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영화를 발굴하고 지지하는 마음을 담아, 지난해 한국을 넘어 아시아로 영역을 확장한
부산국제영화제의 ‘비전(Vision)’ 섹션이 2026년 한층 다채로운 영화들을 소개한다.
24편의 선정작, 25명이 감독이 함께하는 올해의 비전 섹션은
세대와 경력이 서로 다르고, 저마다 다른 주제 의식을 좇는 창작자들이
품어온 질문을 스크린에 폭넓고 생생하게 펼쳐낸다.
오늘의 감각과 내일의 가능성을 계속해서 그려나갈 감독들이
영화의 세계에서 지켜갈 신념과 열망, 꿈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왔다.

응우옌호앙디엡 NGUYỄN HOÀNG ĐIỆP

<1982>

베트남 영화가 해외에서 인정받고, 연일 박스오피스를 경신하는 시기. 그럼에도 감독 이은은 10년 동안 영화 한 편 만들지 못한 채 생활고에 시달려왔다. 인지저하증을 보이는 어머니, 문제아 취급을 당하는 아들, 빚더미에 앉은 여동생과 결혼하지 못한 남동생마저 그 삶의 무게를 더한다.

이야기의 시작
영화로부터 버려지는 일에 대한 두려움, 시력을 잃고 기억마저 잃어가면서도 내 성공을 바라던 엄마의 존재, 친구들의 믿음. 이 세 가지가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고, 막다른 곳에 다다르자 이상하게도 운이 따랐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집을 팔겠다고 결심하자 주변에서 돈과 힘을 보태준 덕분에 <1982>가 태어났다.

기억에 남는 순간
여성 감독 이은이 파산 후 한 비아허이(맥주) 가게에서 남성인 친구들에게 ‘영화와의 작별’에 대해 말하는데, 갑자기 불꽃놀이가 시작돼 모두 뛰쳐나간다. 홀로 남겨진 감독은 “영화 만세”와 “영화여, 안녕” 중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른 채 술을 마신다. 이후 그는 폭풍 의 한가운데에서 혼자 술잔을 들어 올리는데, 파도와 바람 소리가 그의 말을 삼켜버린다. 편집실이나 색보정실에서 이 장면들을 볼 때마다 멍해졌다. 그 아픔이 내게도 전해지는 듯했다.

화두와 질문
살아남는 일은 늘 힘들다. 그 어려움에 익숙한 인간이 욕망을 짊어진 채 나아갈 때, 그 길은 고통스러울 정도로 길지만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정이 된다. 그 순간, 그는 진정으로 살아 있는 게 아닐까.

나의 비전
<1982>가 검열을 통과해 베트남 극장에서 온전히 개봉하는 것. 엄마가 이 영화를 ‘보게’ 하고 싶다. 비록 이젠 시력을 완전히 잃었지만, 내 시선을 통해 영화를 ‘볼’ 수 있었으면 한다. 엄마의 침실에 영화를 틀어놓고 자막을 직접 읽어드릴 것이다. 또 하나의 꿈은 친구들과 부산에서 미치도록 감탄스러운 영화를 본 뒤 바닷가에 가서 산낙지를 먹고 싶다. 다 같이 비아허이 잔을 들어 올리며 이렇게 외칠 거다. “영화 만세, 산낙지 만세!

사히야 뱜바 SAKHYA BYAMBA

<멈춰서다 Zogsool>

코로나19로 몽골의 한 작은 마을이 갑작스럽게 봉쇄된다. 근처의 초원을 지나가다 마을에 멈췄던 유조차 운전사 숨베르는 주유소 앞에서 격리되고, 부패한 관리와 탐욕스러운 주유소 주인에게 성과 노동을 착취당하던 싱글 맘 한다는 그를 관리하는 일까지 떠맡는다.

이야기의 시작
격동하는 시대다. 전쟁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배타적 민족주의가 팽배하며, 사람들은 끊임없이 권력과 부를 좇는다. 그런데 우리는 정치와 경제, 기술, 생물학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 상호 의존성은 코로나 19를 통해 분명히 드러났고, 당시 경험이 나를 <멈춰서 다>로 이끌었다. 영화가 다루는 마을 속 일상은 오늘날 세계의 축소판이다. 평범한 이들의 삶이 거시적인 힘과 어떻게 얽혀가는지 보여주고자 했다.

