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지금 젖었지만 축축하지는 않다
<젖은잡지> 편집장 정두리
“우린 가능한 한 많은 독자들이 하루 종일 꼴려 있고 젖어 매일 방탕 한 성생활로 인생을 탕진하길 바란다.” <젖은잡지> 창간호 서문 속 정두리 편집장의 문장이다. 여성이 만드는 ‘에로 아트북’을 표방하며 금기의 영역으로 천진하게 뛰어든 발행인이자 편집장 정두리. 그녀는 수간(獸姦)부터 SM 플레이, 동성애 등 상상 이상의 수위를 넘나들며 널리 음란을 전파하고 있다.
2013년 총제작비 20만원으로 완성했던 창간호를 시작으로 이제 <젖은잡지>는 배포와 동시에 1천5백 부가 완판되는 어엿한 독립 잡지로 성장했다. 선구자의 행보가 그러하듯 지난해 정두리 편집장은 음란물 유포죄로 고소당하기도 하고(최종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악플러 1백50여 명을 고소하는 등 모난 날들을 보냈다.
“세상에는 이성애자 남성만 살고 있지 않다. 이성애자 여성은 물론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 등 다양한 성적 취향을 지닌 이들이 있지만 성인물이라 유통되는 것 대부분이 이성애자 남성 입맛에 충실하다. 이들에게 섹시해 보이는 피사체가 내게는 전혀 야하게 와 닿지 않는 게 내내 불편했다.”
읽을거리에도 충실한데, 가령 본디지(bondage, 결박) 페티시를 주제로 화보를 기획하면 덧붙여 본디지 플레이를 하기 전 유의 사항과 응용하면 좋을 결박법을 설명하는 식이다. “음침한 시선은 거둬내고 페티시에 객관적으로 접근하고 싶다. 한국에는 ‘내게 이런 성적 환상이나 페티시가 있다’고 터놓는 문화도 없을뿐더러 페티시의 정의조차 정립되어 있지 않으니 소라넷 몰카나 리벤지 포르노(보복으로 과거 성관계 동영상을 유포하는 것) 등 기형적인 형태들이 등장하는 거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성’ 같은 구성애 아줌마의 구호를 외치려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성인물에 등장하는 여성은 ‘밝히는 여자’ 정도로 단순화돼 있지 않나. 여성도 남성만큼 성욕이 있을 수 있다는 전제는 기본이고, 괴상하고 이상해 보일 법한 다양한 성적 취향을 지닌 존재임을 알리고 싶다.”
속도가 주는 순수한 쾌감에 사로잡히다
모터사이클 선수 이지혜
“모터사이클은 교감할 수 있는 기계다. 몸과 기계가 완전히 밀착하기 때문에 자동차보다 친밀감이 높다. 타이어와 지면의 느낌이 피부로 고스란히 전해지고 엔진의 움직임이 심장박동처럼 느껴진다. 모터사이클을 승마와 비교하는 이유다. 승마와 마찬가지로 지금 타고 있는 대상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모터사이클의 능력을 한계치 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곧 선수의 능력이다. 기계에 끌려다니지 않고, 호흡을 어떻게 나누는가가 관건이다.” 국내 유일의 여성 모터사이클 선수 이지혜. 모터사이클이 좋아 정비까지 섭렵했다.
“미용사인 어머니의 권유로 미용학과에 입학했지만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2010년 BMW 모토라드에 신입 미캐닉으로 입사했다. 미캐닉이야말로 철저히 남성 중심의 세계다. 입사했을 때 ‘저러다 그만두겠지’, ‘놀다가 가’ 식의 분위기가 있었고, 사수는 ‘왜 여기서 고생하느냐’고 혼도 냈다. 그래도 매일 밤 11시까지 남아 공구 쓰임새부터 익혔다. 작업복 한쪽 주머니에는 메모장, 다른 쪽에는 드라이버, 스패너 같은 공구를 꼽고 살았다. 엔진오일 교체하는 법을 익히는데만 6개월이 걸렸으니 초반에는 남성 미캐닉보다 확실히 진도가 안나가더라. 하지만 어느 순간 실력에 가속도가 붙었다. 3년 만에 주임으로 승진하게 됐다. 이례적인 인사다.(웃음)”
첫 레이스는 2012년 KSBK(코리아 슈퍼바이크 챔피언십) 로드 레이스. 이후 4년 만에 당당히 KSBK R3 루키 챌린지 B 클래스 3위를 차지하며 여성 최초로 포디움에 올랐다. 그녀의 가까운 꿈은 모터사이클로 세계 여행을 하는 것. 미캐닉을 시작한 것도 오지에서 바이크가 고장났을 때 혼자 힘으로 고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런던에서 동쪽으로 한없이 달려 뉴욕에 닿았던 이완 맥그리거가 떠올랐다. 몽골의 사막, 카자흐스탄의 바위산을 달릴 그녀를 상상해봤다. 시즌 2·3위를 목표로 하는 그녀의 올해 첫 경기는 3월 27일 KSBK 개막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두 여자의 판타지
