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생각했던 것, 내가 나라고 믿었던 것, 혹은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들에 대한 질문을 하자고 생각했다.”
윤가은 감독과 서수빈 배우가 함께 묻고 또 물으며 구축한 <세계의 주인> 속 주인의 세계.

서수빈 배우 톱과 스커트 모두 Grounds.

서수빈 배우 톱과 스커트 모두 Grounds.
사랑스럽고 명랑한, 짓궂고 괴팍한, 솔직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영화 <세계의 주인> 속 ‘주인’(서수빈)은 그런 사람이다. 어쩌면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깔끔하고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이 인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윤가은 감독은 이 모호한 지점에서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나 자신을 비롯해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한 친구, 가족, 주변 누군가를 정말로 제대로 보고 있었나? 영화가 끝난 뒤 오롯이 질문만이 남기를 바라며, 감독은 긴 시간 수없이 질문하며 영화를 완성했다.


윤가은 감독
<우리집> 이후 6년 만에 신작 <세계의 주인>을 완성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다. 언제 시간이 그만큼 흐른 건가?(웃음)
오랜만에 관객과의 만남을 앞두고 어떤 마음이 드나?
만감이 교차하는데, 감사한 마음이 가장 크다. 한동안 몇 번의 고비를 지나면서 어떤 시점에는 나에게 영화라는 기회가 안 올 것 같다, 더 이상 영화를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절절하게 들기도 했다. 그때를 생각하니 나의 영화를 세상에 내놓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새삼 감사할 뿐이다. 그리고 굉장한 떨림이 동반되는 중이다. 6년 전과 지금의 관객은 완전히 다르다고 느끼기 때문에 영화에 대한 반응을 조금도 가늠할 수 없다. 이틀에 한 번은 악몽을 꾸는 것 같다.
관객 반응이 궁금할 것 같아 미리 본 한 사람으로서 감상을 전하자면···.
내가 만나는 첫 관객이다. 너무 궁금하다. 어떻게 봤나?
주인의 세계에 흠뻑 빠져서 울다가 웃다가 했다.
웃음 포인트가 있구나. 그럼 됐다! 하하.
좋은 영화를 보면 내가 발견한 좋은 점에 대해 말하고 싶어지지 않나. 그런데 주인의 스토리를 언급하지 말아달라는 미션을 주다니.(웃음) 영화 <기생충> 이후 가장 어려운 스포일러 금지령이 아닌가 싶다.
나도 이렇게까지 어려운 미션이 될지 몰랐다.(웃음) 이 이야기를 쓰고 만들 때 유일한 목표가 있다면 ‘주인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관객에게 건네는 것이었다. 각각의 관객이 주인의 입장이 되거나 혹은 주변 인물이 되어보면서 영화 속 상황을 온전히 보고 듣고 느끼기를 바랐다. 각자의 마음에 일어나는 우여곡절을 경험하는 것이 이 영화를 감상하는 즐거움이 될 거라 믿었고. 아주 순수하게 감상해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부탁한 건데, 아무래도 너무 복잡하고 어려운 길을 택한 것 같다.
스토리가 아닌 주인이라는 사람을 얘기해볼 수는 있겠다고 생각했다. 주인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어떤 고민이 있었나?
나에게도 큰 미션이 있었다. ‘이 주인이라는 사람이 하나의 결로 읽히지 않아야 한다.’ 영화를 해오면서 인물에 그만의 특성을 부여하는 방식이 익숙한 터라 나 스스로도 고정 관념을 깨고 이런 면도 저런 면도 있는 인물을 만드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러면 인물이 두서없어 보이진 않을까? 혹은 한 명의 온전한 사람으로 읽히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이 두 가지 생각을 오가면서 구축한 캐릭터를 만들었다가 부수고 다시 만들기를 반복한 것 같다.
그 때문인지 영화를 보는 내내 주인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았다. 사랑스럽기도 하고 괴팍할 때도 있고, 자신을 숨기려는 듯하다가도 의외의 순간에 솔직해지는 것 같다.