기억에 남는 순간
사운드 믹싱은 프놈펜에서, 색 보정은 방콕에서 했다. 캄보디아와 태국의 국경분쟁이 끝난 직후에 후반 작업을 진행해 더욱 의미 있었다. 정치적 긴장이 이어지는 중에도 협업하며 서로 돕고 우정을 쌓을 수 있어 기뻤다. 이 경험 자체가 영화의 메시지를 고스란히 보여주 는 것 같다.

화두와 질문
내 모든 영화는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인간으로 살아간다는 건 무엇일까?’ 친절, 연민, 사랑, 용서를 잃지 않는 건 쉬운 듯하지만 생존이 걸린 상황에서는 턱없이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인간다움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짊어져야 할 책임일 것이다.

감독의 일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 생각과 꿈, 행복, 두려움과 불안까지 나누는 것. 영화를 통해 나를 계속 괴롭히는 질문들을 표현해왔다. 내면 세계를 열어 보이고, 다른 이들을 초대하는 나만의 방식이다.

영화만의 힘
영화에는 시간이 흐르는 감각, 순간에 깃든 긴장과 정적, 리듬까지 담아낼 수 있다. 실제 시간과 스크린 속 시간의 특별한 관계를 통해 신체와 감정으로 경험할 수 있는 세계가 만들어진다. 삶과 기억, 인간 존재에 관한 것들이 그 안에 담겨 있다. 사회적 힘을 지닌 매체인 만큼 무엇을, 어떻게, 왜 보여주는지 더욱 의식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나의 비전
호기심과 열린 마음을 지키고, 내 삶의 믿음과 가치관을 솔직히 마주하며 오래 일하고 싶다. 영화가 현실을 벗어나는 수단에 그치지 않았으면 한다. 현실을 깊이 들여다보고, 미묘한 결의 차이를 발견하며 우리 자신을 좀 더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천젠잉 CHEN JIANYING

<다시 눈이 올 거야 There Will Be Snow>

얼음 도시 글래스터레와 지능형 도시 시스템 파이어웍스를 잇는 공사가 지연된다. 무용수 구천은 고도로 자동화된 도시의 무용단에서 연락을 받고 글래스터레를 떠날 생각에 들뜬다. 한편 파이어웍스 구축에 참여한 엔지니어 쉬추는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온다.

이야기의 시작
겨울이 길고 눈이 일상의 일부인 하얼빈에서 자랐다. 당시 여느 청년처럼 대도시에 더 나은 삶이 있을 거라 믿었는데, 고향을 떠나 여러 지역에서 살아보며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우리는 왜 더 나은 곳으로 가려고 할까? ‘더 나은 것’은 누가 정하는 걸까?’ 그 질문이 이 영화의 시작점이었다.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는 두 사람을 떠올렸다. 고향을 벗어나고 싶어 애쓰는 구천과 더 나은 세계라고 여기는 바깥세상을 경험한 뒤 돌아온 쉬추. 이들을 통해 ‘떠남’에 대한 욕망을, 무언가를 잃기 직전에 비로소 선명히 보이는 것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기억에 남는 순간
폭설이 내리는 날, 얼어붙은 강 위에서 구천이 홀로 춤추는 장면을 찍으려고 했는데 스피커가 고장 났다. 스태프들이 스피커 대신 각자의 무전기를 동시에 켜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마침내 음악이 흐르고, 구천의 몸짓을 마주하자 강렬한 감정을 느꼈다. 한 무리의 사람이
단 하나의 순간을 위해 모든 걸 쏟아내고 있었다. 완성본에 그 장면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영화를 만드는 일의 정신을 느낀 경험이었다.

화두와 질문
영화에서 인간의 삶은 기술로 인해 점점 매끄러운 형태가 되어간다. 하지만 구천은 본인의 몸으로, 노력과 반복, 고통, 그리고 중력을 통해 삶을 이해한다. 그 대비에 마음이 이끌렸다. 빠르고 똑똑하게 변해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만의 의미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 어쩌면 진보란 ‘무엇을 얻느냐’를 넘어 ‘무엇이 남아 있는지 알아보는 감각을 간직하고 있는가’에 관한 것일지도 모른다.