플레져랩 대표 곽유라·최정윤
중환자실을 담당하던 간호사, 해외 곳곳을 다니며 글을 쓰던 기자. 두 여자가 뭉쳐 특이한 사업을 벌였다. 그녀들이 만든 ‘플레져랩(Pleasure Lab)’이라는 공간은 언뜻 보기엔 아담한 디자인 소품 가게인 듯하지만 사실 딜도나 바이브레이터 등의 섹스 토이를 파는 세련된 성인용품점이다. 그리고 섹스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 특히 여성들이 가진 성에 대한 폐쇄적인 생각을 바꿔나가고자 하는 두 여자의 의지가 담긴 공간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인용품점은 어둡고 음침한 곳이다. 남성의 욕망과 판타지에만 초점을 맞춘 가게들이 대부분이기도 하고. 성인용품은 변태가 파는 물건, 변태가 쓰는 물건이라 생각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왜 여자의 쾌락을 위한 공간은 없을까? 왜 모든 성인용품 가게는 어두침침하며, 죄를 짓는 기분으로 몰래 드나들어야 하나?’라는 의문에서 출발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여자의 판타지를 위한, 여자의 기쁨을 위한 예쁘고 밝은 공간을 만들어보고 싶었다.”(곽유라)
가게 문을 연 지 어느덧 1년이 다 돼간다. 한국 사회에 사는, 이제 갓 서른을 넘긴, 평범한 두 여자에게 서울 한복판에 성인용품 가게를 여는 건 예상대로 쉽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성인용품을 판매하는 소매업은 ‘향락업’으로 분류되어 정부의 창업 지원을 받을 수 없었고, 주변의 시선 또한 낯설기만 했다.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이런일을 하니 한국의 결혼 시장에서 점수가 떨어질 테고, 연애하기도 힘들 것이며, 어떤 이에게는 음란한 여자로 치부될 텐데 두렵지는 않으냐고. 하지만 난 걱정 안 한다. 오늘은 어제보다 섹스에 대해 솔직하고 명쾌하게 말하고 생각하는 여자들이 많다. 또 내일은 더 많아질거란 걸 안다. 스스로의 삶을 사랑하고, 욕구와 섹스, 자신의 몸과 쾌락을 이해하는 당당한 여자가 왜 숨어야 하나?”(최정윤)
느끼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삶
퍼포먼스 아티스트 성규리
조금 특별한 일상을 사는 여자가 있다. 하루는 패션 화보 속 모델이 되고, 또 다른 날은 관객 앞에서 즉흥적인 음악을 만들고 공연을 벌이며, 어떤 날은 바텐더가 되어 칵테일을 만들기도 한다. 퍼포먼스 공연팀 ‘루프엑스’의 멤버 성규리는 그렇게 매일을 다르게 산다. “노래를 부르고 싶은 날엔 가수가 되고, 때론 춤도 추는 거다. 하고 싶은 일이 생각나고 또 그 일을 함께 도모할 사람이 떠오르면 어떤 분야든 일단 도전해보는 편이다. 자유롭고, 신나게 말이다. 10년 후에는 밴드를 결성해보고 싶고, 언젠가는 연극 무대가 있는 호텔도 만들 계획도 세웠다.”
그녀는 자신의 삶을 한 가지 직업, 하나의 단어로 규정짓고 싶지 않다. 스스로의 색깔을 하나씩 찾고 또 이를 표현하며 사는 걸 운명이라 느낀다. 늘 새로운 일을 꿈꾼다니, 멀리서 보면 현실과는 조금 동떨어진 듯 막연한 삶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추구하는 자유란 이렇다. 한순간 폭발하고 금세 사그라지는 신기루가 아니라, 오랜 시간에 걸친 고민과 노력을 더해야만 비로소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 홀로 시작했지만 10년째 유지하며 지금은 제법 큰 규모의 극단 형태를 갖추게 된 공연팀 ‘루프엑스’가 바로 그녀가 자유를 좇아 만든 결과물 중 하나다.
루프엑스가 요즘 선보이는 공연의 제목은 ‘블랙 언더(Black Under)’다. 눈을 감은 상태에서 느껴지는 흐릿한 움직임, 희미한 빛의 형체, 스치는 소리 등 완벽한 어둠에 이르기 직전의 순간을 극적으로 표현해내는 무대다. ‘몸짓과 소리, 조명 장치를 이용해 눈을 감았을 때 느껴지는 것들의 형태를 추상적으로 그려낸다. 모호한 상태를 느끼는 그대로 표현하는 무대와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녀의 일상이 사뭇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이 공연을 낯설어하는 관객이 많다. 정확히 어떤 장르냐고 묻기도 하고. 글쎄, 공연에 대한 답을 내는 몫은 관객에게 맡겨두고 싶다. 한 단어로 정의 내리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냥 보고 느낀 그대로가 공연의 주제 그 자체니까.”
