어떻게 될까?’ 궁금해서 챗GPT한테 물어본 적도 있다.(웃음)
어떤 답을 얻었나?(웃음)
어마어마한 변화가 있을 거라는데, 깜짝 놀랐다. 로케이션이 아닌 그럴싸한 버추얼 스튜디오에서 촬영하고, 결정권자 이외의 대체 가능한 인력은 인공지능이 맡아준다는 거다. 그러면 1백억 원대의 제작비가 드는 영화를 10억 편이나 만들 수 있다더라. 와…(웃음)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수많은 배우와 스태프가 한 편의 영화를 탄생시키기 위해 거치는 창작의 과정이 때로는 고되지만, 굉장한 희열을 안기거든. 영화 안팎의 많은 것이 바뀌더라도 그 시너지 만큼은 앞으로도 계속 느끼고 싶다. 어떻게 될지 지켜봐야겠다.
가까운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차기작이자 첫 드라마인 <메이드 인 코리아> 시즌 1이 올해 하반기에 디즈니+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하얼빈>이 힘겹게 쏟아낸 노력의 산물이라면, <메이드 인 코리아>는 뛰놀듯이 만들었다. <내부자들>과 <남산의 부장들>처럼 악당을 데리고 만든 작품이다. 오랜만에 전문 분야로 돌아와 신나게 찍었다.(웃음) 이번 에도 현빈 배우가 주연을 맡았는데, 부와 권력에 대한 야망을 지닌 ‘백기태’ 역으로 등장할 예정이다. 동일한 얼굴을 새로운 역할에 맞게 활용하고, 나아가 선역에서 악역으로 변모시키는 것 또한 감독으로서 느끼는 재미 중 하나다. 일단 배우의 헤어스타일부터 바꾸고(웃음) 안중근보다 자유롭게 임해보자는 대화를 나눴다.
<메이드 인 코리아>는 ‘백기태’와 그를 막으려는 검사 ‘장건영’(정우성)이 시대를 관통하는 사건과 직면하며 펼쳐지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공교롭게도 또 시대극을 선보인다.
그러게 말이다. 다시는 시대극을 안 하겠다고 말했는데…(웃음) 팔자인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선택하는 게 아니라 간택당하는 거지. 한겨울에 쫓아와서 품에 안기는 길고양이처럼, 시대극이 내게 오는데 어떻게 내치겠나 싶다.
그런데 간택도 아무나 당하는 게 아니지 않나. 시대극이 우민호를 찾아온다는 건 그만큼 시대극에 탁월한 감독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나로서는 그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해왔을 뿐이다. 누구든 그러지 않을까? 한동안 협업할 동료들에게 실망을 안기고 싶지 않고, 모두가 결과물 을 만족스러워하면 뿌듯하니까. 기회가 된다면 더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만들어보려고 한다. 멜로는 꼭 찍어보고 싶긴 하다. 만약 실현된 면 다들 “우민호가 멜로를 한다고?” 하면서 놀라겠지. 음… <메이드 인 코리아>에 멜로가 살짝 있긴 하다. 조금 이상한 멜로이긴 하지만.(웃음) 아무튼 여러모로 재미있게 작업한 작품이고, 곧 시즌 2 촬영도 시작된다. 기대해도 좋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