감독의 일
내가 무엇을 믿고 있는지 알아가는 방법. 내 작업은 대개 질문에서 시작하고, 그 대답은 캐릭터와 배우, 장소, 예상치 못한 상황 등을 거치며 조금씩 바뀐다. 그 과정이 세상과의 긴 대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만의 힘 영화는 사라져가는 것을 간직할 수 있다. 한 시기의 얼굴, 변화하기 전의 도시, 어느 겨울날 오후의 빛, 이별을 예감하지 못한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 영화는 그 순간을 붙잡아둘 수 있다. 그게 내가 영화에서 가장 사랑하는 지점인 것 같다.

나의 비전
사람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고, 작업 규모가 커지더라도 개인적 감각이 담긴 영화를 만들 용기를 지키고 싶다. 한 편을 완성해낸 내가 이전의 나와 다른 사람이 되어 있기를 바란다. 먼 훗날 작품들을 돌아봤을 때, 내가 겪어온 변화도 볼 수 있다면 좋겠다.

구마모토 료헤이 KUMAMOTO RYOHEI

<노래가 끝난 후 After the Song>

앞을 보지 못하는 어머니 하나에와 단둘이 살아온 열네 살 소년 키이타. 변성기에 접어든 소년은 어느 날 스스로 울타리를 넘어보기로 결심한다. 그러다 도쿄 골목에서 본인이 알던 것과 다른 사실들을 마주하고, 자신의 세계를 지켜온 거짓에도 다른 면모가 있음을 알아차린다.

이야기의 시작
‘지금 이 순간’에만 할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 실제 그 시기를 지나는 소년과 청소년기의 모호한 감정을 다뤘다. 아이들이 겪는 불안과 기대, 변화와 더불어 현실과 허구의 경계도 다뤘다. 부모는 성장하는 아이를 사랑하면서도 그의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지 않나. 그 상반된 감정을 느낀 경험이 영감이 되었다.

화두와 질문
누구든 유년 시절에 대한 불만과 분노, 후회가 있겠지만 미처 알아채지 못한 따뜻함도 있을 거라고 믿는다. 관객이 세상의 악의와 고통 곁에 있는 친절에 주목하고 나 자신과 타인을 너그럽게 용서하기를 바란다. ‘그때의 나도 나쁘지만은 않았던 것 같아’라고 느끼길 바란다.

감독의 일
동료 겸 친구를 늘려가는 과정. 엔딩 크레디트의 수많은 이름을 처음 봤을 때 뭉클했다. 함께한 시간이 영화의 형태로 남고, 그 순간을 관객과 공유하며 새롭게 연결된다는 데서 작업의 의미를 찾고 있다.

영화만의 힘
영화의 러닝타임에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순간, 생경한 감정, 낯선 사건까지 스며든다. 찰나의 장면들을 보여주면서도 현실에서 설명되거나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오롯이 품을 수 있는 게 영화의 힘이 아닐까 싶다.

나의 비전
첫 장편을 부산에서 월드 프리미어로 선보이게 되어 뜻깊다. 새롭게 찾아간 곳에서 마주하는 사람, 장소, 경험을 통해 확장된 세계를 차기작에 계속 담아내고 싶다.

아빈 벨라르미노 ARVIN BELARMINO

<리아 Ria>

철거를 닷새 앞둔 슬럼. 그곳에 빈곤과 국가 폭력을 매일 겪으면서도 서로를 도우며 생존하는 펑크족이 있다. 그들의 리더 올가는 갓난아기 때 버려진 리아를 거둬 길렀다. 어느덧 리아는 펑크 뮤지션으로 성장하고, 당뇨로 으스러져가는 올가를 돌보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시작
개인적이면서도 타인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마음. 억압받는 사람들의 연대를 보여주는 동시에 오늘날 필리핀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작은 세계 안에 담아내고자 했다. 문화와 사회의 경계를 넘어서는 성장과 회복력, 저항을 이야기하는 영화
로 완성했다.

화두와 질문
혹자는 펑크 문화를 반권위적 태도로 정의하지만, 폭력과 면책이 만연한 정부 아래 살아가는 시민에게는 자연스러운 대응이다. 누구든 저항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일 수 있고, 어느 순간 펑크가 될 수 있다.

감독의 일
무언가를 듣고 찾아내는 과정. 감독의 역할이 ‘통제’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분명히 알되, 영화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지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을 가지려고 한다.

영화만의 힘
한 순간을 간직하고, 계속 다시 경험하게 해준다는 것. 영화는 낯선 것을 익숙하게 느끼고, 서로 다르더라도 모두가 공유하는 감정과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공감의 힘을 지닌 매체다.

