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과 여백으로 시네마의 순도 높은 자리까지 스며드는 영화 <여행과 나날>.
빛과 고요로 삶의 가장 맑은 얼굴을 드러내는 감독 미야케 쇼와 배우 심은경.

심은경 아이보리 실크 러플 장식 톱, 울 개버딘 테일러드 재킷과 팬츠 모두 McQueen.


저는 매 순간이 완연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지나간 순간은 다시 올 수 없고,
미야케 쇼
그건 배우의 연기뿐 아니라 그날의 부는 바람, 그 시간의 빛,
현장의 모든 조건이 찰나에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지금 이건 단 한 번뿐이다’라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슬럼프에 빠진 각본가 ‘이’(심은경)의 목소리와 움직임을 따라 여름과 겨울을 건너오는 영화 <여행과 나날>.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새벽의 모든>으로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찬사를 받아온 미야케 쇼 감독의 신작으로 배우 심은경이 주인공 ‘이’ 역을 맡았다. 미야케 쇼 감독은 늘 그랬듯 이번에도 자신의 속도를 잃지 않는다. 낮고 고른 호흡으로 여름과 겨울, 정적과 발걸음, 인간의 미세한 표정을 비추며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하나의 여정임을 천천히, 오래 머무는 방식으로 보여준다. 지극히 평범한 생의 진리가 우아하고 정제된 숏을 만나 새삼 신비로이 번뜩인다. 주인공 이를 연기한 배우 심은경의 한국어 내레이션은 담백하면서도 유려하고, 그 진실하고 맑은 얼굴이 내내 아름답다. 제78회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의 최고상인 황금표범상을 수상한, 더 말을 보태지 않아도 좋을 수작이다. 12월 10일 개봉.




심은경 플라워 모티프 장식 헤링본 재킷, 화이트 셔츠 모두 WOOYOUNGMI, 그레이 울 팬츠 EENK.
영화 <여행과 나날>은 미야케 쇼 감독과 심은경 배우의 만남으로 이미 한국 관객에게는 기대작이기도 합니다. ‘이’ 역할로 심은경 배우를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미야케 쇼 3년 전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심은경 배우를 처음 봤습니다. 당시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이라는 작품으로 부산에 왔었는데, 그때 은경 씨와 함께 단상에 올라 스페셜 토크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그때의 인상이 강하게 남았어요. 그래서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쓸 때, 주인공 역할을 꼭 은경 씨가 맡아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됐어요.
심은경 배우는 어땠나요? 작품으로만 인식하던 감독의 인상이 실제 작업하면서 변하기도 하잖아요.
심은경 감독님을 처음 뵀을 때는 제가 긴장을 많이 했죠. 워낙 낯을 많이 가리기도 하고요. 이렇게 빨리 감독님과 함께 작업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작업하며 감독님께 감동받고 인상 깊었던 건 영화를 만들어가는 방식이었어요. 촬영 전 모든 스태프가 모여 각자의 파트를 소개하는 자리가 있었거든요. 눈이 많이 내리는 곳에서 촬영하는 터라 위험에 대한 안내와 주의 사항을 세심히 정리한 안내문을 보내주셨어요. 누구 하나 다치지 않고 건강하게 촬영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당부와 함께요. ‘영화는 모든 사람이 같이 만드는 것이다’라는 인식 아래 모든 스태프, 배우를 하나로 통합하는 감독님 특유의 방식이 인상적이었어요. 그 무엇보다 촬영이 즐거웠어요. 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 느꼈던 즐거움을 다시금 찾게 해준 작품이에요. 그래서 의미가 깊고요.
영화를 보면서 미야케 쇼 감독이 심은경 배우의 어떠한 면모 혹은 조각에서 ‘이’를 분명히 보았을 거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미야케 쇼 맞아요. 지금까지 스크린에서 본, 지금까지 연기한 역할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느꼈습니다. 본인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쑥스럽거나 기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요. 비유하자면 깊은 산속에는 아주 깨끗한, 그냥 마셔도 좋은 맑은 물이 흐르잖아요. 육안으로도 ‘와, 아주 깨끗한 물이 흐르네’ 하고 놀랄 법한. 심은경 배우에게 그런 맑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표현이) 실례가 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웃음)
쓰게 요시하루 작가의 원작 만화를 감독의 시선으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어떤 부분을 중심적으로 보고자 했는지도 궁금합니다.