대개 사회에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속성만 내비치게 되지 않나. 주인에게도 그런 모습이 있다. 다만 이 외에 주인이 스스로 내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 점까지도 영화 안에 담아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단면이 아닌 통합으로서 이 인물을 바라봐주기를 바란 거다. ‘이 아이를 사랑해주세요!’가 아니라 ‘친구나 이웃일 수 있는, 혹은 당신일 수도 있는 이 사람이 어떻게 보이나요?’라고 묻고 싶은 영화다.
어떤 배우가 이주인을 연기하느냐가 관건이었을 것 같다. 오디션 과정이 꽤 길었다고 들었는데, 서수빈 배우에게 확신을 가진 순간은 언제였나?
어떤 감독은 문 열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이 배우다!’ 한다는데, 나로선 너무 부러운 능력이다. 나는 의심도 많고 오래 보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다. 서수빈 배우에 대한 호기심은 처음에 일대일 미팅을 하며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눌 때부터 있었다. 엄청나게 긴장하고 있으면서도, 자기 얘기를 잘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그 후에 그룹으로 즉흥연기를 하는 오디션을 진행했는데, 서수빈 배우의 연기를 보는 게 진짜 재미있었다. 상대가 느리게 하면 본인도 그렇게 반응하고, 호들갑을 떨면 같이 텐션을 올리면서 상황에 몰입하는데, 보는 나도 빠져들게 되더라. 조금씩 점점 더 분명한 확신을 갖게 된 것 같다.
전작에 비해 등장인물이 굉장히 많다. 또 관점도 다르다. <우리들>과 <우리집>에선 주인공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세계의 주인>은 주인의 시선과 함께 주변 인물들이 주인을 바라보는 관점이 많이 그려진다.
예전에는 일인칭 서사로 오롯이 그 인물의 입장에서 보고 느껴지는 이야기를 완성했다면, 이번 영화는 주인의 입장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를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층위의 인물들이 주인을 보는 관점도 드러내고자 했다. 가족, 친구, 사회적 관계 안에서 들게 된 모임의 사람들, 그리고 모르는 사람까지도 필요했다. 예산이 많지 않아서 중간에 몇몇 인물은 빼자는 의견도 나왔는데, 마지막까지 포기가 안 됐다. 이 인물들이 다 있어야 오히려 주인이 설명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주인을 포함해 각 인물의 관점을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지도 고민의 한 축이었을 것 같다. 이야기 구조상 극단적으로 악한 인물이 등장할 수도 있고, 주인을 심하게 곡해하는 인물도 나올 수 있다. 이야기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에 대입해봐도 그런 인물들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 안에선 주인을 포함한 모든 인물을 끝까지 가지는 않게 하려고 애쓴 흔적이 느껴졌다.
바로 그 지점이 내가 영화 할 때 가장 예민하게 들여다봐야 한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우리들>을 만들 때도 학교 폭력은 스펙트럼이 아주 폭넓은데, 그렇다면 이 아이가 어떤 친구들과 관계를 맺으며, 어느 정도의 우여곡절을 지나고 있는가 하는 지점이 고민이었다. <우리집>에서 가정불화도 어디까지 담아내야 하나 싶었고. 어디까지가 진실처럼 느껴질까, 어디까지가 곡해하지 않는 것일까, 이 부분이 늘 내게 가장 어려운 지점이다. <세계의 주인>도 마찬가지다. 더 갈 수도 있었고, 덜 갈 수도 있었다. 어쩌면 선과 악을 분명히 나눌 수도 있었을 거다. 명확하게 나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런데 사람 사는 모습을 잘 살펴보면 악의로 접근해도 어떤 사람은 잘 모를 수 있고, 선의로 한 말도 듣는 사람에겐 상처가 될 때도 있지 않나. 알게 모르게 서로를 곡해하는 순간들 말이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게 좀 복잡하고 어렵지만, 이 영화에는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주인이 하나의 결로 읽히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은 곧 나의 영화에 대한 마음으로도 해석된다. 윤가은 감독의 영화를 설명할 때 자주 쓰이는 말들이 있지 않나. 아이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다루는 영화, 따뜻함이 담긴 영화 등.