나의 비전
진정성 있는 시선을 통해 나만의 영화적 목소리를 가지는 것.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새롭게 시도하고, 질문하고, 자주 주목받지 못한 이야기와 인물이 설 자리를 마련해주는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가고 싶다.

마니 모가담 MANI MOGHADDAM

<미몽 Slumber>

기록보관소 직원이자 독실한 종교인인 모즈타바에게는 불면증이 있다. 그의 꿈에 어느 날부터 신비로운 여자가 나타난다. 잔소리를 늘어놓고 아이를 갖는 일에 무관심한 아내와 달리, 저항할 수 없는 유혹의 손길을 내미는 여자와의 만남이 그의 불만족스러운 일상에 균열을 내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시작
동양과 서양, 구체적으로는 이란과 유럽의 이중성에서 비롯됐다. 두 세계는 각자 자기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옳다고 믿는 경향이 있고, 그 믿음은 오해와 적대감, 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 두 세계와 대비되는 자리에 신비로운 꿈의 세계를 뒀다. 모든 게 가능하고 어떤 제약도 없는 그 세계를, 종교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회와 맞닿게 해 기묘하고 모순적인 영화 속 세상을 만들었다.

화두와 질문
옳고 그름, 자유와 제약, 현실과 꿈의 경계는 누가 결정하는 것인가? 사회와 종교의 규범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꿈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는 걸까, 아니면 숨겨진 본성을 마주하는 걸까? 영화는 이 질문을 중심에 두며 욕망과 신념, 자유로움과 죄책감 사이의 다층적인 충돌을 탐구한다.

감독의 일
평범한 삶에서 경험할 수 없는 세계로 들어가는 방법. 내 마음을 사로잡는 질문을 나누기 위해 영화를 만들고, 작업을 하며 미처 알지 못하던 성향과 신념을 찾아내기도 한다. 연출은 발견의 과정이기도 하다.

나의 비전
내 문화와 삶의 경험에 뿌리를 두면서도 이란 국경을 넘어 타지의 관객과 연결될 수 있는, 개인적이고도 독립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다. 전통과 자유, 신앙과 욕망, 동양과 서양 사이에서 벌어지는 긴장 등 현대인의 삶에 존재하는 모순을 계속 다루고자 한다.

인티라 차른뿌라 INTHIRA CHAROENPURA
펜시리 끌랑수린 PHENSIRI KLANGSURIN

<부아> Bua

시골에서 할머니와 사는 열다섯 살 소녀 부아. 뛰어난 외모를 가진 부아는 어느 날 엄마를 찾으러 방콕에 가기 위해 할머니 몰래 미인 대회 수업을 받는다. 할머니의 건강이 악화되고 세상이 흉흉한 가운데 아름답게 성장한 부아의 순수함과 절박함을 주변 남자들이 이용하려 한다.

이야기의 시작
끌랑수린 순수함을 지닌 채 태어났지만, 사랑과 신뢰로 인해 만들어진 운명을 마주하는 소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소녀뿐 아니라 성별과 관계없이 상처를 겪은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모아 생명력을 불어넣고자 했다. 그중 하나는 나의 것이기도 하다.
차른뿌라 열네 살에 연기를 시작해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겪었다. 소녀의 이야기를 중심에 둔 <부아>에 무언가를 보탤 수 있을 것 같았고, 영화에 대해 함께 고민하다 보니 연출까지 맡게 됐다.

화두와 질문
끌랑수린 과거가 무언가를 앗아갈 수 있지만, 정신과 마음속 순수까지 빼앗을 수는 없다. 수면에 아름답고 힘차게 피어나는 연꽃처럼, 그 모습을 드러내기까지 무엇을 견뎠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영화가 끝난 뒤 ‘이제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물 위에 올라왔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리길 바란다.
차른뿌라 삶이란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물론 아픈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좋겠지만, 겪고 나면 질문은 더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에 머물지 않고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로 이어진다.

감독의 일
끌랑수린 우리가 사라진 이후의 시간에게 일종의 편지를 남겨두는 것. 영화는 만들어진 순간에만 속하지 않고, 미래로 건너가 당시의 감정과 이야기, 진실을 경험하게 한다.

