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은 순간이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모든 것이 멈춘 2020년, 벨기에 앤트워프라는 낯선 땅에 발이 묶인 유태오도 그랬다. 그래서 그는 꿈결 같은 상상 속으로 떠났고, 그 여정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영화 ‘로그 인 벨지움(Log In Belgium)’이 뉴욕 현대미술관(MoMA)과 한국영상자료원이 함께 여는 프로그램 ‘서울의 밤: 한국 영화에 대한 개인적인 기억들’의 상영작으로 선정됐다.
이제 유태오는 어디로도 달아나고 싶지 않다. 그건 팬데믹이 끝나서도, MoMA에 연출작이 걸려서도, 세계 곳곳을 누비며 차기작을 촬영하고 있어서도 아니다. 오롯이 오늘을 살아가는 법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이제 꿈속을 누비고 있다.


MoMA에서 ‘로그 인 벨지움’을 상영한다는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어땠나요?
좋은 의미로 당황했죠. ‘로그 인 벨지움’은 영화로 만들기 위해 마음먹고 찍은 것도 아니고, 팬데믹 시기에 혼자 있는 동안 제 나름대로 심각한 상황을 풀어 보려고 찍은 것이었으니까요. 영화라기보다 영상 에세이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MoMA에서 상영한다니 너무 영광스러웠고 감사했죠.
그래서인지 ‘로그 인 벨지움’은 일상 브이로그 같기도 해요. 휴대폰 카메라로 촬영했고, 시퀀스마다 해시태그가 붙어 있죠. 하지만 이 작품은 분명 영화예요. 이 영화를 ‘브이로그’가 아닌 ‘시네마’로 만들어 주는 지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관객들이 ‘로그 인 벨지움’을 영화로 받아들여줘서 고마울 뿐이에요.(웃음) 굉장히 작가주의적인 방식으로 만들었거든요. 제가 평소에 생각하는 방식이 영화의 구조를 닮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영화는 제가 오랫동안 공부한 분야이기도 하고요. 저를 위해서, 그리고 제게 흥미로운 것을 만들려다 보니 자연스럽게 3막 구조로 구상했어요.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저의 상상을 편집과 전환 효과로 구현해냈죠. 그런 지점들이 영화적으로 느껴졌을 거라고 생각해요.
1막부터 3막까지 ‘또 다른 나’와 각각 다른 언어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한 번씩 등장하는데요. 영어로는 ‘과거’에 대해, 독일어로는 ‘그림자’에 대해 이야기하고, 마지막 대화는 한국어로 이어지죠. 각 대화의 주제마다 다른 언어를 연결한 것이 상징하는 바가 있을까요?
특별한 의미를 두고 구성한 장면은 아니에요. 당시에 제 친구들이 이 작업을 보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서 찍었기 때문에, 저 스스로를 계속 비꼬면서 질문을 던지려 했던 거예요. 마침 제가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 언어가 영어, 독일어, 한국어였던 거죠. 당시의 상황이 심각하긴 했지만, 동시에 그렇게까지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달래주려고 했던 기억도 나네요. 그 상황에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게, 지금 돌이켜보면 운이 좋았던 것 같아요.(웃음)


영화는 코로나19 팬데믹이 막 시작되던 2020년 초부터 약 1년간 촬영됐죠. 어느덧 그로부터 6년이나 흘렀어요. 지금 ‘로그 인 벨지움’을 다시 보면 감회가 새로울 것 같아요.
그 작업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제 신념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또 지금도 여전히 믿고 있는 신념은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되돌아보게 해주는 근거가 된 것 같아요. 저한테는 개인적인 기록이기도 해서, ‘그때는 그렇게 생각을 했구나’ 하면서 부끄러운 마음에 웃음이 나올 때도 있어요.
가장 크게 달라진 생각이 있다면요?
제 그림자와 독일어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이런 말을 했어요. ‘너는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미래의 걱정 때문에 현재를 살지 못한다’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더 이상 그렇게 살고 있지 않아요. 오로지 현재에만 집중해서 살고 있거든요. 특히 현장에서 연기할 때 그렇게 느끼죠. 예전에는 작품에 대한 해석이나 연출 방향 처럼 약속된 틀 안에서 항상 먼저 허락을 얻고 연기하는 편이었어요. 시간이 지나 어느 순간부터는 ‘허락을 부탁하는 것보다 일단 저질러 버리고, 용서를 부탁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니 일단 저지르자’라고 생각했어요.(웃음)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그때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더라고요.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더 순수하게, 제 마음이 가는 대로 살고 있어요.
그럼 여전히 믿는 것은요?
‘영화는 사치가 아니라 필수다.’ 저는 절대적으로 그렇게 믿어요. 에단 호크 배우가 말했듯, 시 한 편, 소설 한 장, 영화 한 편, 노래 한 곡… 이것들은 생존만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건 아닐지도 몰라요. 먹고살기 바쁜 와중에 사치처럼 느껴질 수도 있고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 소중한 사람이 사라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저도 1년 반 전에 아버지를 떠나보냈거든요. 그럴 때 노래 한 곡, 영화 한 편, 시 한 줄이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위로가 되어주기도 해요. 생존, 물론 너무 중요하죠. 하지만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예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믿어요. 그렇지 않다면… 살아가는 이유를 찾기 어려울 것 같아요.(웃음)