미야케 쇼 우선 여름과 겨울이라는 대비되는 계절을 한 영화 안에서 보게 된다면 새로운 영화적 체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나아가 ‘이’라는 주인공이 작가로서 고민하고, 쓰기를 그만두고, 여행을 결심하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고, 다시 이야기를 쓰겠다고 마음을 다잡는 일련의 모든 과정을 통해 우리의 인생과 이야기의 관계성에 대해 진지하게 그려보고 싶었습니다.
그런 삶에 대한 성찰 때문인지 이전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고독의 심연이 보다 깊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미야케 쇼 세상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의 인생은 어떤 이야기인지, 어떤 이야기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대중적인 이야기 혹은 이미 만들어진 기성 이야기의 틀에 자신의 인생도 끼워 맞춰버리는 경우가 있죠. 이 영화는 혼자가 되고, 고독 속에서 내 인생이 어떤 이야기인지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영화입니다. 그러려면 다른 사람이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본인의 이야기와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고독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말이 없는 순간이 더 영화적이고, 좀 더 깊게 다가오는 작품입니다. 비언어적 연기를 해나가며 두 분이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궁금했습니다.
심은경 감독님과 고전 무성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무성영화의 어떤 특성이나 질감을 가지고, 이를 계승하는 영화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지닌 연기적 특징과 개성을 살리기보다 영화 안에 온전히 녹아드는 것이 가장 중요했어요. 영화의 미장센이라고 할 풍경 안에 배우도 놓여 있는 거죠.
드넓은 들판 위, 한 그루의 나무처럼요.
심은경 네. 그렇게 나 자신이 존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독님의 말씀대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는 것이 이 영화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봤어요. ‘이’라는 인물은 관객 각자가 자신의 시선을 대입해 바라볼 수 있는 여지를 가진 캐릭터고, 영화 역시 그런 방식으로 각자에게 다른 경험을 줄 수 있는 작품이라고 느꼈고요. 영화 안으로 함께 들어가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내 이야기는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생각해볼 수 있도록 여백을 남기는 데 집중했습니다. 촬영 과정에서도 그 점을 가장 많이 고민했는데, 감독님과 프레임 안에서 제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상의했어요. 예를 들어 고개를 한 번 돌리더라도 몇 초 뒤에 돌릴지, 각도를 얼마큼 줄지, 혹은 아예 움직이지 않는 편이 더 나은지 등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카메라 앵글을 보면서 함께 결정해나갔습니다.
요즘 관객이 이 영화에 깊이 빠져들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침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소란한 시대에 깊은 고요 속으로 빠져드는 경험이 될 테니까요. 동시에 우리가 사랑해온 시네마의 본질 역시 이런 느리고 천천히 음미하는 영화의 형태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감독님은 이러한 요소를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작업하셨나요?
미야케 쇼 앞서 은경 씨가 말한 ‘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 느꼈던 즐거움’이라는 표현을 인용하고 싶은데요. 저 역시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느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움과 경이가 있거든요. 왜 우리가 때로 문득 잠에서 깼는데 불현듯 꿈과 현실을 파악하기 어려운 한밤의 조용한 시간을 맞을 때가 있잖아요. 그 고요 속에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이 동시에 스며드는 감정 말입니다. 저도 오랫동안 이 일을 하다 보니 영화를 보는 일도, 배우와 함께 작업하는 일도 어느 순간 당연해졌는데, 이번 작품을 하면서 다시 한번 그런 ‘처음의 감정’을 느껴보고 싶었습니다. ‘컷’이라고 외칠 때 가슴이 두근거리는 순간 말이죠. 그리고 관객도 이 영화를 통해 마치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처럼 ‘아, 영화라는 것은 굉장하구나’ 하는 감정을 다시금 느끼길 바라는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영화에서 ‘이’라는 인물을 보면, 창작 과정-특히 글을 쓰는 행위가 곧 자신의 삶을 돌보는 일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감독님은 이러한 ‘글쓰기’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나요?