영화만의 힘
차른뿌라 영화는 수많은 사람이 셀 수 없이 많고 작은 조각들을 모아 만들고, 더 넓은 세상으로 뻗어간다. 그러면서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일, 결코 만날 수 없던 사람, 절대 경험하지 못했을 순간을 마주하게 한다.

나의 비전
끌랑수린 영화를 진실을 말하는 목소리로 삼고, 자신의 목소리를 낼 기회를 갖지 못했던 사람들을 위한 공간으로 만드는 것. 기회의 가장 큰 가치는 내 뒤를 잇는 누군가의 꿈까지 가능케 하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각자의 이야기를 펼칠 희망, 우리는 홀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감각을 전하고 싶다.
차른뿌라
영화가 여러 개의 방을 가진 집처럼 느껴진다. 그곳에서 무엇을 또 할 수 있을지 발견해가는 과정이 즐겁다. 내가 어우러질 수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 그 창작의 일부가 되고자 한다. 내 취향과 다르더라도 다양한 영화가 탄생하는 모습도 보고 싶다.

이사벨라 람록힌 ISABELLA LAM LOK-HIN

<데드 엔드> Dead End

한 살배기 딸을 둔 홍콩의 컴퓨터 프로그래머 허먼. 그 앞에 이복동생이라 주장하는 록이 나타나 주변을 맴돌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캐묻는다. 그렇게 허먼의 일상을 뒤흔들던 록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고, 허먼은 다른 세상으로 떠나려고 한다.

이야기의 시작
홍콩을 떠날 생각이 없던 한 친구가 어느 날 이민을 결심했다. 그 선택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험, 감정, 생각들을 쌓아갔을지 궁금해졌다. 이후 여러 곳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데드 엔드>를 만들었는데, 그럼에도 홍콩의 현세대가 공유하는 것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화두와 질문
‘어떤 일은 끝내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트라우마와 기억, 상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내게 ‘나아감’이란 모든 문제의 해결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로는 후회와 고통, 불확실성을 안고 살아가며 나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감독의 일
추상적 아이디어를 실제로 느낄 수 있는 세계로 만들어가는 일. 영화는 하나의 문장이나 감정에서 비롯될 수 있고, 이를 구체화하는 게 감독의 역할이다. 그만큼 영화 작업은 고되고, 수많은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한다.

영화만의 힘
특정 시공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며, 무엇을 중시하는지 담아낼 수 있다는 것. 시대가 바뀌어도 복기하고 기억할 가치가 있는 상태와 감정이 영화 안에 담긴다고 믿는다. 영화가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진 않지만, 적어도 현재에 응답하며 이 도시와 이곳 사람들의 모습을 어떤 식으로든 남겨주길 바란다.

나의 비전
불가능한 듯한 일을 현실화하는 것. 시나리오를 쓸 때만 해도 이 영화를 완성해 다른 나라의 관객에게 선보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지금의 홍콩과 그 안의 면면이 언젠가의 관객에게도 닿았으면 한다.

사일레시 라트나쿠마르 SAILESH RATHNAKUMAR

<셀비 Selvi>

가족을 돌보기 위해 도시로 온 셀비는 언젠가 진정한 간호사가 되어 두바이로 갈 날을 꿈꾸며 방문 돌봄 노동자로 살아간다. 어느 날, 동료 카비타가 자살을 시도하고 셀비는 그의 근무시간까지 떠맡는다. 셀비는 호소할 수 없는 피로와 무력감에 침잠되어간다.

이야기의 시작
팬데믹 시기에 방문 돌봄 노동자들을 지켜 본 적이 있다. 당시 절친한 촬영감독의 어머니가 위급한 상황에 처해 간호사들이 찾아왔다. 대부분 대도시로 온 이주민이었고, 소박하게 살아가며 더 나은 삶을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비슷한 상황에 처한 내게 와닿았다. 그들과 대화하며 영화가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화두와 질문
관객이 잠시나마 셀비의 인간관계, 고충, 희망을 알아가기를 바란다. 우리를 돌봐주는 이들을 떠올리고, 그 삶에 대해 얼마나 몰랐는지 들여다볼 수 있었으면 한다. 누군가를 직업인이 아닌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할 수 있다면, 이 영화로 하고자 한 일을 다한 게 아닐까 싶다.