“영화는 내게 감수성이 통하는 가상의 세계야”라는 대사도 인상 깊었어요. ‘감수성이 통한다’라는 것은 유태오에게 어떤 의미인가요?
감수성이 통하는 매체를 찾았다고 말한 이유는, 반대로 감수성이 통하지 않는 사생활이 있기 때문이겠죠. 저는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살았고, 지금은 한국에 집을 두고 있는데요. 언어마다 담고 있는 문화적 감수성이 다르다 보니, 어떤 언어의 감각이 다른 문화에서는 그대로 전달되지 않는 순간들이 있더라고요. 각 언어가 갖고 있는 감수성의 교집합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요. 그렇지 않을 때는 ‘이쪽 문화의 단어에 저쪽 감수성을 얹으면 어떤 연기가 나올까?’라고 많이 상상하기도 해요. 예를 들어 영어의 ‘vulnerability’는 긍정적인 감수성을 담고 있는 반면, 이를 독일어나 한국어로 번역하면 ‘깨질 정도의’, ‘부러질 만큼 나약한’처럼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니죠. 제가 영어의 ‘vulnerability’가 가진 감수성을 한국어에 입혔을 때, 실제로 다른 결의 연기가 나왔던 것 같아요. 제가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건 영화라는 매체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영화라는 가상의 세계가 저의 감수성과 맞는다고 표현한 거죠.
이번 ‘서울의 밤’ 프로그램은 1960년대부터 2020년대까지 한국 영화의 흐름을 조망하고 있어요. 그 전반에 흐르는 가장 한국적인 감수성은 무엇일까요?
‘한’이 아닐까요? 지역적으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한이 맺혔다’는 게 한국 영화만의 차별점이 되는 것 같아요.
‘로그 인 벨지움’도 한국 영화로서 그런 한의 정서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이야기하려면 먼저 ‘한’이라는 단어를 정의해야 할 것 같아요. 저는 외국인에게 ‘한’을 설명할 때 이렇게 말해요. 절대적으로 억압된 상태를 변화시키지 못하는데,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맺힌 감정.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제 영화 역시 그 감정과 맞닿아 있죠. 팬데믹으로 인해 한정된 상황과 공간에서, 실제로 몸이 억압된 상태에서 시작됐으니까요. 동시에 제가 느꼈던 답답함과 제 자아를 온전히 표현하기 어려웠던 문화적 맥락들을 담았기 때문에, ‘로그 인 벨지움’에는 저의 한이 담길 수 밖에 없었죠.

한편, 배우자인 니키 리 작가 역시 지난 2006년 MoMA에서 영화 ‘니키 리라고도 알려진’을 상영했어요. 다큐멘터리면서도 다큐멘터리가 아니고, 한 사람의 다양한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로그 인 벨지움’과 맞닿아 있는 듯해요.
벌써 2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네요. 2006년에 니키를 만나기 시작하자마자 함께 그 영화를 보러 MoMA에 갔었어요. 당시에 저는 문화나 미술, 섬세한 감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거든요. 니키와 20년 동안 많은 대화를 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죠. 그걸 저만의 방식으로 소화해서 제 작업으로 보여주게 됐고요. 두 영화를 함께 보면 관객들에게 그런 지점들이 더 와닿을 것 같아요.
앞으로 다른 영화도 연출할 계획이 있나요?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야 있죠. 일단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메모해 두고, 틈틈이 제미나이나 챗GPT와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아이디어에 살을 붙이고 있어요. 마치 좋은 어시스턴트 둘과 무언가를 발전시켜 가는 느낌이에요.(웃음) 다만, 아직 시나리오가 구체적으로 완성된 단계는 아니라서, 연출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지금 유태오의 꿈은 무엇인가요?
특별히 정해둔 건 없어요. 지금은 꿈속에 있는 기분이에요.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다 해보면서 살고 있거든요.
마무리할까요. MoMA에서 ‘로그 인 벨지움’을 만나게 될 관객들에게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아,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영화가 끝나고 무대인사를 한다고 상상해볼게요. “극 영화도, 다큐멘터리도, 다큐 픽션도 아닌, 에세이 영화라고 생각하고 이 작품을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관심을 갖고 영화를 보러 와주신 것 자체만으로도 정말 고맙습니다. 공식 석상에서의 배우 유태오가 아니라 아주 사적인 저의 모습을 보여드렸는데, 환상이 깨지지 않았기를 바랍니다.(웃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