미야케 쇼 무언가를 쓴다는 건 과거 혹은 미래를 정리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을 들으며 글 쓰는 행위, 그 시간은 삶과 분리될 수 없는 중요한 관계라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저는 예전부터 영화 속 인물이 무언가를 쓰는 장면을 자주 찍었고, 이런 장면에 가장 큰 관심과 흥미를 느낀 것 같아요. 사람이 무언가를 깊이 생각하거나 글을 쓸 때는 무방비로 고도의 집중을 하게 되잖아요.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일이 저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이번 영화에서도 은경 씨가 ‘이’로서 시나리오를 쓰는 장면을 촬영할 때 유난히 즐거웠어요. 크랭크인 때 그 장면으로 촬영을 시작했죠. 책상에 앉아 글을 쓰거나 잠시 손을 멈추고 생각하는 모습을 촬영하면서 “아, 이 영화는 분명 재미있을 거다”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심은경 배우를 바라보며) 신기하게도 크랭크업 마지막 장면 역시 글 쓰는 장면이었죠? 영화의 시작과 끝이 모두 ‘쓰기’로 연결되어 있고, 그만큼 저에게 아주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감독님의 영화는 매우 미묘한 결이 중요한데, 그런 미묘함을 함께 이해하고 읽어낼 수 있는 코드가 맞아야 작업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작업 과정에서 서로 심정적으로 교차 하거나 자연스럽게 맞닿은 지점들이 있었나요? 작품뿐 아니라 감정적·미적 코드가 잘 맞아서, 그 미묘함을 함께 읽어낼 수 있다는 느낌을 받은 순간이 있었는지도 궁금합니다.
미야케 쇼 우리가 하는 작업은 요리할 때 소금을 1g 단위로 조절하는 식의 세밀한 방식은 아닐 겁니다. 큰 흐름에서 유머가 통한다든가, 기본적인 감각이 맞는다면 ‘소금은 이 정도, 설탕은 이 정도’라는 식으로 서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현장에서 저희 나름대로 주고받는 농담이나 가벼운 대화들이 그런 감각을 확인하는 순간들이었고요. 유머라는 것이 서로를 굉장히 신뢰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심은경 오늘 화보를 촬영하면서도 감독님과 “지금 장면은 흑백영화 같다”, “영화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을 떠올리게 한다” 같은 이야기를 나눴는데요. 그때 제가 한 장면을 흉내 내기도 하고, 누군가의 성대모사를 하기도 하고, 배우 버스터 키튼의 움직임을 살짝 재현해보기도 하거든요. 현장에서도 감독님이 그런 순간들을 무척 좋아하셨고, 그런 유머를 함께 즐기며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맞아갔어요. 그렇게 가볍게 웃는 시간 속에서 영화에 대한 깊은 이야기도 이어졌고, 우리가 좋아하고 영향을 받은 영화들의 에센스를 이번 작품에 어떻게 잘 담고 표현할 수 있을지 계속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작업한 것 같아요.
인터뷰 초반에 잠깐 계절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이 영화의 여름과 겨울 풍경을 보며 우리가 사랑해온 영화의 근본적인 아름다움이 다시 떠올랐습니다. 감독님은 이런 계절과 풍경의 대비를 구성하면서 어떤 기대를 가졌는지 궁금합니다.