감독의 일
삶을 한 바퀴 온전히 돌아보는 것. 관찰의 경험이나 감정, 사람 등 삶의 작은 요소가 그 계기가 된다. 이를 마음에 품은 채 무언가를 바라보고 귀 기울이며 영화를 만들다 보면 배우는 것이 있다. 한 편이 완성될 즈음이면 나도 조금은 달라져 있고, 삶을 좀 더 이해하게 된다.

영화만의 힘
한 사람의 삶을 오래 바라보게 한다는 것. 삶은 우리를 종종 원치 않는 상황으로 데려가지만, 그럼에도 나아가야 하지 않나. 영화는 그저 살아가는 데서 오는 조용한 힘을 담아낸다. 누군가의 일상을 보여주며 우리를 그의 곁으로 잠시 불러들이는 일은 영화만이 할 수 있다.

나의 비전
삶을 다른 시선으로 보게 하는 영화를, 개인적이면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작품 세계를 만들어가고 싶다. 다방면으로 탐구하며, 사랑을 잃지 않은 채 스스로를 계속 밀어붙이려고 한다.

야자 다케노신 YAZA TAKENOSHIN

<환상의 불빛 Hinotama: Ball of Fire>

고등학생 다케시는 부모의 이혼으로 집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피해 어린 시절 친구에게 들은 정체불명의 ‘불덩이’를 찾아 헤맨다. 다케시는 점점 집착하며 그 일에 몰두하고, 본의 아니게 동생이 가족의 감정적 짐을 홀로 떠안게 된다.

이야기의 시작
<환상의 불빛>의 일본어 제목을 직역하면 이러하다. ‘불덩이를 보았다’. 8년 전, 한 친구가 내게 그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의 증언을 듣고, 나 또한 나를 사로잡는 신비로운 빛을 직접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른 뒤, 어느 날 문득 내가 그 빛을 더 이상 찾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 순간, 어린 시절의 나 자신이 낯설게 느껴졌다. 당시 경험을 붙잡아두고 싶어 이 영화의 이야기를 써나갔다.

기억에 남는 순간
영화의 마지막 촬영은 이미지를 덧입히는 특수효과의 배경으로 쓸 기차 창문을 담는 것이었다. 창문 너머의 풍경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텅 비어 있는 듯한 그 모습이 영화를 만드는 여정의 마침표와 닮아 있다고 느꼈다. 몇 달간 프레임에 사람과 사물, 사건을 채워 넣었는데 이제부터는 아무것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다 이내 그 창문에 입힐 이미지를 떠올리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영화 작업은 이토록 섬뜩하다!

화두와 질문
세상과 제대로 관계 맺는 방법을 찾고 싶은 마음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여기서 ‘세상’이란 서로에 대한 책임으로 연결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을 가리킨다. ‘집안에서 벌어지는 혼란을 피해 바깥의 불덩이를 찾아 나섰던 소년이 기존의 세상으로 되돌아온다는 건 무엇을 의미할까? 그 일은 어떻게 가능한 걸까?’ 관객도 이 질문을 떠올리길 바란다.

감독의 일
배우의 연기에 깊이 감동해 내가 감독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적이 있다. 연기를 비롯한 공연 예술에 깃든 씁쓸하면서도 경이로운 감정이 ‘덧없음’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한순간 존재하다 사라지는 연기를 카메라로 기록하고 간직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영화는 시간을 기반으로 하는 동시에 영원을 갈망하는 독특한 매체다. 아름다우면서도 오래 남을 수 있는 장면들을 만들고 싶다.

나의 비전
예술 작품이 내 삶의 도덕적 원천이 되어준다고 느낀다. 그 원천이 제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는 예술의 힘을 계속 믿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예술가와 관객이 일종의 공범이 되어, 예술이 계속 살아 있게끔 하는 거다. 훌륭한 작품이 계속 탄생해 우리에게 영향력을 발휘해주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내 필모그래피 중 한두 편이라도 그 일에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샤샹크 왈리아 SHASHANK WALIA

<어둠 속의 새들> Birds in the Dark

경찰 정보원 자그타르는 무슬림 남성 아미르를 연행하다 놓아주고, 도망치듯 떠났던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는 농업 노동자의 투쟁이 시작되고 있었다. 자그타르가 지주이자 전 연인인 라만과 재회하고, 그를 찾아온 아미르는 노동자 조직의 우두머리를 만나면서 연대의 감정이 생겨난다.

