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메말랐던 감수성에 촉촉한 단비를 내려줄 2026년 봄의 전시, 공연, 그리고 영화 하이라이트 4편을 엄선했습니다. 예술이 선사하는 다채로운 영감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전시 <엘 아나추이 개인전>

© El Anatsui. © White Cube (Theo Christelis)
© El Anatsui. © White Cube (Theo Christelis)

수천 개의 병뚜껑이 빚어낸 거대한 시간의 물결

버려진 병뚜껑으로 세계 유수의 미술관을 황홀하게 뒤덮어온 설치미술의 거장, 엘 아나추이(El Anatsui)가 올봄 서울을 찾습니다. 아시아 최초로 공개되는 그의 신작 금속 작업들을 화이트 큐브 서울에서 만나볼 수 있는데요. 그의 작품은 멀리서 보면 바람에 유연하게 일렁이는 거대한 황금빛 직물이나 화려한 색면 추상처럼 보입니다. 한 걸음 다가가면 수천 개의 버려진 병뚜껑과 금속 파편들이 구리 선으로 촘촘히 엮여 있음을 알게 되죠. 찌그러진 상표, 긁힌 자국, 산화된 붉은 녹은 물질이 견뎌온 축적된 시간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주목할 점은 작품의 양면성과 비고정성입니다. 은빛 단색조로 빤짝이는 안쪽 면과 흑색, 갈색, 붉은색이 대지처럼 얽힌 바깥 면이 극적인 대비를 이루죠. 작가는 작품을 벽에 고정된 조각으로 한정 짓지 않습니다. 중력과 환경, 관람자의 위치와 빛의 방향에 따라 매 순간 다른 인상을 만들어내는 살아 숨 쉬는 유기체처럼 공간을 장악합니다. 화이트 큐브 서울을 시작으로 홍콩으로 이어지는 이 거대한 조형의 변주곡을 통해 평범한 일상의 파편이 어떻게 숭고한 예술로 승화되는지 직접 목도해 보시길 바랍니다.

전시 <거리의 윤리>

타데우스 로팍
타데우스 로팍

빠름의 시대, 거리를 두고 느리게 바라보는 법

모든 것이 1초 만에 소비되고 휘발되는 숏폼의 시대, 타데우스 로팍 서울이 기획한 그룹전 ‘거리의 윤리(Distancing)’는 우리에게 느리게 바라볼 것을 권유합니다. 케이 이마즈, 김주리, 임노식, 마리아 타니구치 4명의 작가는 회화와 조각을 넘나들며 이미지와 물질이 시간을 두고 어떻게 우리의 감각 속에 선명해지는지를 탐구합니다. 전시장 입구에서 마주하는 마리아 타니구치의 거대한 벽돌 회화는 특정한 서사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직 수많은 벽돌을 쌓아 올린 수행적인 시간의 축적만을 보여주며 관람객의 발걸음을 늦추죠. 전시장의 심장부에는 김주리 작가의 흙 조각이 놓여 있습니다. 이 작품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전시장의 빛과 습도에 반응하며 서서히 갈라지고 붕괴하는 소멸의 과정을 실시간으로 보여줍니다. 임노식의 흐릿한 파스텔 톤 캔버스 속 형상들은 기억의 잔상처럼 부유하고, 케이 이마즈의 회화는 과거의 파편들을 하나의 평면 위에 충돌시킵니다. 이번 전시는 작품의 의미를 단숨에 파악하려는 조급함을 내려놓고 한 걸음 물러서서 작품이 내뿜는 미세한 진동을 온몸으로 감각해 보기를 제안할게요.

뮤지컬 <안나 카레니나>

마스트인터내셔널
마스트인터내셔널

광활한 러시아의 겨울, 파멸을 향해 돌진하는 뜨거운 욕망

톨스토이의 불세출의 명작 ‘안나 카레니나’가 화려하고 압도적인 스케일의 뮤지컬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무대에 오릅니다. 이 작품은 1,700쪽이 넘는 방대한 원작 속에서도 고위 관료의 아내 안나와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젊은 장교 브론스키의 금지된 사랑과 파멸에 현미경을 들이댑니다. 무대는 19세기 위선과 욕망이 소용돌이치던 러시아 귀족 사회를 경이롭게 재현해 냈는데요. 눈 덮인 자작나무 숲부터 눈이 부시도록 화려한 무도회장까지, 초대형 LED 스크린과 끊임없이 전환되는 무대 장치로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듭니다. 특히 극을 관통하는 거대한 기차의 등장은 숨이 멎을 듯한 스펙터클을 선사하죠. 200여 벌의 고풍스러운 의상과 앙상블의 아크로바틱 한 스케이팅 퍼포먼스는 종합 예술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2막의 하이라이트로 전설의 소프라노 패티가 부르는 아리아가 극장을 가득 채울 때, 홀로 객석에 앉아 비극을 직감하는 안나의 처절한 심경은 관객의 가슴에 묵직한 돌덩이를 얹어놓습니다. 단순한 불륜 치정극이 아닌 가부장적 시스템에 온몸으로 부딪힌 한 여성의 눈부신 반역을 확인해 보세요.

영화 <햄넷>

유니버설 픽쳐스
유니버설 픽쳐스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비극 뒤에 숨겨진, 한 여성의 경이로운 삶

‘노매드랜드’로 아카데미를 휩쓴 클로이 자오 감독이 셰익스피어의 삶 이면에 숨겨진 미지의 영역을 스크린으로 불러냈습니다. 매기 오패럴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햄넷’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을 연상시키지만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위대한 극작가가 아닙니다. 바로 그의 아내이자 역사 속에서 그림자처럼 지워져야 했던 여인 아녜스입니다. 영화는 셰익스피어 부부의 일찍 세상을 떠난 쌍둥이 아들 햄넷의 죽음이 어떻게 위대한 걸작 <햄릿>으로 승화되었는지를 추적합니다. 16세기 영국의 아름답고도 가혹한 자연을 배경으로 가족의 상실과 슬픔을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아녜스의 삶이 클로이 자오 특유의 시적이고 유려한 연출로 펼쳐집니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 하는 이유는 주연 배우들의 압도적인 연기력 때문입니다. 아녜스 역을 맡아 신들린 듯한 감정의 파고를 보여주는 제시 버클리와 셰익스피어 역을 맡은 폴 메스칼의 숨 막히는 앙상블은 올해 가장 아름답고도 슬픈 영화적 체험을 선사할 테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