미야케 쇼 저는 영화관에 가는 걸 굉장히 좋아합니다. 영화를 보고 영화관 밖으로 나왔을 때, 들어가기 전과 똑같은 풍경일 텐데도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 경험을 아주 좋아합니다. 관객이 이 영화에서 여름 풍경, 섬 풍경, 설국의 풍경을 보고 영화관 밖으로 나왔을 때 아마 분명히 ‘아!’ 하게 되지 않을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좀 다르게 보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합니다. 영화 안에서 여러 계절을 느낌으로써 눈과 귀를 비롯한 몸의 여러 감각이 환기되는, 그런 영화 체험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촬영 당시에는 잘 느끼지 못한 어떤 장면이 유난히 마음을 붙잡는 순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일종의 잔상처럼 계속 떠오르는 장면들도 있나요?
심은경 마음에 오래 남아 있는 장면은 엔딩인데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눈길을 걷는 장면이었어요.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이 아니라 눈 쌓인 논밭이었거든요. 꽤 먼 지점을 향해 걸어가야 했고, 그러다 중간에 제 발이 눈 속에 빠졌어요. 발이 빠졌는데도 컷 소리가 나지 않아서 어떻게 하지 했는데, 스태프들 말로는 제가 다시 기어 나와 계속 걸어갔다고 하더라고요. 그 덕분에 화면에서는 엉금엉금 움직이는 모습이 돼버린 거예요. 그래서 촬영할 때는 엔딩이 경쾌한 톤이겠거니 생각했거든요. 감독님도 당시 제가 공유한 플레이리스트 중 글렌 밀러의 스윙 재즈를 틀어놓고 너무 재밌지 않냐고 하셨거든요. 그래서 이런 분위기로 영화가 마무리되나 보다 했는데 완성된 영화를 보니 완전히 다른 결의 엔딩이 되어 있었어요. 완성된 장면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엉금엉금 가는 모습이 ‘서툴러도 그렇게 나아가는 거야,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 인생이란 그런 것이야’라고 말하는 듯 했거든요.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게 영화구나 하고 그때 실감했습니다. 촬영할 때의 코믹한 분위기와는 판이하게,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으로 완성된 것이 인상적이었고, 영화의 힘을 가장 크게 체감한 순간이었어요.
미야케 쇼 그 장면에 대해 말하자면, 원래 시나리오에는 설원을 혼자 걸어가는 장면이 마지막 신이었어요. 그런데 촬영 직전에 그 장면이 필요 없을 것 같아 제가 삭제했어요. 그랬더니 은경 씨가 원래 시나리오에 있던 라스트 신을 아주 좋아했는데, 찍어보면 어떻겠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오, 그럼 한번 찍어볼까?’ 하고 다시 넣게 되었고, 그렇게 그 장면이 탄생했습니다. 은경 씨가 찍자고 말하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장면이에요. 이렇게 인터뷰를 하면서 이 영화가 결코 나 혼자 만든 게 아니구나 하고 새삼 느낍니다. 시나리오를 쓸 때는 무척 괴로운 시간이었지만, 은경 씨가 참여하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금의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다시 실감하고 있습니다.
감독님의 영화는 쉽게 희망을 말하지 않지만, 아주 작고 은은한 희망이 흐른다고 느낍니다. 실제 삶에 존재하는 희망도 그런 모습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고요. 이런 감상이 감독님이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도 맞닿아 있다고 느끼나요?
미야케 쇼 저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며 관점이 조금씩 달라졌어요. 젊을 때, 특히 10대 때에는 내일이면 세상이 완전히 달라질지도 모른다거나 내 인생이 크게 바뀔 수 있다고 기대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그런 일은 인생에서 거의 일어나지 않는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비관적인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큰 변화는 흔하지 않지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변화가 있는 한 그것으로 오케이’라고요. 그런 게 희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식물에 물을 주는 것처럼 매일매일 변화가 뚜렷하지는 않더라도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자라듯이. 물론 식물이 인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변화하지만, 인간도 그렇게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로 관객과 무엇을 나누고 싶은가요?