이야기의 시작
몇 년 전, 영화 프로듀서와 인도의 펀자브로 향했다. 펀자브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국경에 걸쳐 있는 데, 우리에게는 가족이 파키스탄에 속한 펀자브에서 이주해왔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여행 중 한 마을에서 일용직 농업 노동자들이 공동 경작을 위해 할당된 땅을 점유한 지주에게 항의하는 모습을 봤다. 그들의 용기와 저항이 마음에 오래 남았고, 그 지점에서 영화가 탄생했다.

기억에 남는 순간
영화의 가장 중요한 장면을 위해 실제 농업 노동자가 필요했다. 팀원들과 이틀간 5개 마을을 돌아다니며 함께해줄 이들을 찾았다. 주민들이 우리의 작업을 지켜보며 이 영화를 믿어준 덕분에 촬영 당일 70명에 이르는 사람이 아이와 부모, 친구를 데리고 나타났다. 불가능해 보이던 장면이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화두와 질문
<어둠 속의 새들>은 현대 펀자브 사회의 풍경 속에서 젠더, 계급, 카스트, 섹슈얼리티를 교차시키며 탐구한다. 서로 얽힌 요소들을 따라가다 보면, 결국 가장 인간적인 현상인 사랑을 마주하게 된다. ‘노동’과 ‘퀴어’라는 개념을 새로운 방식의 사랑을 상상하는 일까지 확장해보고 싶었다. 사랑이 또 다른 가능성과 대안을 열어주고, 연대와 저항을 위한 공간이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이 영화가 찾아가는 지평과 맞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감독의 일
사람과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왔다. 타인을 깊이 들여다보며 그들의 열망과 희망, 고충과 균열까지 이해하고 싶었다. 누군가의 삶을 꾸밈없이 담아내는 게 영화 작업의 가장 큰 어려움이지만, 그 과정을 기꺼이 즐기고 있다. 스스로를 돌아보며 알고 있다고 여기던 것들을 뒤흔들고, 계속 배워가며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영화만의 힘
추상의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 영화는 이야기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만들어내며 무의식의 영역이나 마음 깊은 곳까지 닿기도 한다. 그 형식적 가능성 덕분에 다른 매체로는 마주하기 어려운 세계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여기에 집단적 감상 경험이 더해지며 영화를 더 강력한 매체로 만든다.

나의 비전
새로운 형태의 자본주의가 인간관계와 삶의 방식을 규정하는 지금, 인간다움을 지켜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서로 연결되어 연대하고, 공감하고, 사랑하는 능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내 영화의 지향점이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 살아가야 하고, 영화가 사랑을 경계 너머로 나아가게 해줄 거라 믿는다.

다르한 툴레게노프 DARKHAN TULEGENOV

<탯줄 The Cord>

미국 대학 입학을 앞둔 쿠아니시는 싱글 맘 디나라의 자랑이지만, 그에게는 알 수 없는 세계가 있다. 어느 날 쿠아니시가 얽힌 살인 사건이 벌어지자 부유한 친구들의 부모는 쿠아니시를 범인으로 몰아간다. 디나라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아들을 지켜야 한다.

이야기의 시작
내가 영화에 담아내는 이야기는 언제나 가족 관계에서 출발한다. 이번엔 ‘사랑의 한계에 대한 탐구’에서 커다란 영감을 얻었다. 긍정적으로 여기기 쉬운 사랑의 이면을 보여주고자 했다. 사랑의 진정한 대가와 사랑이 극단으로 치달을 때 벌어질 수 있는 일들을 다루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화두와 질문
‘탯줄’이 내게는 ‘끝나지 않는 연결’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다가온다. 엄마와 아이 사이의 물리적 끈이 잘려나가도 그 사이의 유대는 기억과 본능, 운명으로서 계속 존재하지 않나. 끊어내려 해도 우리의 내면에 여전히 남아 있는, ‘보이지 않는 끈’에 관한 영화다.

감독의 일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자 스스로를 탐구하는 내밀한 과정. 때로는 의미 있는 놀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가 현실의 복잡다단한 경험과 감정을 적극적으로 들여다보며 의미를 찾아갈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영화만의 힘
마음을 굳게 닫은 관객도 영화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감정을 함께 느끼게 되지 않나. 평소 감춰둔 감정과 마주하고, 이를 꺼내 보일 기회가 되어줄 힘이 영화에 있다.

나의 비전
내 영화가 관객에게 닿아 치유의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마음을 회복하고, 무언가를 이해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