급기야 “영화계의 방정환”까지. 하하. 너무 감사한 말이 많은데, 그래서 불안하기도 하다. ‘왜 날 그렇게 봐?’ 하는 맘이라기보다는 그렇지 않은 나를 들킬까 봐. 영화엔 숨길 수 없는 내 모습이 있지만, 또 그게 내 전부는 아니니까. 한때 그런 사람이 되려고 애쓴 적도 있었는데, 그게 강박이 되기도 하더라. 칭찬도 사람을 어떤 틀에 가둘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후론 누구에게나 각자의 시선이 있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이려 한다. 프레임 안에 머물 것이냐, 깨고 나갈 것이냐는 나의 몫인 것 같다.
영화를 보며 유독 기억에 남는 질문이 있다. 미도가 주인에게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데, 나는 잘 안 되는 거”를 묻지 않나. 그 말이 <세계의 주인>을 관통하는 질문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 질문을 받는다면 어떤 답을 할 것 같나?
너무 많은데.(웃음) 음… 나를 믿는 것. 자기 확신 같은 거. 다른 사람은 자기가 자신인 것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거 같은데 ‘나는 내가 편한가? 괜찮다고 생각하나? 나는 나를 믿나?’ 이런 질문을 스스로 많이 한다. 답이 없는 숙제 같은데, 그래서 계속 놓지 않으려 한다. 사느라, 영화 만드느라 자꾸 잊어버리는데, 그래서 더 생각하려 한다.

서수빈 배우
첫 화보이자 첫 인터뷰다. 처음을 함께할 수 있어 즐겁고 설레는 마음이다.
내가 더 설레었다. 촬영장으로 오는 길에 얼마나 떨리던지.(웃음)
<세계의 주인> 역시 처음이다. 서수빈 배우의 첫 영화. 영화와 관련한 처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언제인가?
오디션에 합격했을 때. 엄청 좋을 줄 알았고, 기대보다 더 좋긴 했는데, 그 마음이 딱 30분 가더라. ‘너무 좋다!’ 하고선 다시 시나리오를 읽어봤는데 ‘큰일 났다. 어떡하지’ 싶었다. 그렇지만 너무 하고 싶다, 무조건 해야겠다. 그러다 다시 불안해지고. 살면서 이 정도로 마음이 다이내믹하게 요동치던 순간이 또 있었나 싶다. 첫 촬영 날도 생각난다. 콜 타임보다 한 시간 일찍 도착했는데(옆에서 윤가은 감독이 “더 일찍 왔었어”라며 웃었다.) 스태프가 딱 한 분 계 시더라. 너무 부지런해도 스태프들이 불편할 수 있겠다 싶어서 다음부터는 조금만 일찍(웃음) 갔다.
오디션 과정에서 내가 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진 않았나?
전혀. 10명 넘는 배우가 워크숍 형태로 그룹 오디션을 봤는데, 잘하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처음엔 나를 잘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감독님께서 알아챘는지 “뭘 보여주려고 하든 그거 보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 하시더라. 그때부터 어떻게 해야겠다는 마음을 버리고 그저 훈련이다 생각하며 임했던 것 같다.
어제도 처음의 순간이 있었다고. 완성된 영화를 보고 왔다고 들었다.
배급사에 가서 영화를 봤다. 사실 어제도 두 시간 일찍 도착해 근처 카페에서 일기 쓰고 별의별 걸 다 했는데,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촬영 때보다 더 떨렸던 것 같다. 감독님의 팬으로서 신작을 먼저 볼 수 있어서 그런 건지, 나의 첫 영화라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시나리오 읽었을 때, 연기를 할 때, 그리고 완성된 영화를 봤을 때 달리 느껴지는 지점이 있었나?
모든 순간이 다 다르게 느껴졌다.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상상한 장면이 현장에서 더 풍성하게 구현되는 걸 보며 ‘이렇게 되는 거구나’ 싶어 신기했는데, 결과물을 보니까 또 새로운 세계가 보였다. 감독님이 마법을 부린 게 아닌가 싶다.(웃음)
‘주인’은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사랑스럽고 쾌활해 보이지만 괴팍할 때도 있고, 자신을 숨기려는 듯하다가도 의외의 순간에 솔직해지는 것 같다. 주인을 어떤 사람이라고 이해했나?