몸 위에 그림을 새기는 보통 여자
타투이스트 그림
커다란 고래와 독수리, 화려한 날개를 펼친 나비, 줄기가 엉킨 꽃, 타오르는 촛불, 고양이와 주사위, 초록색 물고기, 서늘하게 날이 선 칼과 앙상한 야자수. 타투이스트 그림(Greem)의 몸에 새겨진 그림들이다. 저마다의 의미가 서로 연관 지어지지 않는 듯한 각각의 타투에는 그녀가 스쳐온 일상과 감정, 사랑, 아픔 그리고 성장이 함께 녹아 있다. 연인이 직접 새긴 고래와 고양이 타투,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난생처음 몸에 새긴 물고기부터 타투이스트로 진로를 정하며 자유로워지기 위해 적은 특별한 글귀까지. 기억하고픈 순간들을 담은 그림을 작고 아담한 몸 위에 가득 새겼다. “모든 타투에는 새길 당시의 추억이 담겨 있다. 타투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마 어떤 기분인지 알 것이다. 하나씩 새기면서 한 부분씩 채워가는 그 맛. 하지만 오른쪽 다리는 아직 하얀 도화지로 남겨뒀다. 세계 여기저기를 다니면서
좋아하는 타투이스트에게서 타투를 하나씩 받아 꽉 채워 넣을 생각이다.”
어린아이가 스케치북을 펼쳐 뽐내듯 예쁜 그림의 타투를 하나하나 내보이던 그녀의 순수한 열정과는 상관없이, 사회와 타인의 시선이 차갑게만 느껴지는 때도 있다. 시간이 갈수록 문신에 대한 인식이 유연해지고는 있지만 까만 잉크로 빼곡히 채워진 그녀의 모습이 어디서나 튈 수밖에 없는 건 사실이다. “길을 걸을 때나 지하철, 버스를 탈 때, 특히 어르신들이 많은 자리에 가면 아무래도 불편하다. 나를 향해 혀를 내두르기도 하고 심지어 손가락질을 하기도 한다. 사회의 편견을 혼자 깨부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거기에 너무 얽매여 살고 싶지는 않다. 이렇게 문신이 많은 내가 오히려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면 또 새로워 보이지 않나? 나는 나쁜 여자가 아니라 그냥 타투이스트다.”
술만큼 맛있는 이야기 한 잔을 빚다
대동여주(酒)도 콘텐츠 제작자 이지민
국민 주모, 음주 전문가, 술의 여제, 술 골라 주는 언니··· 이지민 대표를 수식하는 말은 많다. LG와인사업부에서 근무하고 식음료 홍보 전문가로 활동하며 세상의 온갖 술을 탐험하다 전통술을 만난 그녀는 ‘전통주 덕후’를 자처하며 버튼만 누르면 전통술의 역사와 지역의 특징, 제조 에피소드를 술술 풀어놓는 전통주 전문가가 됐다.
“술 한 잔에 지역 식생활이 촘촘히 연결된 점이 전통주의 매력이다. 제주도에 가면 고소리술을 꼭 맛보길 추천한다. 벼농사가 어려운 제주에서는 주로 조 농사를 지었다. 점성이 없는 거친 곡물인 조로 오메기떡을 만들었는데 그 떡을 발효시킨 것이 오메기술이다. 그리고 그 오메기술을 증류한 게 고소리술이다. 한 잔 목으로 넘기면 화산섬 특유의 거친 느낌이 입 안 가득 퍼지는데 ‘안 마셔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마셔본 사람은 없다’는 말뜻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전통주는 그 지역 음식과 가장 잘 어울린다는 점도 흥미로운데 전주 한정식에는 전주의 이강주가 최고의 마리아주다. 이강주에는 배와 생강, 한약재인 울금이 들어가는데 알싸하고 쌉쌀한 맛이 전이나 부침 등 기름기 많은 음식과 기막힌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지인들에게 치맥이 아니라 치킨에 이강주, ‘치강’을 권하기도 한다.”
이지민 대표는 전통주 하면 연상되는 한복 입은 어르신 이미지의 정반대에 서 있다. 2015년 5월부터 친구 박초희와 함께 ‘대동여주(酒)도’라는 재기발랄한 간판을 내걸고, ‘두 명의 젊은 여자가 전국 술을 다 마시겠다’는 각오로 전국 도가를 누비고 있다. 이 사랑스러운 술꾼들의 생생한 이야기는 대동여주도 페이스북 페이지(www.facebook.com/drinksool)에서 만날 수 있다. “남루한 도가에 담겨 있는 이야기가 그저 좋더라. 고서 속 우리 술 이야기, 한평생 술만 빚은 명인들의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 보석처럼 가공하고 싶다. 고증할 수 있는 자료도 많지 않고, 양조장에서 문서화하지 않은 비법들도 많아 포스팅하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린다. 돈 받고 하는 일도 아닌데 왜 이리 열심이냐고 할 수 있겠지만 좋은데 별수 있나.(웃음)”