미야케 쇼 은경 씨는 그동안 여러 역할을 해왔지만, 이번 작품에서 보여주는 ‘이’의 연기는 많은 분이 꼭 봤으면 좋겠습니다. 하나 더 있다면 관객이 이 영화를 하나의 체험으로 받아들여주었으면 합니다. 이 영화 자체가 여행의 여정처럼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여행마다 각자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것을 느끼듯 관객이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는지는 전적으로 자유입니다. 분명 어떤 변화가 일어날 만한 여행 이야기를 만들었으니, 이를 마음껏 즐겨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요즘 긴 영화도 많은데, 이 영화는 클래식하게 러닝타임이 90분 이내예요.(웃음) 그 안에서 충분히 큰 경험을 하실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심은경 저는 로카르노 국제영화제에서 감독님의 수상 소감이 참 인상 깊었어요. “혼란스럽고 힘든 세상 안에서 영화가 할 수 있는 일, 영화의 기능이 무엇인지 탐구하고 싶었다. 그리고 함께 공유하고, 나눌 수 있는 영화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수상 소감처럼, 이 작품에 그 시도와 시선이 담겨 있다고 생각해요. 이 영화를 본다고 해서 삶이 갑자기 크게 변하지는 않겠죠. 하지만 아주 작은 것이라도 느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어떤 변화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요. 시사회 후 감독님이 제 감상이 궁금하다고 여러 번 물어보셨는데 그 자리에서 바로 대답할 수가 없었어요. 이 작품은 단순히 좋다, 나쁘다로 말할 수 있는 영화가 아니라 하나의 체험처럼 다가왔기 때문이에요. 촬영 현장에서도, 관객으로 영화를 볼 때도 이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을 불러일으켰어요. 그래서 집에 돌아와 ‘이 영화가 도대체 무엇일까?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오래 생각했지만 지금도 명확히 정의하지는 못하겠어요. 감독님 말씀처럼 영화를 보는 각자에게 맡겨진 몫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라는 캐릭터는 그런 감정과 체험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일종의 메신저 같은 존재라고 느껴요. 감독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이 영화는 귀로 보고 눈으로 듣는 체험에 가까워요. 스크린에서만 온전히 느낄 수 있는 바다 소리, 파도와 흰 눈이 쌓인 설원의 질감, 바람의 풍경들—그 감각을 관객이 영화관에서 온전히 경험해주셨으면 해요. 요즘 그런 경험이 점점 드물어지고 있으니까요. 이 영화가 세상을 향해 한 발자국 더 내디딜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무리할까요. 영화를 보며 ‘영화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새삼 떠올리게 됐습니다. 두 분은 영화의 아름다움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심은경 저는 영화의 아름다움은 ‘움직임’에 있다고 생각해요. 영화 이전에는 회화나 사진처럼 정지된 이미지밖에 없었지만, 영화는 실제 눈앞에서 보듯 움직임을 그대로 담아냈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큰 놀라움을 주었잖아요. 이번 작품을 촬영하면서 그 사실을 더욱 깊이 체감한 것 같아요. 이전에도 연기를 할 때 움직임이 중요하다고 늘 생각했지만, 이번 영화를 하며 그 확신이 더 강해졌어요. 특히 무성영화를 보면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캐릭터를 만들어내고, 대사 없이도 성격과 상황을 모두 설명하잖아요. 연기자인 제게는 그 움직임의 힘이 참 아름답게 느껴져요. 그리고 그런 영화적 미학을 표현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계속해서 제가 영화를 하고 싶게 만드는 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미야케 쇼 영화를 촬영하며 배우는 같은 장면을 여러 번 반복하지만, 저는 매 순간이 완연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한번 지나간 순간은 다시 올 수 없고, 그건 배우의 연기뿐 아니라 그날의 부는 바람, 그 시간의 빛, 현장의 모든 조건이 찰나에만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지금 이건 단 한 번뿐이다’라는 마음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그럼에도 그 사실을 쉬 잊고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기 쉽죠. 으레 익숙하게 느끼며 놀라움도, 감동도 없이 찍는 것과 ‘지금 이건 단 한 번뿐이야’ 하고 생각하면서 찍는 것은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을 하나하나 의식하면서 찍어가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집중과 감각이 결국 영화 속에서 ‘아름다움’이라는 형태로 전달되지 않나 생각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