지금 말해준 모든 부분이 나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오디션이나 미팅에 가면 평소 성격이 어떠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데, 그때마다 대답하기 무척 어려웠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답이 나오지 않아 자꾸 포장하게 되고, 집에 돌아와선 ‘그건 내가 아니었는데’ 하며 후회하고. 그런 맥락에서 주인을 바라보니 왔다 갔다 하는 듯한 모든 말과 행동이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럼에도 굳이 정의하자면 용감한 친구라고 말하고 싶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사랑하고, 즐기고,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싸우는, 되게 용감한 친구.
주인을 연기하는 과정에서는 어떤 고민이 있었나?
감독님이 가장 많이 하신 말이 있다. “진짜로 들어.” 나는 듣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꾸 안 듣는다고.(웃음) 그때부터 주인을 어떻게 표현해야겠다는 생각보다 현장에서 진짜 잘 보고 듣는 데 집중했던 것 같다. 현장에서 감독님이랑 얘기를 아주 많이 나눴다. 숙제도 엄청 많이 내주셨는데, 돌이켜보면 그게 다 주인이 되기 위한 과정이지 않았나 싶다.
어떤 숙제를 받은 건가?(웃음)
영화와 책을 많이 추천해주셨다. ‘이렇게 해!’ 하고 정해주신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주인이 되어갈 수 있는 작품들을 알려주신 거다. 어느 날인가 감독님이 ‘연기는 겨루기’라는 말을 해준 적이 있다. 내가 연기를 시작하기 전에 태권도를 오래 했는데, 감독님이 그 사실을 알고 내가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연기를 알려주신 거다. 겨루기란 게 시합 당일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고, 내 컨디션도 어떨지 모른 채로 준비하는 시합이지 않나. 실전에서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모르기 때문에 더욱 매일의 수련을 잘 쌓아두어야 하는 것이고. 그걸 깨닫고 나니 감독님이 내주는 숙제가 ‘발차기 연습이구나, 여한 없이 덤벼보기 위해 연습이 필요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태권도 하듯이 파이팅 하면서 현장에 나갔다.
우연의 일치인가? 영화에서 주인도 태권도장에 다닌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읽으며 더 ‘이 사람 난데?’ 했었다.(웃음) 하고 싶어서 의미를 부여한 걸 수도 있는데, 주인과 내가 비슷한 점이 참 많다.
처음이라 설레고, 처음이라 두렵고 어려웠으리라 짐작한다. 현장에서 느낀 즐거움과 두려움에 대해 들려준다면?
즐거우면서도 두려웠던 건 무전기를 통해 들려오는 감독님의 목소리?(웃음) 말 자체가 무서운 게 아니라, 모든 감각을 끌어올려야 하는 신호라는 점에서. 그 외에는 신기하고 즐거운 것 투성이였다. 감독님의 연출을 모니터를 통해 실시간으로 보는데, 이 과정에서 감정이 확 몰려드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집에서 혼자 준비할 땐 계산하지 못한 감정이 생긴 거다. 현장의 즐거움이란 게 이런 건가 싶어서 놀랍고 신기했다.
완성된 영화를 보면서도 새롭게 느끼고 얻은 게 많았을 것 같다. 어제 영화를 보고 나서 어떤 생각이 들었나?
나를 더 돌아보게 되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더 생각하게 됐다. 사람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 것 같다.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고. 이렇게 즉각적으로 내 삶에 영향을 미치는 작품이 많지 않았던 터라 더 신기하다.
첫 인터뷰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묻고 싶다. 이제 배우가 되었음을 실감하나?
아직. 언제 하게 될까?
해외 영화제도 가고(<세계의 주인>은 제50회 토론토 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공식 초청되었다), 개봉하면 관객과의 만남도 하게 될 테고, 오늘처럼 인터뷰도 하게 될 거다. 이 모든 처음의 순간을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싶은가?
모든 게 처음이라 어떨지 조금도 가늠이 안 된다. 그래서 정말 소중히, 즐겁게, 피하지 않고 온전히 경험하는 것이 목표다. 하, 준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